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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정재영 시대의 도래

<열한시>부터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까지 개봉 대기 중인 배우 정재영

<열한시>는 근미래 SF영화다. 블랙홀 내 웜홀을 통해 시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론에 근거, 정우석(정재영) 박사는 지구 핵 에너지인 코어 에너지를 활용해 웜홀을 지탱하고 타임머신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난무하는 <열한시>에서 정재영은 ‘박사’다. 거대한 시간여행 연구소 앞의 정우석 박사는 얼핏 그가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들과 무척 달라 보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오랜 기간 촬영했다는 점도 이전과 다른 요소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정재영은 “최근 빠듯한 일정 때문에<그래비티>를 보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다”며 “<열한시>는 시간여행 혹은 SF 장르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출연하게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이런 부류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대니 보일의 <선샤인>(2007)이라고. 말하자면 ‘이런 작품을 하고 싶어 기다려왔다’는 얘기다. 어쩌면 <열한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정재영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열한시> 이후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에 이르기까지 내년 상반기쯤 그의 영화 3편을 연달아 만나게 된다. 이미 내년의 ‘대세’를 예약한 배우가 바로 정재영이다.

시간을 달리는 배우랄까. 이리저리 옮겨다니느라 몸이 두개, 아니 여러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지난 10월 말 크랭크업한 <플랜맨> 이후 정재영은 곧장 <역린>에 합류했다. 며칠 전 처음으로 출연한 <역린>은 이미 30회차 정도 촬영이 진행된 상태로, 이재규 감독은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라도 꼭 그를 출연시키고 싶었다. <역린>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바로 내시다. <왕의 남자>(2005)의 장항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장광, 그리고 TV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의 정은표와 비교해도 가장 그 모습이 궁금하다. 이재규 감독의 오랜 기다림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결벽증이 심한 남자 ‘정석’으로 출연하는 <플랜맨>은 로맨틱 코미디, 정조 암살 사건을 다루는 <역린>은 사극 스릴러, 그렇게 두 영화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 두 영화보다 앞서 촬영을 끝낸,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정호 감독의 범죄 스릴러 <방황하는 칼날>까지 더하면, 그는 이제 개봉하게 된 <열한시>의 촬영을 끝낸 다음 숨 가쁘게 무려 3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열한시>를 두고 “워낙 오래전에 찍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농담 섞인 얘기가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게 정재영은 장르와 장르는 물론, 미래와 현재를 오가며 요즘 가장 흥미로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그를 향한 궁금증은 거기서 시작됐다.

‘럭셔리한’ 세트 촬영 속에서 생긴 집중력과 앙상블

<열한시>의 시간이동 프로젝트 연구원 우석은 러시아의 한 투자 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의 중단을 통보받는다. 하지만 그는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지완(최다니엘)을 비롯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완의 여자친구이기도 한 영은(김옥빈)과 함께 위험한 테스트 이동을 감행한다. 그렇게 그들은 24시간 뒤인 내일 오전 11시로의 시간이동에 성공한다. 그런데 시간이동 프로젝트 성공의 증거로, 그 하루 동안의 CCTV 파일을 확보한 우석과 영은은 그 파일에서 연구원들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동을 했던 그 하루 동안 연구소가 폭파의 징후를 보임과 동시에 정체불명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하루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제 우석과 다른 연구원들은 그 다음날 11시, 그러니까 CCTV에 담긴 그 미래의 사건을 막기 위해 숨겨진 시간 속의 사실을 추적하기로 한다.

<열한시>의 독특한 점이라면, 주 무대인 시간이동장치가 있는 연구소에서 모든 일이 거의 실시간으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끼>(2010)와 <글러브>(2011), 그리고 <내가 살인범이다>(2012) 등 최근 언제나 힘든 야외 로케이션이 많은 영화들을 해왔던 그로서는 일단 무척 ‘편한’ 영화였다. 거의 모든 촬영은 수영만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내에 마련된, 얼핏 전경이 우주정거장을 연상시키는 둥근 연구소에서 이뤄졌다. 딱히 햇빛 볼 일도 땀 흘릴 일도 없었다. “지난해 여름 무지하게 더웠다. 다른 영화 촬영장 얘기를 들으니, 폭염으로 실신한 배우도 있었다더라. 솔직히 시원한 세트에서 오전부터 찍고, 저녁 되면 직장인처럼 퇴근해서 해운대에서 한잔하니까 할리우드영화 부럽지 않은 느낌? (웃음) 게다가 지금껏 전국 곳곳에서 촬영하며 호텔에서 잔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바캉스 시즌의 해운대에서 잠도 호텔에서 자니까 <열한시>는 지금껏 내가 참여한 작품들 중 가장 럭셔리한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럭셔리하고 편한 느낌은 집중력으로 이어졌다. 최다니엘, 김옥빈, 이대연, 이건주, 신다은 등 연구소의 또 다른 배우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세트에서 동고동락했기 때문. “세트에만 갇혀 있다 보면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막상 매일 같이 모여서 호흡을 맞추고 식사하고 촬영하고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연극하던 느낌이 떠올랐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이처럼 지지고 볶았던 적이 없다. (웃음) 크랭크업할 때 뭔가 멋진 연극 한편을 무대에 올리고 인사하는 기분이어서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나중에는 다들 너무 친해져서 서로 얼굴만 봐도 ‘빵’ 터지는 지경까지 가게 됐단다. “원래 사람끼리 호감이 생기면 그냥 뭘 봐도 웃기지 않나. 내게는 <열한시>가 그런 영화였다. 다들 너무 사랑스럽고 그냥 진지한 표정만 짓고 있어도 그게 왜 그렇게 웃긴지. (웃음) 냉정하게 따지면 연기에 방해되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연기란 결국 ‘호흡’이고 ‘앙상블’이다. 공동작업에서의 친밀감은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플러스가 될 수밖에 없다.”

질리지 않는 연기에 대한 욕심

<열한시>의 정재영은 ‘고지식한’ 남자이고 ‘과거에 얽매인’ 남자다. 얼핏 그가 연기했던 이전의 다른 캐릭터들이 떠오른다. <바르게 살자>(2007)에서 경찰서장(손병호)의 신호위반에도 딱지를 끊던 ‘유도리 없는’ 경찰 도만처럼 <열한시>의 우석도 앞뒤 안 보고 ‘직진’만 하는 인물이다. 또한 2년 전에 암으로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미래로 가서 약을 가져오고 싶다는 순진한 바람으로 연구를 시작한 우석은, 오래전 아들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카운트다운>(2011)의 건호나 15년 전 자신의 여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긴 시간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내가 살인범이다>의 형사 형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그의 곁에는 늘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그 아련한 기억만 남아 있다. 말하자면 언제나 혼자다. <우리 선희>(2013)의 별 볼일 없는 영화감독 ‘재학’의 모습도 그런 고독감과 멀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이기적인 고독이다. 영화 속 영은은 이렇게 말한다. “팀장님(정재영)은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죠? 그래서 팀장님 주변 사람들이 늘 외로운 거예요.” 이에 대해 정재영은 “우석은 내가 연기한 이전 남자들보다 훨씬 더 외롭고 이기적이다. 순전히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면서까지 주변의 희생을 강요한다. 현실의 나와는 백퍼센트 다른 인물이지. (웃음) 심지어 <강철중: 공공의 적1-1>(2008)에서 내가 연기한 조폭 이원술조차도 집에서만큼은 따뜻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열한시>는 내가 처음 진정한 ‘악역’으로 나온 영화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최근 행보는 ‘도전’으로 정리해도 될 것 같다. 그것은 배우로서 뒤늦게 생긴 욕심 때문이다. “원래 성격상 ‘한번에 하나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원하는 사람이 있고, 작품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3개, 4개 왜 못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면서 배우로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늘 하던 것만 하면 언젠가 높은 벽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선희>나 <역린>은 사실 도저히 할 수 없는 스케줄이지만 무작정 도전하는 느낌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그런 마음의 변화 속에는 ‘배우로서 여전히 영화가 질리지 않는’ 그 핵심이 가장 중요하다. “난 원래 뭐든지 잘 질리는 사람이다. (웃음) 뭐든 조금만 하면 쉽게 싫증이 나서 여태껏 뭔가 진득하게 배운 취미도 없다. 테니스, 골프, 낚시, 등산 등 다 시작은 해봤는데 좀 하다 보면 금세 질린다. 내가 승부욕이 강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도통 실력도 늘지 않고. (웃음) 그래서 늘 내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은 ‘나중에 배우로 연기하는 것마저 질려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 하는 걸 보면 그것만큼은 아닌 것 같아 참 다행이다. 요즘엔 이왕 하는 거 더 잘해보자, 내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나 남들이 만류하는 것도 어디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난 지금도 계속 배우를 한다. (웃음)”

<방황하는 칼날>

<플랜맨>

정재영표 내시를 기대하시라

2014년에 만나게 될 정재영의 영화 3편,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

한지민과 호흡을 맞춘 로맨틱 코미디 <플랜맨>은 어디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것 같다. 아직도 팬들 중에서는 <아는 여자>(2004) 얘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좀 그런 느낌? 휴먼 코미디랄까, 내게는 <김씨표류기>(2009)가 그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랫동안 그 세계를 떠나 있으면 녹슬 것 같다는 생각에 ‘환기’ 차원에서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열한시>도 그렇지만 밝고 유쾌한 현장은 배우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것 같다. <플랜맨>에서 내가 연기하는 ‘정석’은 단 1초도 계획 없이 못 사는 남자인데, 본인의 계획에 없던 한 여자(한지민)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휴먼 코미디다. 슬랩스틱적인 요소도 많은 유쾌한 코미디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내내 안경을 쓰고 나온다는 점이다. 그동안 내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안경을 써본 적도, 써도 안 어울린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김씨표류기> 초반부에 잠깐 썼다가 벗어버리는데, <플랜맨>의 결벽증 심한 정석 캐릭터에는 어울리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써봤다. 나름 괜찮으니까 계속 쓰고 나오겠지? (웃음)

촬영 자체는 <플랜맨>보다 앞서 찍은 <방황하는 칼날>은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 등의 원작자이기도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내가 연기하는 아버지 ‘상현’은 하루아침에 소중한 딸을 잃고 범인을 직접 벌하려 찾아나선다. 지난해 겨울부터 대관령에서 가장 추울 때 눈밭을 뒹굴며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환경도 그런 데다가 캐릭터와 영화가 어둡다 보니 정신적인 압박과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 얼마 전 열심히 편집 중인 이정호 감독과 통화했는데, ‘아주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며 자신감이 대단하더라. <역린> 또한 <신기전>(2008) 이후 오랜만의 사극으로 현빈(정조) 옆을 지키는 내시 역할이다. 정조 암살을 둘러싼 그 묵직하고 역동적인 하루를 그린다. ‘정재영이 내시로 어울릴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나로서도 흥미로운 도전이고, 그 느낌이 영화의 전체적인 정서에도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참여하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데 내시라고 해서 남성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더라. 조선시대 내시는 여자와 잠자리도 했다니까. (웃음) 폐를 끼치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한참 진행된 영화에 뒤늦게 합류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꼭 출연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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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신래영·헤어 Azurer 김영주 원장·메이크업 조아 팀장·의상협찬 System homme, SWISS CHRISS by intermezzo, brooks brothers, Uniglo, PUMA Black station, Spe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