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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들에겐 현실감각이 필수

오드리 헵번부터 샌드라 불럭까지 로맨틱코미디의 변천사와 얼굴들

샌드라 불럭의 신작 <프로포즈>를 본 관객은 대부분 여행 끝에 자기 집에 돌아온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도입부에 나오는 주인공의 ‘마녀’ 캐릭터 묘사를 제외하면 <프로포즈>는 전형적인 샌드라 불럭식 로맨틱코미디다. 불필요한 애교를 떨지 않고 친근하고 단순하며 귀엽다. 불럭은 결코 연기폭이 좁은 배우가 아니고 출연한 작품들의 장르 역시 호러에서 아카데미표 드라마까지 넓게 펼쳐졌지만 대부분 관객은 이른바 ‘샌드라 불럭’표 영화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주로 평범하고 감정이입하기 쉬운 주인공을 내세운 여성 주도 영화로, 여성간의 연대를 다룬 멜로드라마이거나 로맨틱코미디다. 여기서 ‘불럭 영화’가 로맨틱코미디에 제한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자. 불럭에게 로맨틱코미디는 불럭식 연기를 표출할 수 있는 익숙한 공간 중 하나다. 이 경우 로맨스 자체보다 이런 환경에서 불럭식 캐릭터의 주체성과 평등성이 어떻게 표현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투 웍스 노티스>

<필라델피아 스토리>

불럭보다 몇년 전에 미국 로맨틱코미디 시장을 평정했던 멕 라이언과 불럭을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비교적 쉽게 드러난다. 속해 있는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성격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멕 라이언의 캐릭터들은 샌드라 불럭 캐릭터들의 주체성을 지니지 않았다. 그들은 씩씩한 현대 커리어우먼이기는 해도 그 귀여움으로 양성 관객 모두에게 어느 정도 타자화되어 있으며 비교적 쉽게 로맨스에 몸을 던진다. <프렌치 키스> <유브 갓 메일> <케이트와 레오폴드> 같은 영화들의 결말에 반복되는 포기의 모티브에 주목하자. 라이언 캐릭터는 로맨스가 진행되는 동안 국적을 포기하고 가게를 포기하며 심지어 나중엔 자기가 사는 시대까지 버린다. 라이언 영화에서 로맨스는 현실을 능가하는 절대성을 부여받으며 캐릭터의 주체성이나 평등성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라이언 캐릭터의 수명은 불럭 캐릭터의 수명보다 짧다. 불럭은 라이언과 달리 관객 앞에서 귀여움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다.

멕 라이언이 빠진 함정은?

로맨틱코미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로맨스는 양날의 칼이다. 이 장르는 여자주인공에게 평등한 역할 또는 거의 전적인 주도권을 보장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로맨스를 따라가다보면 여성성과 전통의 영역에 서 어느 정도 타협을 보아야 한다. 성공적인 로맨틱코미디 배우들은 대부분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도 전적으로 로맨틱코미디 장르에만 몸을 담그는 사람들은 예상외로 적다.

이 장르에서 쉽게 떠올릴 만한 배우들인 르네 젤위거, 줄리아 로버츠, 드루 배리모어, 리즈 위더스푼과 같은 배우들을 보자. 이들은 모두 친근한 외모와 적절한 코미디 감각으로 로맨틱코미디의 전문가로 알려졌지만 이들 중 정작 로맨틱코미디에만 매진하는 배우들은 찾기 힘들다. 이들 중 그나마 진짜 전문가라고 할 배우는 <웨딩 싱어> 이후 꾸준한 로맨틱코미디의 계보를 이어왔던 드루 배리모어 정도. 배리모어도 <미녀 삼총사> 시리즈처럼 장르 외의 히트작들을 많이 가졌다. 이들 중 리즈 위더스푼처럼 이미지와 달리 로맨틱코미디는 손에 꼽을 정도인 배우들도 있다(깜빡 잊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금발이 너무해> 시리즈는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다). 성공적인 로맨틱코미디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꾸준한 현실감각이 필수적이며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결코 장르에 갇혀서는 안된다. 바로 그것이 멕 라이언이 빠진 함정이다.

1950년대엔 오히려 남성이 최대스타

그럼에도 우리가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라는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한다는 건 여전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의심이 된다면 멕 라이언 이전에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몇이나 되는지 보자. 생각외로 별로 없다. 다이앤 키튼은 어떤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배우지만 <애니홀>과 같은 키튼의 ‘로맨틱코미디’ 대표작들은 대부분 우디 앨런 영화이다. 키튼보다 앨런이 먼저다.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하오의 연정> <샤레이드>와 같은 작품들에 출연했던 오드리 헵번은 어떤가? 모두 매력적인 작품들이고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도 어울리며 헵번의 개성도 완벽하게 반영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린 오드리 헵번을 로맨틱코미디의 전문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로맨스가 가미된 뮤지컬 코미디영화가 대표작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릴린 먼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칙 플릭’ 또는 ‘칙릿’ 시대를 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로맨틱코미디와 당시의 로맨틱코미디 사이에는 분명한 개념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사회와 함께 변화한 여성 관객이다. 당시 여성 관객도 로맨틱한 코미디에 출연하는 오드리 헵번과 마릴린 먼로를 바라보면서 그들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헵번과 먼로는 그들이 현실 세계에서 도달할 수 없는 꿈의 영역에 존재하는 감상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특히 마릴린 먼로에 온전히 감정이입할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유브 갓 메일>

물론 멕 라이언 이전에도 이 장르의 전문가로 분류되는 여성 배우들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 경우 멕 라이언처럼 여자들의 이름만 뜨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도리스 데이는 어떤가? 로맨틱코미디 장르만을 이야기할 때 데이의 이름은 혼자 뜨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는 언제나 데이를 록 허드슨의 짝으로 기억한다. 캐서린 헵번은 어떤가? 물론 이 사람 옆에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있다. 윌리엄 파웰이 없는 머나 로이, 프레드 아스테어가 없는 진저 로저스를 상상하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장르에서 최대 스타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 그는 캐리 그랜트다. 요새 로맨틱코미디의 남성 전문가로 불리는 휴 그랜트와 캐리 그랜트의 입지를 한번 비교해보라.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보인다. 40년대나 50년까지만 하더라도 로맨틱코미디는 ‘여자들만 보는 장르’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개념이 아직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보면 당시의 스크루볼코미디는 모두 로맨틱코미디지만, 그럼에도 ‘로맨스’라는 단어를 장르 이름에 부착하지는 않았다.

시작은 혁명적, 안주하는 현실은 아쉬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캐서린 헵번이나 로잘린드 러셀, 바버라 스탠윅과 같은 배우들이 이런 식의 코미디에 출연했을 때 영향력이 더 컸다. 위트의 성대결이라고 할 이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화려하게 여신화된 할리우드식 여자주인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의 캐릭터로서 일대일로 세계에 참여했다. 그 세계라는 것이 존재 자체가 괴상할 정도로 괴상한 논리에 의해 정신없이 움직이는 곳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 세계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 헵번/트레이시 코미디가 그랬던 것처럼 비교적 현실에 가까운 세계를 사는 현실적인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1950년대의 사내 정치가 <데스크 세트>와 같은 것이었다고 순진하게 믿을 필요는 없다. <프로포즈>의 출판사 묘사가 사실적이라고 우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지금 와서 비교해보면 지금의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는 당시 스크루볼코미디가 가졌던 혁명성이 없으며 그것은 당연하다. 당시에는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할 영역이 지금은 안주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후 20년 가까운 시기를 지나오는 동안 로맨틱코미디의 영역은 기성품화되었다. 우리에게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그 기성품화된 성격 때문이다. 이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명칭은 이전처럼 배우들의 입지를 강화해주지는 못한다. 멕 라이언과 샌드라 불럭은 적절하게 흐름을 타고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찾았다. 그중 불럭은 40대 중반인 지금도 꾸준히 불럭표 영화를 만든다. 그 자리가 캐서린 헤이글이나 아만다 바인스와 같은 새로운 배우들이 편안하게 안주하며 팬들을 끌어모을 만한 자리이긴 할까? 20년은 긴 시간이다. 배우이건 장르이건 슬슬 변화를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