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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깊은 밤을 날아서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1-09-26

변호사 역의 하정우

“1년을 그 캐릭터로 살았으면 빠져나오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선배 배우 최주봉의 말이 한치 틀리지 않았다. 아내를 찾으러 온 조선족 ‘구남’의 처절한 사투. 1년여를 옌볜과 부산을 오가며 매진한 <황해>는 하정우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영화 끝나고 ‘<황해> 후유증’이 생겼다. 다른 작품 때와 달리 이번엔 좀 심했다. 말 한마디 뱉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굳이 그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당시 만난 하정우는 할 말을 찾지 못해 힘든 기색이 역력했었다. 인터뷰가 불충분하다면 이후에 메일로 보충하고 싶다는 말로 그는 인터뷰를 끝냈다. 지치고 암울한 구남의 영혼이 준 상처는 컸다. 이러다 영영 사회성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불안한 나날이 지속됐다. 하정우를 구한 건 <의뢰인>이었다. “<황해>를 하면서 영화적 깊이와 진지함에 골몰했었다. 빠져나올 구실이 필요했다. <의뢰인>은 장르적 쾌감을 주는 영화더라. 그게 가장 큰 선택의 기준이었다.”

유혈이 낭자한 사건현장에서 시작되지만 <의뢰인>은 사건 자체가 주가 되는 무거운 스릴러가 아니다. 아내를 죽인 죄로 기소된 남자 한철민(장혁), 영화가 좇는 건 이 사건을 둘러싼 검사와 변호사의 흥미로운 법정 대결이다. 하정우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검사 안민호(박희순)에 맞서 사건을 변론하는 변호사 ‘강성희’에 몰입했다. “물론 전형적인 변호사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전형성 안에 무궁무진한 자유공간이 보이더라. 그걸 확장하고 의외성을 찾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일처리에 능숙한 강성희는 하정우에겐 잘 맞는 슈트 같은 캐릭터다. 완벽한 피팅을 찾는 데 골몰한 결과, 디테일 하나하나가 꼼꼼하고 세심한 강성희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그는 강성희라면 꼭 할 법한 말투를, 제스처를 자유자재로 익히고 활용한다. <멋진 하루>의 번죽 좋은 ‘조병운’을 조금 더 날렵하게 다듬은 듯한 남자. 살인사건이라는 제법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를 풀어줄 유일한 숨통이 그였다. 하정우는 원래 대본보다 밝게 강성희를 설정함으로써 관객이 몰입할 여지를 안겨주는 친절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국가대표>를 하고 나름 깨닫고 배운 게 많았다. 영화를 찍으면서 너무 설명적이지 않은가, 과한 친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관객의 호응을 얻은 뒤 영화가 주어야 할 보편적 정서, 관객에게 설명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황해>의 흥행 부진이 이런 결심을 가속화했는지도 모른다. “왜 우린 관객에게 사랑 받지 못했을까.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했다. 자본과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어느 하나 타협하지 않고 했는데도 사랑 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컸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촬영 내내 손영성 감독과 상대배우 박희순과 함께 대본을 연구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지속됐다. 도대체 저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소화했을까 하는 기술적인 문제는 차치해도 좋다. 촬영의 상당 부분이 법정세트에서 진행됐고, 하정우는 연기를 처음 시작하던 시절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을 되살려냈다. “오로지 대사로 긴장의 고저를 표현해야 했다. <킹스 스피치>의 언어치료사와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의 대화를 보면 감정이 가장 격할 때조차 흥분하지 않고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다. 그런 방식의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미 강성희에게서 벗어날 치료책을 두 편이나 마련해두었다. 곧 윤종빈 감독과의 세 번째 작품인 <범죄와의 전쟁>에선 공무원으로, 전계수 감독의 로맨틱멜로 <러브 픽션>에선 연애에 숙맥인 대한민국 보편남을 선보인다. “스코시즈 자서전에서 <택시 드라이버>를 찍는 중간에 로버트 드 니로가 다음 작품인 <1900>의 의상 피팅을 하더란다. 그런데 그 옷을 입는 순간, 드 니로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어 놀랐다고 하더라. <의뢰인>을 찍고 있는데 <범죄와의 전쟁>을 찍고 <러브 픽션>을 하는 것. 생각의 여유를 가진다면 몸 피곤한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다들 날더러 ‘괜찮냐?”고 하는데 내가 그런 말 들을 정도로 피곤한지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심리치료를 받는 것도 모두 그에겐 다음 연기로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요즘의 그를 보면 그가 연기를 위한 삶을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다음 연기를 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2011년 충무로에서 하정우는 지속적으로 연기를 하는 가장 핫한 배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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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메이크업 김태석·스타일리스트 이현하·의상협찬 돌체앤가바나, 발리, 페레가모, ck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