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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들이 사랑을 했네
장영엽 2013-02-14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빌려 현대인의 초상을 위트있게 묘사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미친’ 남녀가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다. 지난해 말 북미 개봉한 제니퍼 로렌스,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로맨틱코미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대한 해외 평단의 반응이 심상치않다. 조울증 환자인 남자와 성적 통제력을 잃어버린 여자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라이프 오브 파이> <링컨> 같은 거장의 쟁쟁한 영화들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냐고? 2011년 <파이터>로 크리스천 베일, 멜리사 레오에게 아카데미 남우/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데이비드 O. 러셀이다. 90년대 미국 인디영화의 새로운 재능으로 주목받던 그는 왜 이제야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을까. 2월14일 국내 개봉하는 그의 신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통해 데이비드 O. 러셀표 영화의 매력을 짚어봤다.

“20세기 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고 후대의 미국 영화사가들은 기록할지 모르겠다. 마치 새 밀레니엄에 진입하기 전당대의 예술적 마일리지를 모두 소진해버리려는 양 빛나는 영화들이 스크린을 수놓던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이른바 ‘선댄스 키드’라 불리는 선댄스영화제 출신 신진 감독들의 활약이 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1997)를 생각해보라! 그중에는 데이비드 O. 러셀이라는 낯선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데뷔작 <스팽킹 더몽키>와 기묘한 전쟁영화 <쓰리 킹즈>에서 그가 보여준 독특한 연출 기법과 재기 넘치는 유머는 새로운 재능을 찾는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2000년대를 열어젖히며 <LA타임스>의 평론가 케네스 듀란이 “넥스트 마틴 스코시즈”로, 로저 에버트가 미래의 작가로 데이비드 O. 러셀의 이름을 호명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무도 미래를 짐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국 인디영화의 기수로 함께 출발한 타란티노와 폴 토머스 앤더슨이 <킬빌>이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펀치 드렁크 러브>와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자신의 지평을 넓혀갈 때 데이비드 O. 러셀의 이름은 예상보다 더디게 들려왔다. 그가 2000년대 극장에 내건 유일한 영화 <아이 허트 허커비>는 지나치게 번잡스러운 작품이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A4 용지 한장은 나올 것 같은 산만한 이야기에 실존주의와 양자물리학, 도가사상 같은 거대한 테마를 구겨넣으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배우에 관한 고약한 소문이 러셀을 따라다녔다. <쓰리 킹즈>의 현장에서 스탭들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조지 클루니가 주먹을 날렸고, <아이 허트 허커비>의 배우 릴리 톰린이 러셀의 태도를 참지 못해 물병을 집어던지고 현장을 떠났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며 데이비드 O. 러셀은 작품보다 가십으로 유명한 감독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렇게 전도유망했던 한 감독이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잊혀져가던 무렵, 2010년대가 열렸고 <파이터>가 등장했다. 전설의 복싱 챔피언이기 이전에 한 징글징글한 대가족의 가장이었던 미키 워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크리스천 베일, 멜리사 레오에게 오스카 남우/여우조연상을 안기며 2011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인디영화계의 달링”(콜리더)이 돌아온 걸까? 미국 언론이 조심스럽게 데이비드 O. 러셀의 복귀를 점치던 그때 제니퍼 로렌스와 브래들리 쿠퍼를 앞세운 러셀의 로맨틱코미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지난해 말 북미 개봉했다.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야박한 오스카 회원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은 이 영화는 아카데미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데이비드 O. 러셀 감독 인생의 ‘제2막’을 알렸다. <파이터>가 러셀의 이름을 다시금 주목하게 했다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는 영화다. 이제는 누구도 러셀의 재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거 아세요? 제 인생의 먹구름을 다 걷어내고 햇살이 비추게 할 거예요.” 언젠가 데이비드 O. 러셀이 중얼거렸을지도 모를법한 말을 한 남자가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팻(브래들리 쿠퍼). 조울증 때문에 8개월 만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정말로 잘 살아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같은 학교 교사와 바람난 아내 니키는 집을 떠난 지 오래다. 팻은 뒤늦게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고 재결합을 꿈꾸지만 니키는 정신이 불안정한 팻이 폭력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접근금지 신청을 한 상태다. 게다가 모두의 우려대로, 팻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울 때 틀어놓았던 결혼식 노래가 귓가를 맴돌고, 그럴 때마다 팻은 이성을 잃고 난폭해진다. 그런 그 앞에 티파니(제니퍼 로렌스)가 나타난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상실감에 다니던 회사의 모든 남자들과 자고 ‘이 동네 미친 여자’로 불리던 그녀는 언니 베로니카의 집에서 만난 팻의 주위를 자꾸만 맴돈다.

신경쇠약 직전의 도시

세상이 미친놈, 미친년이라 부르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거칠게 요약하면 그런 이야기다. 이 영화의 일차원적인 즐거움은 수많은 로맨틱코미디영화들이 관객과의 밀고 당기기 기법으로 즐겨 사용하는 등장인물의 감춰진 과거사를 시작부터 만천하에 드러내는 데에서 온다. 감정을 여과하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팻과 티파니의 만남은 시작부터가 남다르다. 팻은 티파니를 만나자마자 “토미(티파니의 남편)가 어떻게 죽었죠?”라고 물어 그녀와 베로니카 부부를 당황하게 하고, 티파니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는 팻에게 “내가 싫어하는 풋볼 유니폼은 거슬리지만 불 끄고 하면 상관없어요”라며 원나이트를 제안한다. 머리보다 말이 앞서는 관계는 종종 과격하게 흐르기도 한다. ‘사이코’, ‘걸레’ 같은 육두문자를 서로에게 남발하는 팻과 티파니는 상대방의 매력보다 단점을 먼저 알고 있다. 이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막말’의 향연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개성을 살린다.

게다가 ‘미친’ 사람들은 그 둘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광기를 안고 있다. 팻의 친구 로니는 회사 업무와 아내의 닦달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고, 로니의 아내이자 티파니의 언니 베로니카는 이상적인 ‘스위트 홈’을 만드는 데 전적으로 집착한다. 그들 중 가장 혀를 내두르게 하는 사람은 팻의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다. 스포츠 도박에 미쳐 전재산을 풋볼 내기에 건 그는 일종의 ‘징크스’에 사로잡혀 있다. 탁자 위의 리모컨 각도를 맞추고, 늘 같은 손수건을 손에 쥐고, 아들 팻이 함께 경기를 봐야 응원하는 풋볼팀 필라델피아 이글스가 이긴다고 굳게 믿는 그는 아들이 경기날 집을 나서려고 할 때마다 눈물로 막아서는 괴짜 아버지다(이 역을 소화해내는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가히 명불허전이다). 그런 그의 행동이 팻과 티파니의 광기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며 누가 가장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인지 가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은퇴하고 사업 자금을 마련하려는 아버지와 집과 회사에서 시달리는 가장,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해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이 영화의 인물들은 경제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21세기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집 사람들”(데이비드 O. 러셀)의 초상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광기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남 탓만 하려 든다. 이 아이러니한 풍경이 시니컬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데이비드 O. 러셀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따스한 기운이 맴도는 영화다. 가장 큰 변화는 그가 가족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엿보인다. 러셀의 데뷔작 <스팽킹 더 몽키>의 어머니는 아들의 속도 모르고 짜증만 내는 어른이었고, <디제스터>의 부모는 마약을 제조하다 감옥에 가게 되자 친아들을 입양보내는 사람들이었다. 아들을 쉴새없이 쪼아대는 엄마와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집에 눌러앉아 있던 일곱 누나들로 바글바글했던 <파이터>의 가족은 어떤가? 이처럼 러셀의 영화들은 주인공의 결함을 제공하는 원인으로서 괴물 같은 가족을 선보여왔다. 그러나 로버트 드 니로, 재키 위버가 분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속 팻의 가족들은 다르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아들을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그 말을 증명하듯 아들이 새벽 세시에 갑자기 부모를 깨워 뜬금없이 결혼식 녹화 테이프를 찾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팻의 부모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감싼다. 물리적, 정신적인 먹구름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 내리쬐는 한 줄기 빛(실버라이닝)은 어쩌면 가족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외피를 둘렀지만 알고 보면 가족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복싱 영웅 미키 워드의 실화를 영화화한 <파이터>가 스포츠 경기보다 미키와 가족간의 갈등을 공들여 묘사했던 것처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정신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 가족에게서 어떻게 치유의 힘을 얻는지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미국의 독립영화전문지 <인디와이어>가 이 작품을 두고 “<파이터>의 형제 영화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인디 감독 러셀의 상업적 감수성이 만개하다

한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배우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의 매력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영화다. 전작 <파이터>에서 해맑은 이미지의 에이미 애덤스를 세상 풍파에 찌든 술집 웨이트리스로 캐스팅해 이미지 변신을 성공적으로 이끈 바 있는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번 영화에서도 ‘당신이 아는 배우는 거기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려 하는 듯하다. 특히 <행오버>의 헐렁한 남자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발렌타인 데이> 같은 로맨틱 앙상블영화의 조연 이미지로 각인돼왔던 브래들리 쿠퍼의 신경증적인 남자 연기는 놀랍다. “사적으로 만난 브래들리는 예민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웨딩 크래셔>(2005)를 촬영할 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느끼는 두려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건 날것의 느낌이었다.” 러셀의 말처럼 브래들리 쿠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하루에도 몇번씩 감정의 양 극단을 오르내리는 조울증 환자 팻을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해외 유수 언론이 “브래들리 쿠퍼의 필모그래피 역사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며 그를 치켜세우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연기의 날을 한층 예리하게 벼리는 것이 이 영화에 임하는 브래들리 쿠퍼의 과제였다면, <윈터스 본>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제니퍼 로렌스의 임무는 그녀 특유의 강인함을 감추는 데 있었을 것이다. 물에 젖은 길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모습으로 불행을 등에 짊어진 미망인을 연기하는 로렌스의 연기는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티파니 역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손꼽히는 그녀의 나이가 고작 22살이라는 게 놀랍다.

“타란티노는 은퇴를 말하지만, 나는 이제야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얼마 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개봉에 따른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동시대 인디영화의 젊은 피로 주목받았던 두 감독 중 한명은 “나이 든 감독이 되고 싶지 않다”며 예술적 조로를 우려하고, 또 다른 한명은 연륜을 무기로 영화인생 제2막을 꿈꾼다는 점이 흥미롭다. 분명한 건 소시민적이고 결함 많은 캐릭터와 진득한 가족형 드라마, 정곡을 찌르는 적나라한 대사로 주목받았던 인디영화 감독 러셀의 상업적 감수성이 지금 막 개화하고 있다는 거다.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빌려 정신적으로 병약한 현대 미국인들의 초상을 위트있게 묘사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그 좋은 예가 될 거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10년 전 케네스 듀란이 던졌던 질문을 다시던져봐도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데이비드 O. 러셀은 다음 시대의 마틴 스코시즈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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