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바다>

지난 9월10일 폐막한 베니스영화제는 무려 여섯편의 영국영화(장편 기준)를 공식 초청했고 그 가운데 세편을 경쟁부문에서 상영했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국영화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최근 국제적인 주목을 얻기 시작한 신성들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레드 로드>(2006)와 <피쉬 탱크>(2009)로 이미 두 차례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안드레아 아놀드의 세 번째 장편 <폭풍의 언덕>, 미디어 아티스트로 명성을 떨치다 <헝거>(2008)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상하며 성공적으로 영화감독 데뷔한 스티브 매퀸의 두 번째 장편 <수치>, 그리고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호러영화 <렛미인>(2008)의 스웨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존 르카레의 동명 원작을 각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그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보다 더 반가웠던 것은, 일련의 빼어난 단편영화들과 중편 <슬로우 액션>(2010) 등으로 이미 상당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동시대 브리티시 아방가르드의 대표주자 벤 리버스의 장편 데뷔작 <바다에서의 2년>이었는데, 이 작품은 오리종티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여하간 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영국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초청한 것만으로도 올해 베니스영화제의 선택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동시대 영국 영화계 최고의 시네아스트라 할 테렌스 데이비스의 신작 <깊고 푸른 바다>가 베니스의 초청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대신 이 작품은 토론토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되었고 이후 산세바스티안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테렌스 데이비스는 <먼 목소리, 정지된 삶>(1988)으로 데뷔한 이래 23년 동안 불과 여섯편의 작품만을 내놓은 지독한 과작의 영화작가로, 국내에는 켄 로치나 마이크 리에 비해 덜 알려져 있긴 하지만 미학적으로는 당대 어떤 영국영화감독도 필적하지 못할 만큼의 성취에 다다른 인물이다. 그가 <환희의 집>(2000) 이후 (에세이영화 <리버풀의 추억>(2008)을 제외하면) 11년 만에 내놓은 장편 극영화인 <깊고 푸른 바다>는 테렌스 래티건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것으로 이 희곡은 이미 1955년에 비비안 리 주연으로 아나톨 리트박이 영화화했다. 여주인공의 자살로 끝났던 <환희의 집>과 짝을 이루기라도 하듯, <깊고 푸른 바다>는 자살을 기도하나 이웃 사람에게 발견되어 미수에 그치고 마는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되는데, 전체적으론 고전적 삼각관계의 드라마가 숨막히게 아름다운 실내극의 미장센과 꿈결 같은 플래시백의 연쇄를 통해 느리게 재구축되며 펼쳐지는, 1950년대의 어느 날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감독은 원작 희곡의 대사를 상당 부분 삭제한 대신 침묵의 공간을 무심히 가로지르는 카메라로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과 제스처를 담아내는 데 몰두하는데, 형식상의 엄정함이 멜로드라마 서사와 스치며 빚어내는 긴장이 만만치 않다. 이미 몇몇 평자들이 데이비드 린의 <밀회>(1945)와 이 영화의 유사성을 지적했지만, 거기 덧붙여 1950년대의 영국적 삶에 대한 감독 자신의 개인적 추억과 그의 동성애적 취향, 그리고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인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의 플롯과 카메라워크와의 관련도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구식으로 비치는 멜로드라마 서사를 취해 그 서사의 뼈대만을 남겨놓은 다음 철저하게 영화적인 육체를 입혀 지극히 동시대적인 감각의 영화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선 왕가위의 <화양연화>(2000)나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2008)와 궤를 같이하는 영화다. 보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깊고 푸른 바다>는 오늘날엔 아주 드물게만 만날 수 있는 절대적 미(美)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