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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허무는 이방인, 리안

<이안 감독의 영화세계>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 지음, 유정란 옮김 / 위즈덤피플 펴냄

영화 포스터 등 도판 수록 지수 ★★ 한 분야 깊이 파기 지수 ★★★ 필자의 준비성과 박식함 지수 ★★★★

“나는 많은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사람이다. (…) 나는 타이완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요즘 독립을 강력히 원하는 타이완 토박이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중국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곳에서는 타이완인이다. 현재 나는 미국에 살고 있고 어디를 가든 이방인 같은 존재다.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 힘든 것이다.” _1993년 리안의 말

리안은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중국 문화권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영국의 고전과 미국 역사, 대중문화를 자신의 영화로 끌어들인 인물이다. 리안 영화가 다루고 있는 쿵후, 제인 오스틴, 남북전쟁, 헐크, 우드스톡 사이의 공통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리안의 영화세계에서는 하나로 묶인다. 정체성과 아이러니, 이것은 리안을 관통하는 단어다. 이 두 단어조차 사실은 아이러니한 정체성이라고 묶을 수 있다. 타이완 스신대학교 영문학부에 재직 중인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의 <이안 감독의 영화세계>는 복잡해 보이는 리안의 영화 세계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상당히 명료하게 짚어내고 있다. 이 책은 리안의 생애와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설명한 1장과 개별 작품론에 해당하는 2, 3,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을 먼저 읽고 나머지는 순서에 상관없이 한편씩 봐도 무방하다. 총 11편의 리안 작품 목록 중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9편의 작품론이 수록되었다. 많은 정보가 들어 있지만 글 자체는 무겁지 않아 잘 읽힌다.

1954년 타이완에서 태어난 리안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본토에서 이주해와 고교 교장으로 재직한 아버지 리성은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대입시험에 두번이나 낙방할 정도로 성적이 형편없었던 리안은 1973년 3년제 직업학교인 타이완예술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고교 시절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친먼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예술학교에 입학한 리안은 해방감을 느꼈지만 리성은 아들의 진로를 수치로 여겨 지인들의 질문을 회피할 정도였다. 이런 개인사는 ‘아버지께서 제일 잘 아신다’라는 주제의 초기 3부작 <쿵후선생>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고 이후 영화에서도 ‘아버지’는 늘 화두가 된다. 가족의 지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 리안은 뉴욕대학교에서 만든 졸업 작품으로 크게 주목을 받는다. 귀국을 미루고 미국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나 6년간 백수 생활을 하게 된다. 37살에 드디어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아웃사이더’로서 그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리안의 서툰 영어는 백수 생활을 연장하는데 일조했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독 지망생에게 제작자들은 신뢰를 보내지 않았고 리안은 매번 고배를 마시며 돈을 벌어오는 아내 대신 요리를 하고 아이를 돌보며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귀속될 수 없는 그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정체성의 혼란을 잘 다루는 감독이 되는 밑거름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경계를 넘나들지만 자신이 밟고 있는 경계선을 인지한 사람만이 경계를 인식한다. 리안은 다양한 경계를 가로지른 인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의 영화적 재능은 이를 영화로 형상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안 감독의 영화세계>는 리안의 영화를 초국적 성격을 지닌 중국인 디아스포라 영화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저자는 리안의 영화를 타이완 뉴시네마라는 거시적인 흐름 안에서 읽어내려 노력한다.

초기 3부작을 근거로 차이밍량과 더불어 1980년 이후 타이완 뉴시네마의 ‘제2차 웨이브’를 이끈 일원으로 평가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을 비롯한 이들 감독들의 영화 스타일과 리안의 영화가 어떤 연계성을 갖는지 밝힌다. 초국적 중국영화 전체를 살피다 보니 이 부분의 설명은 다소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면이 있다. 리안 영화 전체를 디아스포라의 개념으로 포괄하려다 보니 무리가 생긴 것 같다.

리안이 중국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어떤 태도를 공유하는 감독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있다. 감정을 숨기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그것이다. 허우샤오시엔과 공유하는 롱숏, 롱테이크의 미학도 이런 태도 안에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매번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도 항상 자기 색을 잃지 않는 기저에 리안이 품고 있는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리안 영화와 관계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안의 오랜 영화 동료 제임스 샤머스에 대한 언급은 당연한 것이고,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색, 계>의 원작자, 제작 스탭처럼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의 경력이나 인터뷰 자료도 꼼꼼히 참고하여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영문학과 중국 영화사에 대한 평론과 논문도 만만치 않게 검토한 흔적이 보인다. 방대한 자료의 인용은 때론 산만한 느낌을 주지만 리안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저력이 느껴진다. 외국인이면서 타이완에 거주하는 저자의 이력은 리안 영화라는 연구주제와 걸맞다.

이것이 중국의 정체성이다

<와호장룡>과 <양산백과 축영태>

<와호장룡>, <양산백과 축영태>(왼쪽부터)

리안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영화와 감독을 언급했는데 페데리코 펠리니, 비토리오 데시카, 오즈 야스지로, 잉마르 베리만 등 익숙한 이름들이 포함된다. 많은 작품 중에서도 <양산백과 축영태>(이한상, 1963)는 그의 영화의 기준점이 되었다. 그가 훗날, 20세기초 왕두루의 5부작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자신의 첫 번째 무협영화 <와호장룡>을 만들 때 이 영화는 교본 같은 역할을 한다.

남장, 정략결혼, 낭만적 사랑은 리안을 오래 사로잡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 축영태가 고등교육을 받고 싶은 마음에 부모를 설득해 남장을 하고 학교에 입학한다. 거기서 양산백과 친구가 된 축영태는 부모가 정해준 약혼자와 양산백 사이에서 갈등한다. 양산백은 축영태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지만 일은 꼬이고 양산백은 비탄에 빠져 죽음에 이른다. 결국 축영태는 정략결혼을 수락하지만 양산백의 무덤 옆을 지날 것을 결혼 조건으로 내세운다. 꽃가마가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축영태는 혼례복을 찢어 안에 입은 장례복을 드러내고 폭풍 속에 갈라진 무덤 속으로 뛰어든다. 영화는 둘의 영혼이 천국의 구름 속으로 날아가는 장면에서 끝난다. <와호장룡>에서 장쯔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낭떠러지로 뛰어내리는 모습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리안은 두 영화의 주제를 자신의 의무감 때문에 사랑을 희생시키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서 찾았고, 이를 굉장히 중국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센스, 센서빌리티> <라이드 위드데블>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이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영화들로 <양산백과 축영태>가리안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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