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김동원의 <상계동 올림픽>을 처음으로 봤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는 갓 입학한 X세대 때문에 80년대 학번들의 골머리가 썩었다. 한 선배가 말했다. 광주 민중항쟁 다큐멘터리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틀면 우리가 왜 이런 걸 보고 있어야 하냐며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많은 후배들이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게 좀더 잘 만든 영화를 틀어줄 일이지. <상계동 올림픽>은 달랐다. 불법복제한 테이프의 지글지글 열악한 화면에도 불구하고 <상계동 올림픽>은 잘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무엇보다도 치열했다. 그렇게 한국의 인디다큐멘터리는 시작됐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올해로 10년을 맞이했다. 국내 인디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재능들을 발굴하고 독려해온 이 귀중한 행사는 3월26일부터 4월1일까지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열린다. 재미있게도 개막작은 <상계동 올림픽>과 신작인 <미얀마 선언>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 의해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을 다룬 전작은 뉴타운 개발과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신개발독재 정권 아래서 재감상하는 게 문득 새롭다. 그런가 하면 <미얀마 선언>은 딱 2010년다운 다큐멘터리다. 미얀마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아웅산 수지 여사의 자택 감금을 풀어달라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미얀마 선언>에서 ‘미얀마’는 ‘미얀(하지만 아)마(우린 안될 거야)’라는 88만원 세대의 슬로건이다. 최신춘 감독은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자기 처지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뛰어넘지 못하는 지금 20대 청춘의 모습을 가벼이 스케치한다. <상계동 올림픽>과 <미얀마 선언>은 어찌보면 20년 전 인디다큐와 지금의 인디다큐, 20년 전 한국과 지금의 한국에 대한 절묘한 비교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많은 작품이 이미 소개된 영화들이지만 신작 중에서도 챙겨봐야 할 영화들이 꽤 있다. 지금종, 최유진 감독의 <오체투지 다이어리>는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펴 엎드린 뒤 이마를 땅에 붙이는 행위를 반복하며 길을 걷는 오체투지의 기록이다. 배경은 티베트가 아니라 한국이다.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전종훈 신부는 지리산 하악단에서 계룡산 중악단, 묘향산 상악단을 목표로 오체투지 순례에 나선다. <오체투지 다이어리>는 세 성직자의 고행길을 따르면서 그들이 온몸을 바닥에 던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서서히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그들의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순례가 이명박 정부 이후 끝없이 추락하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적 염원이라는 건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정호현 감독의 <쿠바의 연인>은 쿠바 아바나대학에서 만난 쿠바 청년과 한국인 다큐멘터리 감독이 함께 살 장소를 찾는 이야기다. 감독은 두 나라를 비교한다. 우리에게(특히나 사회주의 이상향을 꿈꾸던 몇몇 우리에게) 쿠바는 체 게바라의 나라이며 무료 교육과 무료 의료의 참세상이다. 정말 그러한가? 쿠바인들에게 한국은 황금이 반짝이는 극동의 자본주의 천국일 거다. 정말 그러한가? 이 재미난 다큐멘터리는 사회적 비교 텍스트인 동시에 알싸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민경 감독의 <자기만의 방>은 88만원 세대 대학생의 서울 자취방 구하기 퀘스트다. 미친 듯이 치솟는 서울의 월세와 전세를 피해가며 이 방 저 방 전전하는 여대생의 고난을 통해, 심민경 감독은 자기 세대가 짊어진 경제적 업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상계동 올림픽> 시대와 <미얀마 선언> 시대의 같음과 다름이다. 한국 인디다큐의 선구자들은 사회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싸우며 현장을 기록했다. 2010년의 다큐 감독들은 좀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자기 세대의 어둠을 사근사근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용산과 촛불의 불타는 연대기에 용맹하게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가 없는 것이 아쉬운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인디다큐의 사회적, 미학적 흐름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곱씹어보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미학적 관점에서라면 지난 으로 알려진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을 놓치지 않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