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하나 하나의 힘이 소환한 광주의 기억
이주현 2012-12-06

크라우드펀딩 통해 제작된 <26년>이 개봉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소원 푸셨겠어요.” <26년>의 개봉을 앞둔 영화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에게 말을 건네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원을 풀었다기보다 다행스러운 거죠. 영화를 못 만들게 한 자들이 존재했잖아요. 그건 살아가면서 내가 유일하게 저항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거예요. 내가 전두환의 추징금을 걷는 법을 나서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화인으로서, 영화를 못 만들게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건 못 참죠. 거기에 꺾이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결국엔 그 역할을 해냈으니 다행인 겁니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26년>이 드디어 개봉한다. 영화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에 비극을 초래한 ‘그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 모인 다섯 인물의 복수극이다. 2008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 같았던 영화는 그러나 “느껴지지만 보이지는 않는 바람과도 같은 존재”에 의해 제작이 무산된다. 이후로도 최용배 대표는 <26년>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그리고 드문드문 ‘<26년> 제작 난항’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영화를 개봉하겠다던 최용배 대표의 선언은 다행히 빈말이 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용배 대표를 만나 <26년> 제작 뒷얘기를 들었다. 최용배 대표는 “녹음기 끄면 진짜 재밌는 얘기를 해드릴 수 있는데…”, “이건 오프더레코드로 하고…”라는 말을 쉴새없이 덧붙였다. 그러니 미리 일러둬야 할 것 같다. <26년> 제작진이 실제 겪은 어려움은 지면으로 옮긴 제작기보다 몇배는 더 눈물겹다는 것을. 제작기와 함께 조근현 감독 인터뷰, 1호 투자자인 가수 이승환과 스탭들의 이야기, ‘<26년> 서울광장 콘서트’의 분위기도 같이 전한다.

감독의 기준

“<26년>의 연출을 조근현 미술감독에게 맡긴다고 했을 때 대놓고 쑥덕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감독을 판단한단 말인가. 영화감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영화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26년>의 키를 조근현 감독의 손에 쥐어주었을 때 대다수의 영화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갸웃거렸다. <26년> 연출을 맡기 전까지 조근현 감독은 <후궁: 제왕의 첩> <마이웨이> <음란서생> <장화, 홍련> 등의 미술을 맡은 실력있는 미술감독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연출 경험이 전무한 그가 과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 게다가 그가 감독으로 내정된 게 올해 3월 말, 4월 초의 일이다. 아직은 <26년>의 밝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였고, 최용배 대표의 말을 빌리면 “원작과 영화사만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청어람이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의 판권을 사들인 건 2006년이다. 순조로워 보였던 <26년>의 영화화는 그러나 2008년 촬영을 열흘 앞두고 엎어진다. 당시 <29년>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영화는 이해영 감독의 손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메인투자사 한곳이 갑자기 투자를 철회했고, 뒤이어 기관투자사 한곳이 더 발을 빼면서 영화 <26년>은 무산되는 듯 보였다. 감독, 배우, 스탭들도 뿔뿔이 각자의 길을 갔다. 최용배 대표만이 <26년>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초 권칠인 감독이 잠시 <26년>의 연출자로 참여했다. 이해영 감독이 연출하기로 했던 때부터 <26년>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한 조근현 감독은 권칠인 감독 때도 다시 미술감독으로 영화에 합류한다. 그러나 결국 권칠인 감독도 <26년>에서 하차한다. 그즈음 최용배 대표는 “조근현 감독이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프로덕션 회의를 하면서 조근현 감독과 의견이 잘 맞았다. 투자는 계속 난항을 겪고 있었고, 시나리오는 예산을 줄이는 쪽으로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근현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좀 달라고 했다.” 조근현 감독은 프로덕션 회의 때 나온 아이디어를 반영해 이해영 감독이 쓴 <26년> 각본을 손본다. “(이야기는) 똑같은데 제작비가 확 줄어 있는 시나리오”를 받아본 최용배 대표는 조근현 감독에게 영화 연출에 대한 의중을 슬쩍 물어본다. 조근현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에게 진짜 연출을 맡겨도 되겠냐고 최용배 대표에게 물었다. 확신이 있으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나를 못 믿겠지만 대표님의 안목을 믿겠다’고 했다.” 공간 연출에 대한 아이디어가 좋고,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26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조근현 감독을 최용배 대표는 믿어보기로 했다.

배우 찾아 삼만리

“주연급 배우들은 다 만났다. 전부 트라이(시도)했다. 그 나이대 알 만한 남자배우들은 전부 만났다고 보면 된다.” 알려졌다시피 배우 진구와 한혜진이 연기하는 진배와 미진 캐릭터는 애초 류승범과 김아중이 연기하려 했다. 그러다 제작이 무산되면서 배우들도 자연스레 하차했다. 다시 주연배우들을 물색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주연급들은 CJ가 투자하는지, 롯데가 투자하는지, 쇼박스가 투자하는지 물어보더라. 자신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영화 제작이 계획대로 이행될 것인가를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배우들이 많다. 그런데 <26년>은 그런 영화가 아니지 않나.” 앞날이 불투명한 영화에 선뜻 베팅할 배우가 많지 않았으리란 건 쉽게 짐작 가능하다. 이미 다른 배우가 연기하기로 했던 역할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다른 배우와 비교대상이 된다는 것, 자신이 첫 번째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톱’배우의 자존심과도 관련되는 문제였다. 이외에도 배우들이 <26년>을 고사한 이유는 많다. “영화가 너무 직접적이고 날것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는 배우, 웹툰도 좋아했고 역할도 마음에 드는데 소속사가 말린다는 배우, 정말 출연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결사반대한다는 배우, 상대배우가 누구냐로 줄다리기하는 배우 등 정말 다양했다.” 최종적으로 진배 역은 2008년 제작 당시 주안 역을 맡기로 했던 진구에게 돌아갔다. 미진 역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로 한창 주목받고 있었지만 영화 경력이 많지 않던 한혜진에게 맡겨졌다. 배우의 가능성을 믿은 것이다. 그렇게 캐스팅이 완료된 시점이 올해 6월 초였다. 그리고 영화는 한달 뒤인 7월19일 크랭크인한다. 준비기간이 짧았던 만큼 배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을 발휘해 배역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80년 5월을 어떻게 재현할까

강풀 작가는 웹툰을 연재하면서 “<26년>의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건 이 만화를 보는 이들이 최소한 80년 5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26년>은 액션복수극이라는 장르를 내세운 상업영화이지만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따른다. 영화도 웹툰만큼이나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니 ‘그날’을 어떻게 임팩트있게 영화로 재현하느냐는 최용배 대표에게도, 조근현 감독에게도 중요한 과제였다. 게다가 웹툰은 주인공들의 아픈 과거사를 꽤 비중있게 그린다. 이해영 감독이 웹툰을 바탕으로 완성한 시나리오에서 80년 5월의 광주를 “사실적이고 압축적으로” 묘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용배 대표는 “그 부분에선 이해영 감독의 각본에 충실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의와 제작 환경을 고려해야만 했다. 5.18을 모른 채 자란 젊은 친구들에게 그날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웹툰과 영화의 의도이기에 표현의 수위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영화 <26년>에서 80년 5월의 광주는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 애니메이션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이 만들었다. 오성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26년>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왜 그에게 맞춤 작업일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세상에 내놓기 전, 오성윤 감독은 제주 4.3사건에 관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에 삽입된 애니메이션도 그의 작품이며,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홍보 CF도 그의 작품이다. 최용배 대표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힘있는 애니메이션에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생긴 일

<26년>에는 진배와 미진이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가 각자의 부모에게 인사드리는 장면이 있다. <26년>의 테마곡인 <>의 뮤직비디오에도 삽입된 장면이다. 별것 아닌 장면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두 사람이 밤중에 5.18묘역을 찾아가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미진이 단독으로 거사를 도모한 뒤 잠시 광주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상황이라, 낮신이 아니라 밤신으로 그려지는 게 타당했다.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소엔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촬영 허가를 받았다. 관리소에서 5.18유족회의 촬영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유족회의 동의도 받았다. 그런데 촬영 당일, 밤촬영은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관리 규정에 ‘야간에는 경건함을 해치는 행위들이 이루어지면 안된다, 추모 음악회는 예외로 한다’는 조항이 있다며 촬영을 막더라. 여기 모셔져 있는 유족들의 자식들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무슨 경건함을 해치는 일이냐고 따졌다. 그런데 그건 관리소장의 권한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더라. 국립5.18민주묘지를 관할하는 국가보훈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면서. 광주지역 국회의원실에 민원도 넣고 유족회에도 연락했는데 해결을 못해주더라.” 결국 밤신은 낮신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다. 며칠 뒤엔 대전에서 도로를 통제하며 촬영해야 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것 역시 관할서의 협조가 필요했고, “괜히 문제 일으켰다가 다음 촬영에도 지장을 줄까봐” 절충을 하게 됐다. ‘그 사람’이 출소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그랬다. 광주교도소에서 촬영을 하려 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았다. “결국 오전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을 허락받아 겨우 촬영을 진행했다. 그런데 절대로 자막에 장소협조 이름을 올리지 말라더라.” ‘광주의 자식들’ 이야기를 광주에서도 편히 찍을 수 없었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굿펀딩과 제작두레

“이 영화가 만들어지길 원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개인들이 있었다. 결국 그 개인들이 이겼다. <26년>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개인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 최용배 대표가 말한 개인들이란 <26년>의 영화화를 소망한 모든 사람들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35명의 개인투자자와 제작두레 1만5천명의 회원들을 지칭한다. <26년>은 제작두레를 통해 순제작비 46억원 가운데 7억원을 모았다. 최용배 대표는 “<26년>을 만들면서 매 순간이 고비였다”고 했는데, 투자자를 찾는 일이야말로 <26년>의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기관투자자가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청어람은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펀딩 방식을 통해 제작비의 일부를 마련하기로 한다. 올해 3월26일 시작된 <26년>의 크라우드펀딩은 그러나 기간을 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금액을 채우지 못해 무산됐다. “크라우드펀딩은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이다. 10억원 모금이 목표였는데 3억8천만원으로 끝났다. 또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희망은 있었다.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나 가수 이승환이 <26년>에 투자할 뜻을 내비쳤다. 또 “<괴물2>에 투자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린 <괴물2>가 중요한 게 아니라 <26년>이 중요하다. <괴물2>에 투자하려면 일단 <26년>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해 붙잡”기도 했다. 크라우드펀딩 참여자들도 ‘돈을 돌려받기 싫다, 모금액을 제작비에 보태 써라, 펀딩을 취소해야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하라’ 등의 반응을 보였다. 거기서 힘을 얻어 청어람은 6월25일부터 4개월간 <26년>의 제작두레를 진행한다. 그리고 그즈음 1천만원씩 투자하는 개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6년>은 온전히 영화화를 바란 개인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최용배 대표는 “<26년>의 제작방식이 일반적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26년>을 계기로 “동료 영화인이나 후배 영화인들이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