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8개월 전 파리의 세르비아 피에르 1세가(街)에 자리한 한 사무실로 돌아가본다. 로메르가 우릴 만나줄 거라는 별다른 기대감없이 친구인 파비앙 보만과 나는 약속을 잡았었다. 누벨바그의 영화인, 전설적이자 독특한 인물인 로메르. 그는 당시 89살이었다. 그가 사람을 그다지 만나지 않는데다가 우리 인터뷰의 테마 또한 ‘해변가’라는 좀 기괴한 것이었다. 한데 <클레르의 무릎>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여름 이야기> <해변의 폴린느> <내 친구의 남자친구> 외에도 주옥같은 섬세한 작품을 수없이 만들었던 로메르는 놀랍게도 꼬박 한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해주는 게 아닌가. 인터뷰의 테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로메르는 해변가를 무척 좋아한 사람이었고, 프랑스에서 로메르만큼 해변가를 훌륭히 촬영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책상 위엔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서재 구석엔 전자오르간 한대가 놓여 있었다. 복도에서 우린 배우 마리 리비에르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날 로메르는 특히 1986년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서 촬영했던 그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 중 하나인 <녹색광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것이 지면상에 발표된 로메르와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던 것이다.
“제 처가댁 어른들에겐 비아리츠 해변가 절벽 위에 바다를 향해 지어놓은 집이 한채 있는데, 거기서 <녹색광선>을 촬영했어요. 매일 저녁이면 저는 그곳에서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죠. 거의 15년 동안 대여섯번 정도 예의 그 녹색광선을 봤습니다. 녹색광선을 보려면 일단 하늘이 완벽할 정도로 맑아야 해요. 가장 좋은 때는 폭풍우가 지나간 바로 다음이지요. 그럴 때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이 아주 가깝게 보이지요. 저는 우연히 어떤 독일 물리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제 작품에서 바로 그 녹색광선이 뭔지 설명해줍니다. 녹색광선이란 색깔이 놀랍게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현상입니다. 프리즘을 통해서 자외선으로부터 적외선쪽으로 색깔들을 따라가다 보면, 빨강, 노랑… 등등에 이어 결국 그 녹색광선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건 단 2초도 지속되지 않는 현상이지요. 우리가 그 해변가에 촬영하러 도착했을 때는 녹색광선을 볼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조건이었어요. 낮에 폭풍우가 지나갔었거든요. 그런데 해가 지기 바로 전에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촬영기사가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는 바로 촬영을 시작하자고 할 수가 없었어요. 적절한 순간이 다시 오리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 적절한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작품이 1년씩이나 늦어진 거고, 결국 특수효과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에릭 로메르는 작품의 영상배치나 매우 치밀하게 쓰여졌던 대사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이미 출간된 <오후의 연정>의 시나리오를 우리에게 내밀며 그중 한 대목을 소리내서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는 아주 주의깊게, 우리가 읽어주는 자신의 시나리오의 한 대목을 듣고 있었다. “내가 바다를 사랑하듯, 나는 군중을 사랑한다. 내가 그 속으로 침몰하거나 그 속에서 녹아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홀로, 거품처럼, 그 위를 표류하기 위해서, 겉으로 보기엔 군중의 리듬을 순순히 따르면서. 그 군중의 흐름이 힘을 잃고 부스러지면, 곧바로 다시 나만의 리듬을 더 쉬이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나에게 군중이란 바다와도 같은 것, 그건 내게 생기를 주고 꿈을 돈독히 해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책을 덮었다. 에릭 로메르는 2010년 1월11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날 비아리츠 해변가의 하늘은 아주 맑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질 무렵 어떤 이는 녹색광선을 보았다고 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그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