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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랑한 스파이-1
주성철 장영엽 2012-02-14

첩보스릴러영화의 걸작을 통해 새로 쓰는 스파이물의 계보학

우리가 평범한 컨벤션처럼 받아들이는 첩보스릴러의 양식들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맞물려 늘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그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뽐낸 수많은 스파이들의 계보다. 프리츠 랑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마타 하리부터 제이슨 본에 이르기까지 스파이영화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모아봤다.

스파이 Spione (1928) / 프리츠 랑

프리츠 랑이 <메트로폴리스>(1927)의 흥행 참패 이후 우파(UFA)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원본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체코 프라하의 영화기록보관소에서 카피본이 발견돼 여러 개의 필름을 합쳐 2003년 복원됐다. 무역부 장관이 암살당하고 중요 문서들이 사라진다. 게다가 내막을 아는 인물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저격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첩보부의 체면을 회복할 때”라는 편지를 첩보부에 보낸다. 이 모든 것은 겉으로는 건실한 은행가로 위장한 ‘하기’의 음모였으며 그는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다.

독특한 시각효과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 그리고 당시로선 무척 기발했을 스파이영화의 여러 첩보 기법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러시아 여자 첩보원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 등 프리츠 랑은 일찌감치 ‘첩보 로맨스’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일본과의 밀실 동맹을 둘러싼 첩보전이나 은행가가 악의 축으로 묘사되는 방식은 거의 예언적이기까지 하다. 하반신 장애로 위장했던 하기가 결국 자살에 이르는 라스트는 압권.

마타 하리 Mata Hari (1931) / 조지 피츠모리스

‘여성 스파이=미녀’라는 공식은 그녀로부터 비롯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상류층 인사들과 온갖 염문을 뿌리다가 스파이 혐의를 받고 총살당한 비운의 네덜란드 무희, 마타 하리다. 그녀의 천사 같은 외모와 관능적인 춤 실력, 극적인 로맨스와 죽음은 수많은 감독과 여배우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레타 가르보가 마타 하리로 분한 1931년작부터 프랑수아 트뤼포가 각본을 쓰고 잔 모로가 주연을 맡은 <마타 하리, 에이전트 H21>(1964), 실비아 크리스텔의 관능적인 매력이 돋보였던 1985년의 <마타 하리>, 네덜란드의 TV시리즈(1981)까지, 마타 하리의 인생 스토리는 끊임없이 세계의 스크린과 브라운관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중에서도 ‘클래식’으로 부를 만한 <마타 하리>는 단연 그레타 가르보의 차지다.

조지 피츠모리스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마타 하리의 첩보 활동보다는 러시아 군인 로자노프와의 로맨스에 집중한다. 여자 스파이의 일생에 사랑은 없다고 믿던 시니컬한 마타 하리는 로자노프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하자 모든 활동을 접고 그의 곁을 지킨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었을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남자들의 구애를 물리치는,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에겐 중저음의 목소리로 순정을 고백하는 그레타 가르보의 매력이 대단하다.

39계단 39 Steps (1935) / 앨프리드 히치콕

누명을 쓴 채 쫓기는 남자, 예측 불가능한 여정,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미모의 여인. 오늘날 스파이영화의 클리셰로 자리잡은 이 영화적 장치들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벌즈 암살’신으로 유명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부터 스파이물을 가장한 멜로 <오명>, 스파이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냉전시대 제작된 <찢어진 커튼> <토파즈> 등 히치콕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첩보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한 감독이다. <39계단>은 히치콕의 영국 시절 대표작이자, 연출자로서 히치콕의 개성이 확립되기 시작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젊은 캐나다인 리처드 해니는 런던의 한 클럽에서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다. 그의 집까지 쫓아온 여자는 국가 기밀 문서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살해된다. 살인 누명을 쓴 리처드는 여자가 남긴 지도를 단서 삼아 ‘39계단’이라는 암호의 실체에 다가선다.

끊임없이 도약하는 이야기,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유도하는 유머감각이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39계단>은 동명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파이영화의 모범적인 각색을 보여주는 영화다. 히치콕은 존 버컨의 원작 소설에서 모험이라는 테마와 빠른 전개는 차용하되 주요 조연 캐릭터와 ‘39계단’의 의미 등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대목은 과감하게 바꿨다. 리처드가 쫓기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정치인 선거 유세를 하는 장면과 ‘39계단’의 정체가 밝혀지는 클라이맥스신 등 이 영화의 명장면은 대부분 히치콕의 각색에서 비롯된다.

콰이어트 아메리칸 The Quiet American (1958) / 조셉 맨케비츠

1952년 베트남 사이공을 배경으로 영국인 기자 토마스 파울러(마이클 레드그레이브)와 ‘조용한 미국인’ 알덴 파일(오디 머피)이 푸엉(조지아 몰)이라는 베트남 여성을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를 그린 <콰이어트 아메리칸> 역시 조셉 맨케비츠와 필립 노이스에 의해 두번 영화화됐다.

미국인 캐릭터는 아마도 남부 베트남 정권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작을 펼쳤던 CIA의 에드워드 G. 랜스데일이 모델일 것이다. 베트남 군부 세력에 무기를 공급하여 프랑스와 북베트남의 호찌민 세력을 동시에 견제하고, 또한 시내에서 테러 자작극을 벌이는 그런 공작의 과정은 파일이 푸엉을 가로채는 일과 같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조셉 맨케비츠가 ‘반미’ 작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그린의 원작을 영화화하며 미국인 캐릭터를 선하게 묘사해 원작의 혜안과 품격을 갉아먹었다는 점. 그래서 마이클 케인이 파울러를 연기한 필립 노이스의 2008년작을 권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그런 맨케비츠의 작품을 젊은 날의 고다르가 상찬하며 1958년 <카이에 뒤 시네마>가 뽑은 베스트9위였다는 사실.

007 살인번호 007 Dr. No (1962) / 테렌스 영

제임스 본드는 스파이영화 역사의 최고 인기 캐릭터다. 1960년 이온 프로덕션을 설립한 해리 샐츠먼과 커비 브로콜리는 스파이의 활약상을 다룬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기로 한다. 이언 플레밍의 첫 007 작품은 <카지노 로얄>이지만 그가 이를 너무 아낀 나머지 계약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결국 1958년 발표된 <살인번호>가 1편이 됐다. 영국 비밀정보국 MI6의 제임스 본드(숀 코너리)가 미국의 미사일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사악한 닥터 노(조셉 와이즈먼)가 사는 자메이카 인근 은밀한 섬에서 펼치는 활약상을 그린다.

당시 미국은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지구 궤도를 성공적으로 돌면서 소련과의 우주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고,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더욱 심화돼 핵전쟁 발발 위협에 놓이기도 했다. 이처럼 <살인번호>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했던 쿠바 이야기를 소재로 취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 닥터 노는 새똥에 묻혀 죽지만 영화에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끓는 물에 빠져 최후를 맞이한다. 더불어 여자와 도박을 좋아하고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들어 마시며 늘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007의 컨벤션 역시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 (1962)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62년, 베니스영화제는 러시아의 한 신예 감독이 창조해낸 열두살짜리 소년 스파이영화에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첫 장편영화인 <이반의 어린 시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가족을 잃고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는, 러시아 군대의 소년 척후병 이반의 유년기를 다룬다. 최전방 지대의 늪지대를 기어다니며 독일군을 정탐하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군사학교에 가느니 차라리 빨치산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아역배우 니콜라이 버리아예프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한편 <이반의 어린 시절>은 영화 역사상 가장 사색적이고 몽환적인 스파이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검고 축축한 늪, 미로 같은 자작나무 숲의 정적인 이미지와 전쟁터의 막사로부터 까마득히 높은 우물로 수직상승하는 촬영기법 등에서 ‘러시아의 영상 시인’으로 불렸던 타르코프스키의 인장을 확인할 수 있다.

입크리스 파일 The Ipcress File (1965) / 시드니 J. 퓨리

<입크리스 파일>의 주인공 해리 파머(마이클 케인)는 안경잡이다. 요즘이야 뿔테 안경을 쓴 남자에게 섹시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이 영화가 1965년에 제작된 영국산 스파이영화라는 점을 떠올리면 사정이 다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파이는, 당연히도 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였다. 늘 말끔한 슈트 차림에 매너 좋기로 소문난 MI6 소속 스파이와 안경잡이에 무뚝뚝한 영국 스파이 중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일까? 그런데 <입크리스 파일>을 보고 나면 그 대답이 쉽지 않다.

영국 내무성에서 첩보 업무를 맡은 해리 파머가 유명 과학자를 납치한 일당들을 쫓는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걸핏하면 악당들을 놓치고, 정보원은 죽어가고, 악당들에게 감금돼 실험 대상이 되는 등 <입크리스 파일>의 해리 파머는 허점 많은 스파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에게 마음이 간다. 본드가 살인 기계 같다면 해리는 실수할 줄 아는 진짜 인간 첩보원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요리’하는 스파이다. 파를 썰고 계란을 풀어 여자 동료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해리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한층 더 부각한다.

‘해리 파머’ 시리즈는 총 다섯편이 제작되었다. <입크리스 파일>부터 <베를린 스파이> <빌리언달러 브레인>으로 이어지는 세편의 극장용 영화와 <베이징 익스프레스> <미드나잇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TV영화다. 영화 007 시리즈의 프로듀서 중 한명인 해리 살츠먼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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