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몇번인가 날벼락 같은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슬러올라오다보면 스티브 매퀸, 제임스 캐그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성적인 영화들, 제시카 랭이 주연하고 존 길러만이 감독한 <킹콩>,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 카사린 브락, 란도 브잔카 주연의 말도 안 되는 이탈리아 소프트 코믹 포르노 <더블데이트 대소동>(이 작품은 시리즈로 나와 십수년 뒤 <씨받이 대소동>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기도 했다. 아, 씨받이 대소동이라니), 이소룡의 <용쟁호투>와 <정무문>, 허장강·도금봉 주연의 엽기적인 공포물들, 박노식의 <용팔이> 시리즈 등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입학 전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들이었다.
조금 자라서 몇번인가 그런 청천벽력과도 같은 작품들을 또다시 만나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던가 어른흉내를 내면서 명동 어디쯤 다방에 들어가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꽂고 담배를 질끈 물면서 보다가 담배에 입 데는 줄 모르고 본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가 있고,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으로 홀홀단신 파리에 건너가 보았던 고다르와 파졸리니와 브레송의 영화들이 그런 영화들이었다.
저 장면들은 어떻게 나온 거야? 어떻게 저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어떻게 엮어나갈 수 있는 거야? 타란티노는 어떻게 <펄프픽션> 같은 영화를 만들었고 팀 버튼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거고 <파이트 클럽>과 와 <와호장룡>과 <엑스맨>과 <매트릭스>는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문제는 ‘왜’가 아니고 ‘어떻게’였다. 하다못해 최근 들어 가장 감동적으로 본 영화들, 오즈 야스지로 영화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같은 담담한 영화를 보고서도 내 질문은 어떻게 저런 이야기로 어떻게 저런 감동을 줄 수가 있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작품을 만들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인데도 정말 곤혹스런 질문이 있다. “왜 만들었습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얼마 전 외국의 어느 감독이 우리나라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를 받고는 소감으로 한국의 기자들은 다른 나라 기자와 달리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는 얘길한 적 있었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다.
“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목구멍에선 “…왜 그런 걸 물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서 목구멍에 걸린 말들이 서로 나가보겠다고 아우성치지만 땀을 삐질 흘리면서 꾹 참는다. ‘왜’라니, 당연한 거 아닌가? 내 경험으로 봐도 외국에 나가 외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같은 질문인데도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왜 레슬링이란 소재를 선택하셨습니까?”와 “어떻게 레슬링이란 소재를 선택하게 되었습니까?”는 언핏 같은 질문 같지만 대답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한 미묘한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대답의 출발을 달리하게 된다. “왜 했냐?”고 물으면 스스로 ‘왜 했지? 잘못했나?’ 머리에 쥐가 난다. 반대로 거의 같은 말인데도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내 대답은 명쾌해진다.
‘왜’는 관념과 명분을, ‘어떻게’는 실제를 보여준다. ‘왜’는 관념의 비밀을 ‘어떻게’는 실제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영화인이 지나치게 영화를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마틴 스코시즈는 기술 중에 가장 어려운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이라고 얘기한다. 창작자에게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좀더 그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