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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그의 욕망에 홀리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3-10-07

이정재

올가을 극장가의 진정한 승자는 바로 이정재다. 검은 갑옷을 입은 조선의 마키아벨리는 스크린 속에 부는 피바람을 잊게 할 정도로 관객을 매혹시켰나보다. “역모가 아니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2인자 수양의 콤플렉스와 종잡을 수 없는 잔혹함은 <관상>이 지닌 이야기의 결을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여기, 영화판을 뒤흔드는 악당이 등장했다. <신세계>와 <관상>으로 2013년 가장 주목할 만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정재를 만났다.

역모의 상. 영화 <관상>에서 친족을 배신하고 피를 부르는, 이리를 닮은 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마침내 등장한 수양대군의 모습은 한 시간의 기다림을 보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냥감을 어깨에 둘러멘 부하들과 함께 자신만의 작은 왕국으로 걸어들어오는 검은 갑옷의 남자. 수양은 세상을 기어코 제 발 아래 두겠다는 야심이 흘러넘치는 오만한 왕족이다. 배우 이정재가 수양대군을 연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연기하는 젊은 수양은 테스토스테론으로 충만한 선 굵은 폭군의 광기가 아닌, 일평생 고귀하게 자라온 남자가 손짓 하나로 불러올 수 있는 파국을 보여준다. 그건 단지 뛰어난 연기력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성취는 아니다. 한재림 감독은 언젠가 젊은 수양의 모습을 구상하며 “야망이 있으나 그 야망을 천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자질을 갖춘 배우이기를 원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관상>을 보고 나면 이정재가 바로 적역이었다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의 전작 <하녀>의 상류층 남자 훈에게서도 볼 수 있었듯, 이정재는 우아한 세계에 걸맞은 기품과 종잡을 수 없는 잔혹함을 두루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관객의 허를 찌르는, 그야말로 역모의 상이다.

최근 <관상>의 제작사 주피터필름과 쇼박스는 관객의 요청을 반영한 영화의 재편집본을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새로운 편집본에선 본편에서 볼 수 없었던 수양대군의 모습은 더 길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버전의 결말도, 주인공의 외전 격 이야기도 아닌, 미처 보여지지 않았던 악역 캐릭터의 모습에 대한 관객의 열망은 다소 이례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그건 촬영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수양대군의 전사(前事)를 치밀하게 설계해왔던 이정재가 노린 ‘뉘앙스’의 묘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극중에서 수양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뉘앙스적으로라도 수양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겠구나 싶은 모습들을 꼭 살리고 싶었다. 사실 수양이 폭군만은 아니었거든.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지만, 나중에 왕위에서 물러난 뒤 불교에 심취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읽고 이 사람이 혼자서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부분은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가 은연중에 반드시 표현을 해줘야 하는 모습이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에게 독침을 꽂아넣으려다 머뭇거리는 장면은 이정재가 의도한 뉘앙스가 특히 빛나는 순간이다. “시나리오에는 ‘야욕을 부리는 듯’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연기자가 너무 야욕만 부리면 캐릭터가 재미없지 않나. 조금은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처럼 연기를 할 때 양면성이 보이는 거거든. 이렇게까지 내 욕심을 채워야 하나 싶은 자괴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내가 <관상>을 선택한 이유가 된 장면이기도 하고.”

<관상>, 그리고 연초에 개봉한 <신세계>는 한동안 ‘톱스타’라는 수식어에 가려졌던 ‘배우’ 이정재를 다시금 주목하게 만든 작품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톱스타의 전형적인 그것이라기보단 배우로서의 욕심이 묻어나는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 위의 남자(<태양은 없다> <오! 브라더스> <신세계>), 혹은 선택의 기로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물(<하녀> <태풍> <관상>)의 초상을 이정재는 치밀하고 섬세한 감정의 결로 그려내왔다. 몇년간의 정체기에도 그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않았던 제작자와 감독들의 말은 옳았다. “너는 호흡이 잘 맞는 연출자나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난다면, 훨씬 더 좋아질 거야.” 결이 맞는 두 작품(<관상> <신세계>)을 만난 이정재는 화려한 40대를 열어젖혔다. 사설 도박단과 얽힌 이종격투기 선수로 출연하는 <빅 매치>, 악질 경찰 역을 맡은 <무뢰한>, 박훈정 감독이 또다시 시나리오를 집필 중인 <신세계>의 속편 등이 대기 중이다. 참고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9월24일부터 10월6일까지 그의 출연작 15편을 상영하는 ‘이정재 특별전’을 연다. 하지만 청춘의 아이콘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20대의 그와 달리 이정재는 더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20년 동안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다보니 아주 크게 안돼도 다시 열심히 하면 되겠지 싶고, 아주 크게 잘돼도 언젠가는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런 그가 특별전에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작품은 데뷔작 <젊은 남자>다. “긴장도 많이 하고, 야단도 많이 맞았고, 한 장면을 찍는 데 30테이크씩 가기도 했다”는 그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싶다는 이정재의 말을, 방심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결기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마지막 대사, 원래는 없었다

이정재에게 듣는 <관상> 비하인드 스토리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관상>에 대해 묻고, 답했다. 아직까지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스포일러를 주의할 것! <관상> 재편집본의 개봉을 기다리는 관객이라면 이 글에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장면의 실마리를 찾아보시라.

수양대군의 첫 등장

연출자에게도, 나에게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장면이었다. 이미 한 시간 동안 수양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정보들이 나오는데 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수양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다음 한 시간이 힘을 못 받는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연출자의 공으로 완성된 장면이다. 소품이나 의상, 음악이 굉장히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한재림 감독이 나에게 주문한 건 “깡패 같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는데. (웃음) 물론 그 신에서 좀더 과도하게 위협적으로 보여져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면 연기가 좀 촌스러워질 것 같더라. 난 그냥 정말 기분 나쁜 표정만 지었다. 기분이 나쁜데, 그걸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표정이다. 김종서 저 할배가 왜 우리 집에 왔지? 또 무슨 잔소리를 하러 왔을까, 그 장면의 수양은 이런 마음이다. 사실 그 신이 끝나고 김종서와 차 마시며 대화하는 신이 꽤 길었다. 김종서가 “질이 낮은 무사들이랑 어울려다니면 당신까지도 질이 낮아 보일 수 있다”고 하면, 난 “그럼 당신이 북방에서 밥을 나눠먹은 장수들은 오랑캐랑 다를 바가 없다”고 받아치고. 이렇게 말싸움하는 장면이 편집에서 잘려나가서 아쉬웠다.

수양의 단종 독살 시도

시나리오상에선 수양이 단종에게 독침을 쓰려다 실패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만둬버린다는 설정이었다. 이런 식으로까지 내 욕심을 채워야 하나, 그런 자괴감 때문에 분노하다가 창피함을 느끼고 스스로 침을 버리게 되는 거다. 그런데 촬영장에 가니까 바뀌었더라고. (웃음) 한 감독이 “선배님, 여기서 수양대군이 찌르려다가 실패하는 걸로 가시죠”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이 사람아, 이건 내가 봤던 시나리오가 아닌데 왜 바꿔! (웃음)”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편집 과정에서 수양이 갈등하는 장면이 삭제된 경우도 있다. 단종에게 독살을 시도하기 전, 한명회가 와서 “오늘 거사를 치르겠다”고 말하자, 수양이 찜찜한 듯한 표정으로 “정말, 증발한 것마냥 흔적도 없이 처리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본다. 그 대사가 참 잘 쓴 대사다. 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른 사람이 모르게 조카가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들어 있고.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담은 대사였다.

곤룡포를 입은 수양

역술인들 불러다놓고 수양이 “내 상을 한번 봐주게나” 하며 왕 행세를 하는 장면이다. 그 신 자체가 굉장히 길었다. 그 긴 장면을 맨 정신으로 한다는 게 약간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겠더라. 그래서 수양이 술을 좀 많이 마신 것처럼 보이면 어떻겠냐고 감독에게 제안을 했다. 기분이 좀 오른 상태로 촬영했다. 칼을 뽑을 때도 휙, 한번에 뽑지 않고 ‘화아아악’ 망나니처럼 뽑지. (웃음) 물론 진짜로 술을 마신 건 아니다. 어렸을 땐 술 마시고 촬영에 들어간 적도 있는데, 취하면 몸이 처지더라고. 가끔 진짜로 드시고 촬영하는 분들 얘기 들어보면, 대단한 것 같다. 내가 안되니까. (웃음)

광화문 거리에서의 퇴장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 수양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에 대한 예측을 절대 보여주면 안되니까. 그게 이 장면에 임하는 스탭과 연기자들간의 첫 번째 목표였다. 수양이 이렇게 하면 죽는 거고, 저렇게 하면 사는 건데. 이걸 어사무사하게 연기하는 게 관건이었다. 내경의 아들 진형을 죽이기 직전에도 짐작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웃으며 연기했다. 어떻게 보면 수양이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웃음) 원래는 활을 쏘고 아들을 잃은 내경이 울부짖으면 수양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퇴장해버리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퇴장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마지막인데.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일주일 전 한 감독에게 마지막에 그냥 돌아서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고민을 해봤는데,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니 대사 한개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의미가 크지 않아도 되고 멋진 대사도 필요없는데, 한마디만 만들어달라고. 현장에 갔더니 한 감독이 대사를 보여주는데, 너무 상황에 딱 들어맞는 대사더라. 이 영화가 사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저 관상가 양반은 지 아들이 저렇게 절명할 상이란 걸 알고 있었으려나?”라는 대사가 얼마나 이 상황에 적절한가! 어떻게 보면 이후 왕좌에 오래 머물지 못할 수양의 미래를 암시하는 대사 같기도 하고. 수양에게도, 내경에게도, 굉장히 좋은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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