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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츠 오브 컨트롤> 짐 자무시, 그가 돌아왔다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첫 장편영화 <영원한 휴가>를 본 그의 아버지는 망설이며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얘야… 그러니… 까… 내가 영화를 다 본 게 아닌 거지…?” 도통 알 듯 모를 듯한 터라 빠진 내용이 있었던 건 아닌지 그렇게 물었다. <브로큰 플라워> 이후 5년 만에 짐 자무시가 신작 <리미츠 오브 컨트롤>로 돌아왔다. 이 신묘하기 그지없는 영화를 보는 당신이 혹시라도 그런 심정일까 싶어 영화에 관한 짧은 해제를 전한다. 하지만 잊지 말 것!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해석보다는 경험이 필요한, 당신의 뇌에 박힌 통제의 조정장치를 제거해줄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 속 고독한 한 사나이를 따라나서자. 신세계가 펼쳐진다.

“작가주의라는 걸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이렇게 말은 해야 한다고 본다. ‘영화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영화감독이 만들어야 한다.’ 예술영화라 지칭됨으로써 내 영화는 고립된다. 사람들이 어느 록밴드를 아트록이라고 묘사하는 걸 볼 때면 나는 그들에게 모터헤드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그러면서 궁금하다. 왜 그런 거지? 예술이 뭐가 문제란 거지? 그들은 우선권을 통제(지배)하는 상업과 채권을 위해 어떤 지저분한 말이라도 만들 것이다. 그런 게 할리우드다.” 왜 할리우드의 손쉬운 자본과 함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데드 맨> 직후 짐 자무시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 말의 주석이 될 만한 말도 덧붙였다.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형편없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할리우드에 대한 비방이나 예술가로 인식되는 것에 관한 불편함으로 듣는 대신, 나를 한쪽으로 가둬 통제하려 들지 말라는 항변으로 들어야 타당하다. 자무시에게는 그 어떤 통제도 마찬가지로 경계의 대상이다. 그는 인디펜던트라는 말에도 거부감을 표하며 그렇게 부르느니 차라리 덴마크의 왕비로 불러달라며 비꼰다. 그때 그의 쟁점은 옳고 그른 규정이 아니라 자유를 위협하는 거대한 통제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보고 놀라게 되는 건 이런 생각을 단지 영화의 내용적 차원으로 담아낸 것이 아니라, 그 생각 자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직접 구현하고 물화할 것인가를 이 영화가 고민했다는 점이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 덕분으로 우린 잊었던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짐 자무시가 청년기 시절부터 선망해온 SF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 그가 1970년에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이 영화는 제목을 따왔을 뿐 아니라 통제를 소재로 한다는 면에서도 유사하다. 자무시의 말에 따르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그런 것에 관한 “은유적인 무언가”이며“액션 없는 액션영화”다. 어떤 영화가 영감을 주었느냐고 묻는다면 실존하는 영화 중에는 존 부어맨의 <포인트 블랭크>를 꼽겠지만, 사실은 “자크 리베트가 존 부어맨의 <포인트 블랭크>를 다시 만든다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다시 만든다면” 그게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작품일 거라고 재치있게 가정한다.

그러니까 한 이름 없는 사나이(배우 이삭 드 반콜이 연기하며 크레딧에는 ‘고독한 사나이’라고 되어 있다)가 무언가 임무를 부여받는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청부업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차례로 접선하는데, 이유는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겠지만 정보는 그들이 건네는 성냥갑 안에 숨어 있고 그들이 겉으로 나누는 대화는 하나같이 음악, 영화, 분자, 보헤미안의 삶, 환각적 상태의 자유로움 등에 관해서다. 기승전결 없는 삽화별 진행, 명상에 가까운 흐름, 현묘한 대사 등에 따라 막연함을 호소하게도 되는데, 어찌나 막연했는지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나에게 이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투로 빈정댔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다시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SF작가 윌리엄 버로스 vs <데드 맨>의 환각탐색

자무시의 극영화 중 이방인이 주인공이 아닌 영화는 한 작품도 없다. 이방인이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에 따라 그의 영화는 결정된다. 순진한 나그네들이 많았고(<영원한 휴가> <천국보다 낯선> <다운 바이 로> <미스터리 트레인), 사무라이의 길 위에 있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고스트 독>), 때로는 통속적 세상에 있기도 했다(<브로큰 플라워>). 의외로 쟁점이 됐던 영화는 <데드 맨>이었는데 그때 주인공은 신화적 서부세계에 던져졌다. 기껏해야 아웃사이더로서 얌전하게 외곽을 돌며 유머나 냉소를 조금 할 줄 아는 방관자라고 여겼던 한 감독이 신기에 가까운 영화적 리듬을 타며 겹겹의 세계적 층위를 건드리자, 일면 그 독창성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일제히 불평을 쏟아냈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데드 맨>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를 연결 짓는 흥미로운 점 하나를 소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데드 맨>에는 환각탐색(Vision Quest)이라 불리는, 인디언 부족이 환각상태에서 자신을 새롭게 찾으려하는 일종의 영적 차원으로서의 통과의례가 등장한다. 주인공 블레이크(조니 뎁)도 그 환각탐색자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갔으며 영화 전체가 그 환각탐색의 통과의례가 되어 돌아온 것 같다. 자무시는“나는 진심으로 어떤 점에서 환각유발제와 같은 종류의 영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이 현세의 디테일을 조금이나마 다른 방식으로 보리라 희망한다. <데드 맨>에서 많은 것을 중첩시키려 생각했고 그것들이 좀더 주제적이고 추상적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조금 덜 추상적이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덜 추상적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내용 대신 지각이라는 강조가 배어 있다. 자무시는 지금 지각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몽환적이다. 환각이라고 말했지만 주술이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예의 자무시 영화의 명상적 분위기 안에 어떤 지각적인 혼동이 개입해 들어오고 그게 다른 차원으로 만개하기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엔 겨냥하는 바가 뚜렷하다. 지각의 경로를 바꾸어 통제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영화의 완성도를 질책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인지와 지각이 이 영화를 왜 즐기지 못하는지, 그동안 은연중에 통제 혹은 지배받아온 것은 없는지 점검해볼 만하다. 일종의 주관성 훈련의 한 예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이 <데드 맨>에 관해 ‘애시드 웨스턴’(Acid Western)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고 제안했을 때, 자무시는 “사실 나는 ‘주변부 웨스턴’(Peripheral Western)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윌리엄 버로스와 환각탐색을 경유한 이 영화는, ‘애시드 SF’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면 자무시는 ‘주변부 SF’라고 고쳐 말할 테지만, 어느 쪽이거나 상관은 없다. 두 작품 다 통제의 바깥에 있으려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가장 강력한 무표정의 돈키호테, 이삭 드 반콜

고독한 사나이로 등장하는 주연배우 이삭 드 반콜이 주술성의 가장 근사한 요체다. 무심한 이 배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절로 최면에 걸린다. <지상의 밤> <고스트 독> <커피와 담배>에도 출연했으나, 그의 고독은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그 자체로 완전해 보인다. 혹은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이 마을 입구에 악귀를 쫓기 위해 세운 성스러운 수호 석상이 있다면 그처럼 보일 것이다. 인간의 얼굴이 자연을 닮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의 얼굴에는 신비한 계곡과 숲이 새겨져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그는 숭고해 보이며 무표정으로 최면을 걸어온다. 짐 자무시의 모든 인물의 기원에는 무표정한 돈키호테가 놓여 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무표정의 돈키호테에 속할 것이다.

그가 인물들을 차례로 만난다. 그런데 이 만나는 방식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며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가령, 남자가 미술관에서 바이올린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바이올린을 든 상대가 나타난다. 누드화를 보고 나면 누드의 여자가 나타난다. 검은 손들에 의해 잡혀가는 주인공의 포스터를 보고 나면 그 여자는 잡혀간다. 플롯의 탄탄한 주관 아래 미리 배치되어 있는 곳에서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신, 주인공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떠올랐을 법한 그 시점에서야 불쑥 살아 있는 사람이나 사건으로 물화한다. 이것을 심지어는 이미지의 외재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일종의 환각상태의 뇌가 이끄는 이 가상적 관계는 영화에서 지속적이며 이것이 이 영화의 유일무이한 내러티브 전략이다(환각상태에 관해서는 암호가 적힌 흰 종이를 받아들 때마다 그것을 혀 안에 깊숙이 밀어넣는 주인공의 기묘한 행위가 연상시키는 바를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자무시는 꾸준하게 자신의 영화 방식에 대해 “디테일을 모은 다음 퍼즐을 맞춰 완성한다”고 말하는데 우린 거꾸로 뭉쳐진 퍼즐을 헤쳐놓은 다음 디테일을 차례대로 느끼는 방식으로 그 출현과 출현 방식을 즐기면 된다. 마침내 이 사나이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라스트신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는 통제의 지배자를 암살하려는 사람이다. 빌 머레이가 그 지배자를 연기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는 대기업 간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여기엔 멋진 장면이 있다. 몇초간 언덕 위에서 침투해야 할 건물을 바라보던 고독한 사나이. 철통같은 경비로 주위가 삼엄하다. 그런데 다음 장면. 그는 어느새 상대의 방 안에 들어와 있다. 놀란 상대가 방법을 묻자 그의 대답이 더 놀랍다. “상상력을 사용했지.” 이 재치있는 신과 신의 전환에 관해 실은 자무시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바도 주인공과 같다. 상상력을 사용하라.

부제를 붙인다면 ‘짐 자무시의 <매트릭스>’?

짐 자무시가 은근한 유머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그의 영화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심각하기 짝이 없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의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누구란 말인가. 사무라이인가, 청부업자인가, 아니면 미치광이인가. 이때 그가 출현하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눈여겨보시길 권한다. 첫 장면, 공항에서 그는 누군가를 만나 임무를 전달받는다. 공항에 돌아다니는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매끈한 사내들을 그는 피해야 한다. 열쇠와 암호문이 든 성냥갑이 그의 손에 쥐어진다. 어느 곳에나 있는 감시의 헬리콥터를 피해 그는 지정된 장소에 가야 할 운명이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세상은 통제되고 있으나 주관적 인식에 따라 변경된다. 이 남자가 들어온 세계는 그렇다면 어디인가. 아마도 가상세계쯤 될 것이다. 그는 거기서 임무를 마친다. 그런 다음 영화 내내 입고 있던 양복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건물을 유유히 벗어난다. 그때 영화가 끝날 것이다. 가상세계로의 진입, 다시 현실세계로의 귀환.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딘지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으로 세상을 보라는 이 영화의 제안에 따라 우린 <리미츠 오브 컨트롤>의 부제를 ‘짐 자무시의 <매트릭스>’라 붙이고 싶어진다. 이 고독한 사나이의 정체는 단순한 청부업자가 아니다. 마침내 예술과 과학의 부름으로 여기 온 숙명의 네오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 네오를 주인공으로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의 모험이자 지구상 가장 통쾌하게 지어진 은유로서의 유머다. 물론, 여기에 그 무슨 정의가 더해지지 않는다 해도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충분히 신묘하고 즐겁다. 얼마간의 자기도취적 면모가 없진 않지만, 2010년 상반기에 찾아온 ‘외국영화’에 한해 말한다면,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편으로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꼽는 데 망설임이 없다. 통제 안에서 유능하게 만들어진 영화는 있지만 통제를 뛰어넘어 유희한 그 바깥의 영화로서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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