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은 2년 전 <씨네21>과 인터뷰하면서 “이젠 배우하겠다”고 했다. 정치와 연기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연기를 택하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려는 듯 보였다.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 외에도 <실종> <작은연못> <여행자> <시선 1318> 등에 잇따라 출연했다. 작은 역할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사이 드라마 <자명고>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연극 <B언소>의 무대에도 섰다. <옥희의 영화>에서 송 교수는 뭣같은 세상 우린 책이나 읽읍시다, 라고 말한다. 송 교수처럼 문성근도 ‘세상 거꾸로 가는데 우린 연기나 합시다’라고 자꾸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성근은 ‘액터’이자 동시에 ‘액티비스트였다’였다. <옥희의 영화>의 근사한 연기를 캐물어야겠다고 맘먹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는 다시 사람들이 주목하는 ‘민란 주동자’로 섰다. 액터만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문성근을 만났다.
-지난해엔 매니저가 있었는데. 혼자 다닌 지 오래됐나. =<자명고> 끝나고 보냈다. 앞으로 나는 장기실업자니까. 일 봐주던 회사와도 해지했고. 있어봤자 비용만 들고.
-타고 온 차가 굉장히 지저분하다. =상대적으로 오늘은 나은 편이다. 얼마 전 손세차도 했는데, 뭘.
-내일 베니스로 떠난다고 들었다. 해외영화제 구경한 지 얼마 만인가.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로 로카르노, 뉴욕 가본 뒤 처음이다. 박광수 다음으로는 이창동이 영화제는 많이 다녔을 텐데 <초록물고기> 뒤로는 날 안 썼으니까.
-영화제 가서 뭐할 건가. =그냥 쉬는 거지. 홍상수가 술을 퍼먹일 테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볼까, 읽다 만 <김대중 자서전>을 읽을까 생각 중이다. <김대중 자서전>은 이틀 안에 독파하려다 머리가 아파서 중단했다. 1967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회의원 출마할 때 연설문이 실려 있는데 소름 돋을 정도다. 1971년 대선 연설도 기가 막히지.
-연설하면 빠지지 않는데. =김 대통령 퇴임 직후 동교동으로 어머니와 같이 찾아뵌 적 있다. 시민을 위해 거리에 나와서 짧게 인사말 하시는데 경탄스러웠다. 짧은 문장인데 또박또박 떨어진다. 탁, 탁, 탁, 탁! 40년 정치의 노하우지. 머리가 좋으신데다 사색도 쉬지 않았으니.
-40년 배우하면 연기가 탁탁탁탁 나올 것 같나. =연기는 자질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쌓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옥희의 영화>는 트리트먼트도 못 받고 출연했다고 들었다. =전화해서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볼 참이라면서 2, 3일쯤 와줄 수 있냐고 했다. 영화과 교수라고 해서 의상만 물어봤지. 정장을 가져갈까 아님 콤비로 가져갈까 아니면 청바지류로 하리. 찍고 왔는데 얼마 뒤에 또 연락이 왔다. 더 찍어야 한다면서. 찍었던 인물과 다른 인물이라고 해서 안경을 벗었지. 편집을 했는데 짧아서 그러나. 빈자리가 보여서 더 찍는 건가 그랬다. 그리고 세 번째 전화가 왔다. 전날 밤에 여러 차례 전화한 모양인데 술을 무지하게 마셔서 못 받았고 아침에 걸었더니 촬영 나오라는 거야. 술 마셔서 얼굴 부었다고 했는데도 오라고 해서 갔더니 내 입장에서 진행되는 에피소드(<폭설 후>)가 있더라고.
-<폭설 후>에서 이선균, 정유미와 문답을 나누는 장면은 다른 장면보다 더 즉흥적인 느낌이었다. 대사가 따로 있었나. =아침에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로 쓴 쪽대본을 주는데 2장이나 됐다. 오전에는 다른 촬영하고 오후에 찍자는데 언제 외우나. 자기도 걱정됐는지 화장실에서 오줌 누는 장면 촬영하는데 ‘다 욀 수 있겠어’ 그러더라. 그래서 만날 니가 술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 아니냐 그랬다. 평소에 술 안 마셨으면 못했겠지. 홍상수 감독은 오래 숙성된 자기 관(觀)이 있다. 나야 대사 주면 외우긴 해도 숙성을 못 시키지. 전적으로 그 시선에 동의하는 건 아니니.
-동의 안 하는 게 뭔가. =성적 욕망이 인간 동력의 전부는 아니거든. 공동체를 위한 희생도 엔도르핀이 나와. 물론 성이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지. (웃음) 인간이 안쓰러운 연민의 대상이라는 점에도 동의하고.
-<첩첩산중> 때는 치아 때문에 술 안 마시고 찍었다고 했는데. 이번엔. =몸이 아파서 못 마시겠어. 나 소주 싫어. 그러면서 막걸리만 마셨지. 예전 같으면 홍 감독이 막걸리에 소주를 부었을 텐데. 배려를 조금 해주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귀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선배니까 못 들어봤을 테고. =왜. 나한테도 ‘오, 형 귀여웠어!’ 그래.
-귀엽다는 건 호감 간다, 매력있다는 뜻일 텐데. 언제 그런 말을 하나. =저 인간도 동물이 틀림없구나, 동물이라는 걸 위선으로 감추지 않구나 그럴 때 아닐까. 포장하지 않는 연기를 선호하는 건 나나 홍상수나 같다.
-전에 홍상수의 안테나를 존중한다고 했다. =예민한 감수성과 다른 세계관을 지닌 예술가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
-<오! 수정> 때는 홍상수 감독의 연기 연출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고 했다. =내가 그랬던가. 왜 스필버그가 감독은 체력이라고 했는데 홍상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많이 완화됐다. 전엔 집요하게 달려들었거든. <오! 수정>은 처음이니까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고. 지금은 서로 아니까, 정리해나가는 부분도 있겠지. 분명한 건 테이크 수가 현저히 줄었다. 돈문제도 있을 테고. 시니컬한 면도 좀 줄었지. <하하하>에 등장하는 엄마를 보라고.
-<하하하> 봤나. =문소리 때문에 뒤집어졌다.
-카메라 앞에서 벗은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황홀하지. (웃음) 일종의 극사실 연기를 원하는데, 내 것 말고도 다른 연기자가 기막히게 그걸 해내는 걸 볼 때도 황홀하다. 오르가슴보다 낫다니까.
-<옥희의 영화>의 각 에피소드에 모두 등장한다. 송 교수라 불리는 인물은 동일 인물인가. 다른 인물인가. =연결되는 듯 안되는 듯, 상관있는 듯 없는 듯하지. 그러면서 어떤 감정을 쌓아가는 건데.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걸 실험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실제 나를 봐도 이전의 나와 같냐고 하면 글쎄. 다른데도 그걸 모르는 거지.
-출연한 영화 보는 거 굉장히 싫다고 했다. =찍던 날의 정서 상태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니까. 민망해. <옥희의 영화>도 봤는데 역시 민망해. 그나마 덜 민망한 장면을 이야기하자면, 정유미에게 정말 잘못 돼서 헤어지더라도 1년 뒤에 만나자고 말하는 장면. 사이드 투숏이어서 안 보이는데 그날은 애절해서 눈물이 맺히더라니까. 마지막에 돌아서는 장면도 슬프지.
-마지막 장면 보고 다들 슬프고, 좋다고 한다. =정성일, 허문영? 그게 뭐냐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 그래. 자신을 송 교수한테 오버랩하고, 이입을 하지. 음, 나도 ‘아, 미치겠네’ 그랬으니.
-<첩첩산중>의 정 교수를 <옥희의 영화>에 끼워넣어보기도 했다. =걔는 좀 야비하잖아. 얌생이 같지. 식당에서 나와서 이선균이랑 정유미 부르는 장면 있잖아. 써준 대사 다 끝냈는데 “저 싸가지없는 년!” 하는 말이 툭 나오더라니까. 싸가지없는 건 자긴데.
-<첩첩산중>에 이어 정유미, 이선균과 비슷한 상황의 연적관계로 또다시 만났다. 처음엔 나이 차이도 있고 하니 후배들이 주눅도 들었을 텐데. =선균이는 오래전부터 알아서 그런 게 없다. 아내가 차이무 배우이기도 하고. 유미는 그런 건 없지만 홍상수 감독이랑 노는 거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홍 감독이 이거 입으라고 하면 ‘아이 싫어, 나 예쁜 거 입고 싶어!’ 그러고. 어떤 날은 홍 감독에게 ‘또 이런 이야기야? 평범한 거 좀 찍어!’ 그럴 때면 예쁘고, 귀엽고.
-가장 좋았던 건 내레이션이었다. 속마음을 훔쳐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근데 내 것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근데 정유미 건 기억 나. 예쁘다. 그게 홍상수의 감각인데, 배우들은 그 감각을 전할 뿐이고.
-에피소드별로 감독의 주문이 조금씩 달랐나. =그냥 인물에 대한 설명만 하지. 앞뒤 정황 정도 일러주면 그걸 받아서 하는 것이고. 연기하지 말고 그냥 살라는데 주문은 뭐. 중국집 회식 장면도 실제 강사, 교수 데려가도 연기하지 말게끔 하는데. 왜 이창동의 <시> 보면 시 강좌 시간에 가장 기뻤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거 보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쟤들 누구냐. 알고 보니 안 알려진 연극배우들이라는데 오디션까지 다 본 뒤 대부분 자기 이야길 하게 시켰더라고. 홍상수처럼 그냥 살게 하는 방식과는 다른데, 어쨌든 두 사람 정도의 감식력이 있어야 길거리 캐스팅이든, 비전문배우든 제대로 쓸 수 있다고.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는 두 감독과의 작업이 끝나면 배우의 심신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다. 이창동 감독과는 작업한 지 너무 오래됐지만. =스트레스는 홍상수가 덜하지. 이창동은 사람들이 평생 겪을 일을 다 때려모아서 인물에게 넣어두니까. 그걸 쥐어짜면 탈진이 심하겠지.
-이창동 감독은 왜 출연 제안을 안 할까. =생물학적으로 내가 나이가 들었잖아.
-등산은 요즘도 하나. =이거(국민의 명령) 착수하고 나니까 시간이 안되네. 오늘만 해도 인터뷰 둘에, 천정배 의원 출판기념회도 가봐야 하고. 저녁엔 국민의 명령 주최 청문회도 나가야 하고. 해질 때면 머리가 곤두선다니까. 근데 이놈의 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으니까 내가 미친 놈이라고. 앞으로는 오전에 산에 가고 저녁엔 길거리 나가서 시민들을 만나려고 한다.
-야당 단일화를 주장하는 건가.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 자원봉사자들도 잘 못 이해해서 ‘야(野) 합쳐!’라고 카피를 뽑았더라고. 그런데 그 의미는 아니고. 그냥 단일화면 그놈이 그놈 아니냐, 할 거 아니야. 국민의 명령은 시민 100만명이 힘 모아서 소리칠 테니 그 안에 야당도 빠져들어서 함께 새로운 정당을 생성해보자는 거다.
-정치적 의사표현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했지만 본업인 배우로서의 실이 많아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배우를 택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배우 안 해도 좋다는 거지. 후. 2002년 복귀하면서 배우로서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반면교사가 될 순 없었다. 후배들이 저렇게 하면 망한다, 난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가져선 안되니까. 극우 보수세력들의 수준 낮은 공세에 굴복할 수도 없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다. 괴로우니까 산만 다녔다. 그러다 노 대통령 1주기 추모 행사에서 5분짜리 독백을 맡았다. 문화행사이니 안 나갈 수도 없고. 그 뒤로 각 지역 추모행사를 다니는데 불현듯 그분은 죽었는데 내가 왜 배우를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 싶더라. 내가 배우를 안 하면 안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극우 애들이 민주진영을 지지했던 문화예술인들의 밥줄을 끊겠다고 하는 지금 상황에서 말이다.
-보수재집권 저지는 그러니까 신개념 노후준비이기도 하다. =(웃음) 그걸 막으려면 교두보인 6·2 지방선거를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봤다. 서울이 박빙이 아니었다면 힘을 내지 못했을 거다. 졌지만 이겼다고 봤고. 처음엔 나도 정당간, 정치지도자들의 결합을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2012년 4월 총선을 향해서 각당 후보자들이 뛰기 시작했는데 연대가 될까. 다들 제가 똑똑하다고, 자기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뭘 할 수 있을까. 남이 양보해야 하는 논리만 개발하는 그들인데. 그렇다면 87년 이후 가장 성숙한 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이, 국민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봤다. 시간이 많지 않다. 2011년 10월까지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경쟁력있는 후보를 내려면 1년 내내 국민이 나서서 군불을 때야 한다.
-근데 배우 안 하면 뭐 먹고사나. =역모기지 기사 보니까 60살부터 된다더라. 2년 동안 버틸 돈은 있겠다. 생활비도 많이 줄었다. 돈 많이 벌 때는 코냑 먹었는데 이젠 막걸리만 마시고. 강남에 살 때는 일식집도 다니고 했는데 이제는 5천원으로 한끼 때우고. 배우는 할 만큼 했잖아. 송강호, 설경구도 나이 드는데 나까지 기웃거릴 일도 없고. (웃음)
-국민의 명령은 목표 실현이 가능할까. =꿈꾸고 있네, 할 수 있지. 그런데 다른 방법이 뭐가 있나. 어떻게 할 건데. 술 마시면서 한탄만 할 건가. 절벽에서 떨어질 시간은 째깍째깍 가는데.
-앞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전화가 온다면. =그건 해야지. 저예산이다 보니 전과 달리 낮장면이 많더라. 시민 만나는 건 저녁이니 양해를 구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나오는 장면이 많진 않을 테니. 아침엔 등산 가고, 오후엔 촬영하고, 저녁엔 거리 나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