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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헝가리 거친 평야에 잠들다

1월31일 숨을 거둔 거장,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세계

‘시각적으로 양식화된 영화, 우아한 안무로 구성된 숏, 롱테이크와 플랑 세캉스(한 신이나 시퀀스가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지는 것)의 미학 혹은 과도한 매너리즘적 도취’, 이 모든 문구는 헝가리의 거장 미클로시 얀초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수사들이다.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시네필의 선두자리에서, 벨라 타르보다 앞서서 미클로시 얀초는 헝가리의 영화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전성기는 1960, 70년대다. 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의 영향이 채 가시기 전인 그 시절에, 전세계 영화계는 이른바 ‘새로운 영화’를 향한 독립적 새 물결로 제각각 나아가고 있었다. 당시에 얀초가 만들어낸 동부 유럽에서의 새로운 바람은 강한 의지를 동반한 것이었고, 매우 정치적인 색깔을 띤 돌풍이었다. 역사적인 소재들을 한껏 활용했지만, 그는 절대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를 가다듬는 법이 없었다. 대신 형식적인 엄격함에 스스로를 가뒀으며, 관객을 전통의 아름다움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얀초의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헝가리의 시골 전경은 역사의 메아리를 새기기 위한 초석이라 볼 수 있다.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대신 그는 과거나 현재의 역사를 우회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관객을 이끌어간다. 이 간접적 방식은 아마도 ‘정치적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에서 시작된 방안일 것이다. 역사적 소재에 이국적 도피의 장치들을 삽입함으로써 그는 좀더 자유로운 화법으로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완성했다.

<침묵과 외침>

헝가리 영화계의 선두주자

미클로시 얀초는 1921년 9월27일 헝가리의 바츠에서 태어나, 2014년 1월31일 부다페스트에서 숨을 거둔 영화 연출자이다. 사망 당시에 그의 나이는 만 92살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호르티 정권 치하에서 2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목격했고, 이후 피를 딛고 총을 통해 일어선 공산주의로의 교체과정을 두눈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헝가리혁명을 직접 목도했다. 대학 시절 얀초가 전공한 학문은 ‘법학, 민족학, 예술사’라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운 것은 졸업 이후인 1946년으로, 부다페스트 고등영화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스탈린 치하에서 영화공부를 시작했던 얀초는, 1951년에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약 10년간 상투적 정치 구호를 담은 ‘선전영화’ 계열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갔다. 스크린 데뷔작은 1958년에 만든 <종은 로마로 갔다>이다. 이 영화는 세계대전의 종식을 배경으로, 나치 부대에 들어간 한 헝가리 학생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마크를 달고 있단 평가를 듣는 이 작품 이후에, 그가 자신만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60년대에 이르러서다.

항상 그렇듯 선구자들은, 작품을 통해 전체 집단의 미학적 색채를 가늠할 교두보 역할을 맡는다. 미클로시 얀초를 헝가리 영화계의 선두주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른바 헝가리의 거장들 ‘이스트반 자보, 주디트 엘레크, 이스트반 갈, 그리고 벨라 타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색채를 이해할 발판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얀초는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를 인지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작가다. 선배가 없었기에 그는 더 고단했다. 60년대에 이런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둔다. 대표작이 <라운드 업>(1966)이다. 흑백필름으로 촬영된 이 역사물은, 향후 그의 화려한 경력에의 발화점이 되어준다. 영화의 내용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1848년의 헝가리혁명이다. 짧지 않은 시퀀스의 길이와 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 그리고 민속적 음악의 사용까지, 이 작품의 미학적 요소들은 이후 계속되는 얀초의 성향을 가늠케 한다. 1963년작 <칸타타> 역시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헝가리 작곡가 벨라 바르톡의 <칸타타 프로파나>(1930)를 바탕으로 각색됐으며, 1956년의 부다페스트 봉기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담는다. 이 밖에 1917년의 러시아 국경에 대해 말하는 영화 <적과 백>(1967)이나 혁명의 기원과 헝가리 파시즘의 모습을 절도 있게 표현한 <침묵과 외침>(1968)도 이 시기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붉은 시편>

매너리즘이 아닌 바로크 혹은 로코코

1970년대에 이르러서 미클로시 얀초의 이름은 친근감을 갖고 부를 수 있는 영화계의 대명사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피로감마저 호소할 정도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19세기 후반의 농민반란을 다룬 1972년작 <붉은 시편>은 이른바 이 시기 그의 영화의 정맥이라 이를 수 있다. 이 영화는 서정적이지만 플롯의 측면에서는 혼잡스러운 면모를 지녔으며, 시각적으로 관능적일 뿐 아니라 무용과 뮤지컬의 요소도 적절히 섞여 있는 얀초의 마스터피스이다. <붉은 시편>을 통해 얀초는 1972년의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1973년에는 헝가리 예술계의 저명한 코슈트상 또한 수상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는 점차 침체된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인터뷰에서 장 외스타슈가 이르듯, “미클로시 얀초에게서 참을 수 없는 매너리즘을 발견하게 된다. 하염없이 긴 시퀀스의 공허함이라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외스타슈의 발언 역시 역으로 얀초의 세계에서 롱테이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비상업적인 영화언어를 통해 그는 문화적인 민족주의를 각성시키려고 노력했고, 또한 시적이고도 풍성한 알레고리의 스타일로 대중과 소통하려고 한 작가였다. 분명 그는 더 양식화됐고, 점점 더 명백하게 상징화되어갔다. 하지만 이 시기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를 수식할 단어로 화려한 매너리즘보다는 ‘바로크’ 혹은 ‘로코코’가 더 잘 어울려 보인다.

체코에 밀로스 포먼이 있다면, 그리고 이탈리아에 마르코 벨로키오가 있다면, 아마 헝가리에는 미클로시 얀초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동시대 유럽 대륙의 한편에서, 얀초는 스스로 역사와 세계적 양식들에 대한 견인차의 표식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의 영화는 동유럽 최초의 ‘환상서사시’이며, 또한 화려한 ‘역사의 프레스코화’이기도 하다. 소비에트라는 거대 제국에 속박됐던 작은 나라 헝가리의 국가적인 아픔을, 그리고 그 내부적인 상처들을 그는 자신의 필름에 고스란히 아로새겼다. 그의 카메라를 통해 헝가리의 거친 평야는 살아 있는 화폭이 되고, 영화는 허풍스런 매력을 지닌 사회적 메타포로 활약한다. 비록 1980년 이후 굵은 선을 계속 이어가진 못했지만, 누구나 한번이라도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얀초의 충직한 시선과 매혹적인 율동을 절대 잊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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