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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스크린 속 그녀와의 눈빛교환

<쉬린>

<네네트>(Ne'nette )와 <쉬린>(Shirin)은 둘 다 매우 독특한 영화다. <네네트>는 성공적이었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마지막 수업>의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번엔 초등학생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번엔 오랑우탄의 일상생활이다. 하지만 <네네트>는 결코 야생동물들이 나오고 거기에 바리 화이트 같은 성대모사 전문가가 비둘기 목소리를 흉내내며 해설을 해주는 그런 동물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파리 식물공원 안의 동물원에 살고 있다. 해마다 60만명의 호기심 어린 관람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한데 영화에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는다. 필리베르 감독은 여주인공 네네트만 찍었고, 조연으로 같은 우리에 사는 다른 원숭이 세 마리가 나올 뿐이다. 대신 동물원을 찾은 관람객의 갖가지 주석들이 담긴 목소리가 영화에 포착돼 있다. 네네트가 40살이라는 사실에 경탄하기도 하고, 윤기 흐르는 그녀의 털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녀의 턱밑에 늘어진 갑상선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네네트를 놀리고, 어떤 이는 네네트를 가여워하고, 또 어떤 이는 네네트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기도 하는데… 그렇다. 어떤 여자는 네네트가 슬퍼 보인다며 “고국이 그리운 거예요”라고 결론내리더니 이렇게 덧붙인다. “저도 사실 고국이 그립거든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네네트는 하나의 동물이자 볼 만한 구경거리다. 하지만 몇분이 지나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네네트 역시 유리창 너머로 우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이 던지는 물음이다. 네네트가 관람객에게 던지고 있는 시선의 정확한 정체는 과연 무얼까? 네네트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걸까? 확실한 건 네네트가 그녀의 아주 작은 세계 너머의 우리 세계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는 거다. 그녀가 사는 우리 안과 그 우리 바깥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가 오가는 것이 있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영화 <쉬린>은 <네네트>와 정반대 논리가 작용하는 작품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만들었던 장본인이 이번엔 영화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108명의 여자 관객을 촬영했다. 그녀들은 페르시아의 전설을 각색한 작품을 감상하는 중인데, 내용은 평범한 청년과 왕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어떤 페르시아 공주의 이야기다. <체리향기>를 만들었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번에는 한 시간 반이 넘는 동안 프로젝트의 화려한 불빛 아래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숭고한 얼굴들만을 카메라를 아주 바짝 대고 찍었다. 간혹 손이 하나 나타나 머플러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가 입술 위를 왔다 갔다 하는가 하면, 속눈썹 하나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그녀들은 모두 이란에서 아주 유명한 배우다. 거기에는 줄리엣 비노쉬도 끼어 있다. <네네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쉬린>에서 제기되는 건 시선의 정체에 관한 문제다. 거기 나오는 그녀들은 과연 모두 그녀 자신들인가? 아니면 배우로서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거기 나오는 얼굴은 과연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촬영소의 텅 빈 공간을 주시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불현듯 생기는 숭고한 의문 하나. 우리가 거울의 이쪽 편에서 그녀들을 관찰하듯, 혹시 그녀들도 관객인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거라면?

다들 동의하겠지만 토요일 저녁에 가서 보기엔 좀 뭣한 이 두 작품은, 그래도 영화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카메라 시야 밖으로 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과연 누구를 향해 구조를 요청했던 것일까? 물론 ‘나’를 향해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구경꾼의 예술이 아니다. 화면 양쪽의 두 세계는 닿지는 않지만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 네네트가 그러하듯,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가 그러하듯, 각기 나름의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 관객을 역시 관찰하는 중이다.

번역 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