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퀘벡 출신인 당신이 중동지역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해 망설였던 순간은 없었나. =물론, 감독이 자기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 영화를 만드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난 중동 출신도 아니고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가족과 분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친밀함’이라는 주제를 통해서만 <그을린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가족’이니까. 나의 전작 <폴리테크닉>은 20여년 전 내 고향의 대학에서 벌어졌던,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아주 슬프고 끔찍한 살상사건을 다루고 있다. 당시 내가 그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내 고향에서 일어난 사건인데다 너무 끔찍한 비극이라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기가 힘들 거라고들 했다. <그을린 사랑>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 두 경우 모두 나름의 단점과 장점이 있다고 본다.
-<그을린 사랑>은 현재진행형인 전쟁과 가족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신화적인 느낌까지 가미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을린 사랑>은 가족 내에서 분노가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이 증오의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는지에 관한 영화다. 개인이 진화할 수 있고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큰 희망을 준다. 원작자인 와이디 무아와드가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 대해 냉소로 일축하기보다는 좀더 열린 지평을 선택했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제자나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비극들에서 매우 큰 영향을 받았으니까.
-연극 <그을린 사랑>은 대사가 굉장히 풍성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영화적인’(cinematic) 방식으로 각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은. =각색 작업을 할 때 처음에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와 연극은 물론 서로 매우 다른 예술 형식이다. 원작자인 와이디 무아와드는 각색에 있어서 내게 완전한 자유를 줬고, 이 자유는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원작의 모든 연극적 요소들을 버리기 위해 희곡은 아예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이 힘들고 과격한 작업을 위해 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첨가된 인물이나 설정이 있다면. =같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그을린 사랑>과 연극 <그을린 사랑>은 서로 매우 다르다.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물들이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 핵심은 연극의 영토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 영화의 영토로 최대한 깊숙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이 이야기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 영화를 나만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원작자인 와이디 무아와드가 내건 조건이기도 했다. 그는 영화에 대해 내가 온전히 책임지길 원했다. 책임과 자유가 함께 주어졌다는 것이 내겐 정말 멋진 선물이었다.
-<그을린 사랑>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들은 매우 ‘고요하게’ 처리된다. =미장센에 있어서 미니멀리즘을 선호한다. 내가 이제까지 영화에서 본 가장 강력한 장면들은 모두 매우 단순하게 연출되었다. 로이 앤더슨의 단편 <무언가 도착했다>(1987)가 폭력에 접근하는 방식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나치 군인들이 유대인 포로를 차가운 수영장 물에 집어넣어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실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가장 공포스런 장면 중 하나였다. 영화를 보면서 극장에서 토할 뻔한 적은 그때가 유일했다. 이 장면은 극도로 고요하게 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권태가 담겨 있어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나의 목표는 야만성의 추악함을 과시적이고 요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프닝신부터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사용된다. =시나리오를 처음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라디오헤드의 노래들을 염두에 뒀다. 오프닝 시퀀스에 사용할 우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음악을 찾던 중 곧바로 <You and Whose Army?>가 떠올랐다. 다른 곡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고전음악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디오헤드의 이 곡에는 다른 어떤 음악에서도 찾기 힘든 낯설고 소외된 풍경의 느낌이 있다. 내게 멜랑콜리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내 인성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멜랑콜리는 물론 즉각적으로 위안을 필요로 한다. <그을린 사랑>의 주된 정서적 목표는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