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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다 재미난다 독립영화탐구생활
이영진 2009-12-15

서울독립영화제2009 12월11일부터… 경향을 알 수 있는 추천작 15편을 소개함

서울독립영화제2009가 12월11일부터 18일까지 9일 동안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다. ‘치고 달리기’(Hit & Run)라는 야구용어를 슬로건 삼은 이번 영화제 출품작은 모두 722편. 지난해보다 100편 이상 많아졌다. 이중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를 비롯한 45편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경쟁부문에서 관객을 만난다. 개막작은 지난해 ‘인디 트라이앵글’ 프로젝트에 선정된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의 옴니버스영화 <원 나잇 스탠드>. 제목처럼 하룻밤의 섹스가 공통 주제다. 국내 초청부문에선 이지상 감독의 <몽실언니>, 애니메이션 <산책가> 등 24편이 상영된다. 장률 감독 특별전과 라야 마틴의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등 필리핀 독립영화 특별전도 해외초청 부문에 마련됐다. 올해 독립영화의 경향을 한눈에 일별하는 축제에 앞서 ‘치고 달리기’라는 슬로건처럼 ‘명랑하고 역동적인 독립영화’ 15편을 먼저 소개한다.

88만원

감독 김일현 | 애니메이션, 실험 | 컬러 | 13분 | 2009년

눈을 감고 귀로 들어야 한다. 절절한 애니메이션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다. 한달 생활비 명세표를 숨 쉬지 않고 읽는 남자의 목소리, 영락없이 슬픈 랩이다. 남자가 생활고를 호소하는 동안 호랑이보다 무서운 돈 잡아먹는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는 데이트를 회피하고자 콧소리 섞은 거짓말을 해댄다. 몇번의 승강이 끝에 떨어지는 이별 선고. 그러나 나쁜 남자는 실연 통보에 쾌재를 부른다. 이 나쁜 남자의 이름은 ‘88만원 세대’다. 간단한(그러나 이유있는) 낙서만으로 재기를 보여주는 신통방통 애니메이션.

거짓말

감독 임오정 | 극 | 컬러 | 32분 | 2009년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영희와 세상 다 산 것 같은 연희는 둘도 없는 오랜 친구다.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두 사람. 그녀들의 손엔 청첩장 대신 수신자 없는 편지가 들려 있다. <거짓말>의 ‘주인없는 편지’는 실은 ‘도둑맞은 편지’다. 헤어지자면서 한때나마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내용의, (사실상) 익명의 편지를 뜯어보고 연희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서 수모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희는 누군가의 거짓말을 잠시나마 진심이라 믿고 싶었던 연희의 뒷모습을 본다. 연희가 ‘쪽팔려’라고 말할 때, 그건 ‘거짓말’일까 ‘참말’일까.

속주패왕전

감독 이혜영 | 애니메이션 | 컬러 | 17분 | 2009년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속주 수련에 나선 기타리스트 박승용, 이라고 주인공을 소개하면 재미없다. 박승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삼거리기타교습소 원장 쌤 마태풍의 수제자이자(수강생은 달랑 혼자다), 똥통에서 파리와 사투를 벌이며 지옥훈련을 마다않는(전설의 ‘소림기타18괴도권’을 익히기 위해) 의지의 사나이. 그의 입방정은 사부를 외팔이로 만드는 변고를 낳지만, 더 나아가 사부가 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키치와 패러디의 정서로 무장한 이경석의 동명 웹툰이 원작. 갖가지 장르 횡단의 쾌감도 즐겁지만, 쉴새없는 쌍욕과 썰렁한 유머가 더 강력하다.

쿠바의 연인

감독 정호현 | 다큐멘터리 | 컬러 | 72분 | 2009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연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주기도문이다. <쿠바의 연인>은 발칙하게도 사랑을 시험한다. 한국과 쿠바라는 정반대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연인들은 자신들이 나누는 사랑의 무게가 얼마쯤 되는지 재본다. 정확한 중량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발가벗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치노’(Chino) 소리 듣는 한국 여자는 무작정 쿠바에 갔고, 그곳에서 머물며 만난 쿠바 사람들을 소개한다. ‘카스트로 만세’라고 외치지만 뒤돌아 “12시간 일하고 5달러 버는 삶”이 부럽다고 말하는 쿠바 사람들을 비출 때 다큐멘터리는 ‘푸른 유니콘을 잃어버린’ 인민의 슬픈 눈망울을 감상하는 기록처럼 보인다. 그렇게 낭만의 여행이 끝날 것 같은 지점에서, <쿠바의 연인>은 본색을 드러내고 유턴한다. 택시를 탄 한국 여자의 옆자리엔 폭탄 머리를 한 쿠바 남자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이 얼마 뒤 밝혀진다. 그리고 악마의 씨를 가진 쿠바 남자는 미래의 장모님에게 어서 빨리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국경을 훌쩍 뛰어넘은 사랑이 가능할까. 시종 유쾌하고 저돌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쿠바의 연인>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명제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아닌 듯하다. 평등을 자위하는 아바나와 경쟁을 추종하는 서울을 오가는 피부색 다른 두 남녀의 ‘대장정연애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은 결혼 팡파르가 아니라 ‘진화하는 혁명’의 가능성 아닐까. 속히 속편이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

감독 임덕윤 | 극 | 컬러, 흑백 | 32분55초 | 2009년

먼저 관객은 ‘조금 불편한’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덕윤의 일상을 들여다보려면. 1주일에 세 차례 병원에 들러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덕윤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설 때 위험천만한 세상은 흑백 실루엣으로 변한다. 도움을 주겠다는 손은 코브라가 되고, 쌩쌩 달리는 트럭은 탱크 굉음을 낸다. 신기하게도 도중 동정의 시선은 역전된다. 아마도 <이별의 종착역>에 맞춰 덕윤이 휘파람을 불 때 모두들 따라 부를 것이다. 길잡이는 우리가 아니라 어느새 덕윤이다. 직접 출연한 시각장애인 감독은 불행하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

<남매의 집>

감독 조성희 | 극 | 컬러 | 43분 | 2008년

어린 남매인 철수와 순이는 지하방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아빠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텔레비전은 지직거리며 나오지 않고 순이는 바깥에서 누군가가 집 안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빠는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집을 찾는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문을 열어주었으나 곧 괴이하고 거친 사람들로 돌변한 세 남자는 집 안의 앵무새도 죽이고 마침내는 동생 순이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방 안을 벗어나지 않고 철수와 순이의 집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 영화는 놀랍게도 특수효과 없는 SF에 가깝다. 게다가 영화는 조여드는 압박감으로 곧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진다. 순이를 잡아간 그들은 누구일까.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정체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한 영화.

회오리 바람

감독 장건재 | 극 | 컬러 | 95분30초 | 2009년

미숙한 10대들의 감정을 흔히 치기라 부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10대의 한때는 어설픈 해프닝 혹은 위험한 장난으로 얼룩져 있다고들 여긴다. <회오리 바람>의 태훈을 만날 때 우리는 얼마간 얼굴 화끈거리는 치기를 떠올리며 비웃을지 모른다. 여자친구 미정과 만난 지 100일 기념으로 강원도로 1주일 여행을 떠난 태훈이 서울로 돌아오는 차비가 없어 1만원을 빌리러 터미널 주변을 배회할 때, 거짓말이 들통나 미정의 아버지에게 혼쭐이 난 뒤 대학 입학 때까지 미정을 만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쓸 때, 돈을 벌겠다며 중국집 아르바이트 배달 일을 하다 급기야 오토바이 사고를 낼 때, 태훈은 매번 고개를 푹 숙이고 치기는 더더욱 보잘것없는 모양새가 된다.

그럼에도 <회오리 바람>은 10대들을 치기덩어리라 단정하지 않는다. 치기가 어설프거나 위험한 것은 미숙함이 아니라 절실함 때문이라고 믿는다. 악몽의 현실에 쫓겨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태훈과 미정도 열아홉의 문턱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헉헉거린 뒤 찾아드는 잠깐의 평온이야말로 어떤 휴식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회오리 바람>은 태훈과 미정에게, 혹은 그만한 나이의 친구들에게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선물한다. “더 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누군가에겐 부러운 선물이기도 하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감독 백승화 | 다큐멘터리 | 컬러 | 94분 | 2009년

인천의 모텔촌에 난데없이‘루비살롱’이라는 인디음악 라이브 클럽이 생긴다. 오랫동안 홍대 인디음악계에서 활동했던 리규영이 차린 곳이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록음악의 황무지 같은 이곳에 클럽을 만들어놓고도 리규영은 태연자약하게 “홍대에는 클럽데이가 있으니 우리는 모텔데이라도 만들면 된다”고 떵떵거린다. 그의 말이 허풍처럼 들릴 즈음 사건이 시작된다.

홍대에서 활동하던 두개의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타바코쥬스’가 루비살롱의 일원으로 찾아온다. 영화는 이제 이 두 밴드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을 그려낸다. “우주에서 온 로큰롤 전도사”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승승장구한다. 실력도 인정받고 유명해지면서 각종 페스티벌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홍대 최고의 막장밴드이자 찌질이들의 대마왕”인 타바코쥬스는 매일이 여전히 똑같고 찌질하다. 술에 취해 멤버끼리 싸우는 건 다반사고 공연을 펑크낼 때도 있다. 이 두 록밴드의 엇갈리는 명암을 영화는 따라간다. 게다가 이 영화의 감독은 타바코쥬스의 드러머다. 간단한 마음으로 자기가 아는 친구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재미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유머가 만만치 않으며 영화의 구성도 재치 만점이다. 때로는 덜컥 가슴 적시는 감동의 장면까지 있다. 스턴트계에 <우린 액션배우다>가 있다면 이제 홍대 인디음악계에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올해의 가장 쾌활한 영화 중 한편.

ACT OF LIFE

감독 임호경 | 극, 다큐멘터리, 실험 | 컬러 | 52분 | 2009년

화자인 나는 죽은 친구 다다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그가 떨어져 죽은 아파트 공사장에 가보기도 하고, 생전의 룸메이트를 찾아 죽기 전날 그가 찍었다는 손목사진도 보고, 그가 들렀다는 핑크색 술집의 마담과 대화도 나눈다. 또 그의 죽음을 현장검증이라도 하듯 직접 재연해보기도 한다. “그의 삶 혹은 죽음을 결정”한 사소함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사는 종결되지 않는다. “당신이 고백한 것들이 왜 구태여 노력해서 고백해야만 하는 것들이 되어버린 거지”라고 자문할 때, 다다는 이미 희미한 기억 부스러기다. 무국적 내레이션을 반주삼은 독특한 레퀴엠. 삶과 죽음의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을 반복 연주한다.

오후 3시

감독 김지곤 | 다큐멘터리 | 컬러 | 24분32초 | 2009년

오래되고 낡은 부산의 한 극장을 영화는 보여준다. 제목 <오후 3시>는 그 극장을 카메라가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초라한 극장에서는 이제는 늙은 영사기사가 혼자 일하고 있다. 손님이 있을 리 없다. 극장은 꼭 초현실적인 장소처럼 포착된다. 하지만 이 극장을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현재적이다. 현재에 있는 것들이 신기하게도 컷마다 저 추억 속 사진이나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향수로 가득하다. 빠르게 변해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마지막에 해당할 만한 이 동시상영 극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에 잠길 만하지만 그걸 포착하는 소리나 색감, 사진적 구도 등은 이를 데 없이 빼어나다.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의 삶의 이곳저곳을 평정으로 한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자 같은 영화다.

드라이브

감독 심명훈 | 극 | 컬러 | 11분23초 | 2009년

가죽점퍼를 걸친 남자가 운전 중 휴대폰을 받는다. “여보세요. 네. 출발했습니다. 지금 잠수대교로 가고 있습니다. 가방은 챙겼습니다.” 뒷좌석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인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운전자의 눈빛은 음흉하다고까지 할 순 없어도 보통은 아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십자가! 익숙한 범죄물처럼 운을 떼지만, 이 모든 것이 실제상황은 아니다. 가죽점퍼 사내의 정체가 드러날 때 예기치 않았던 웃음도 터진다. ‘달리고 싶은’ ‘욕구’를 ‘쫓는’ 주인공을 택했다는 점에서 <드라이브>만큼 적절한 제목이 있을까. 여러 번 핸들을 꺾는 <드라이브>처럼,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삶의 박동 또한 시시각각 바뀐다.

땅의 여자

감독 권우정 | 다큐멘터리 | 컬러 | 95분 | 2009년

대학 선후배인 세 여자는 졸업 뒤 곧장 농촌으로 갔다.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꿈이 삶 저편에 있다고 믿지 않았고” 그래서 땅에 투신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지를 남편으로 삼아 가족도 이뤘다. 10년이 흘렀다. 진주와 창녕과 합천에 흩어져 사는 세 여자는 여전히 농민활동가다. 세 여자의 의지는 더 깊게 뿌리내렸을까. 아니면 흔들리고 있을까. 전반부는 ‘남녀탐구생활’ 농민활동가 편처럼 보인다. “그냥 안 굶어죽으면 되지”라고 하는 소희주씨의 천하태평 발언에 남편은 “지 혼자 나가버리잖아. 같이 활동하면서”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보기 즐거운 언쟁이다. “일이 몸에 붙지 않아” 호미 들면 타박 들었다는 변은주씨의 푸념과 “노총각에게 성은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활동을 보장받았다는 강선희씨의 무용담도 흥미로운 애정표현이다. 농군이 된 세 친구의 거침없는 폭포수 직설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하다.

그러나 <땅의 여자>는 꿈같은 전원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우는 아이 떼놓고 새벽 일찍 나섰지만 서울 집회에는 막상 가보지도 못하고 주저앉는다. 누군가는 10년 넘는 시집살이 끝에 “내가 이 집 종이야?”라고 참아왔던 속엣말을 터트린다. 누군가는 제 욕심 채우자고 아픈 남편을 병수발 하지 않은 괘씸한 아내라고 손가락질당한다. 그제야 육아와 가사와 논일과 활동을 한데 짊어진 세 여자의 그늘도 비로소 드러난다.

수진들에게

감독 강연하 | 극 | 컬러 | 20분10초 | 2008년

스무살이 넘으면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교복 대신 유니폼이다. “만날 똑같은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불평하지만 달리 선택도 없다. 아니, 어떻게든 입어야 한다. 그래야 월세 단칸방에서라도 살 수 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하는 수진만의 처지는 아니다. 지하마트의 다른 코너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있고, 화려한 쇼핑몰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또 있다. 환상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실. 그래서 수진은 수진을 만나 돌을 던진다. 바뀌는 건 없다. 언제나 그 자리, 제자리다. 에스컬레이터 없는 삶에 지친 20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무의 편지.

복자

감독 정희재 | 극 | 컬러 | 21분40초 | 2009년

삶은 가혹하다. 극단의 선택을 종용하고 나서도 웃으라고 명한다. 삶의 린치는 10대 소녀 복자에게도 예외없이 가해진다. 쫓겨다니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왔다. 빚쟁이 때문에 위장이혼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말한다. 다시 함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복자는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마지막 장면. 복자는 울음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는다. 이미 행해진 극단과 앞으로 택해야 할 극단 앞에서 그녀는 아마도 비극은 고작해야 1장이 끝났을 뿐이라고 되뇌일지 모른다. 눈물까지 말라버린 소녀의 얼굴은 이따금 <복자>를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게 만들 정도다.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

감독 장은주 | 실험 | 흑백 | 21분54초 | 2009년

섣불리 <동물의 왕국>의 짝짓기를 떠올리진 말자. 검은 옷을 입고 계곡에서 느릿하게 부유하는 여성 혹은 비밀스런 짐승들의 육체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니 말이다. 어쩌면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의 문을 열 수 있는 자그마한 비밀의 열쇠는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삭제된 무엇일지 모른다.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검은 유령들의 숲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남성적인 형상물이다. 모든 사운드는 거세되어 있다. 시각과 청각의 교접을 통한 의미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매 순간 감각하는 비밀스런 짐승들의 관능적인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