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블록버스터의 숨결이 사그라지자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의 공습이 시작됐다. 샌드라 불럭의 <프로포즈>와 캐서린 헤이글의 <어글리 트루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프로포즈>는 북미에서 어마어마한 흥행성적을 올리며 꺼져가던 샌드라 불럭의 경력을 되살려냈다. 캐서린 헤이글의 <어글리 트루스> 역시 북미에서 1억달러에 가까운 예상 밖의 흥행성적을 기록 중이다. 지난 20여년간 전성기를 맞이한 뒤 점점 장르의 관습 속에서 헛발질을 계속하던 이 서브 장르가 되살아난 것일까, 혹은 죽기 전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것일까. 분명한 건 지금이 바로 80년대 시작된 현대적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를 정리할 시간이라는 거다.
로맨틱코미디는 어떤 장르이며 어떻게 진화해왔나
로맨틱코미디는 우리의 실제 연애생활에 해악을 끼칠까요? 2009년 1월자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의 “노팅힐 효과”라는 기사에 따르면 “그렇다!”고 합니다. 영국의 몇몇 대학교수들이 로맨틱코미디가 실제 연애에 끼치는 영향을 실험한 모양입니다. 왜 학교 지원금을 이런 연구에 써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어쨌든 홈스라는 선임학자가 말합니다. “로맨틱코미디는 사람들이 실제 연애생활에서도 비현실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로맨틱코미디를 본 사람들이 다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실험도 했습니다. 100명의 학생들에게는 <세렌디피티>를 보게 하고 나머지 100명에게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보게 했죠. 그들이 말합니다. “린치의 영화를 본 학생보다 <세렌디피티>를 본 학생들이 운명적인 사랑을 더 많이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비교체험 극과 극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실험은 한국의 어머님들로 구성된 미디어단체도 종종 하는 걸로 압니다. 결론은 아마 “호러영화를 보는 학생들이 향후 살인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정도겠지요. 여하튼 영국 학자들의 의도는 다분합니다. 로맨틱코미디는 운명적 사랑이라는 말도 안되는 종교를 신봉하는 여자들(그리고 일부의 남자들, 혹은 여자들을 따라서 극장에 들어간 남자들)이나 보는 영화라는 거죠. 그럼 건강한 영국 남자들은 뭘 보나요?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건강한 영국 남자들은 영화 따위 보지 않고 축구장에 갑니다. 극히 일부의 남자들은 화끈한 카체이스가 나오는 액션영화를 주로 봅니다. 요즘 들어 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전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는 그럼, 제이슨 본 때문일까요?
로맨틱코미디는 이리저리 채이는 장르입니다. 심지어 요즘 로맨틱코미디는 칙릿(Chick-Lit)이라 불리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계집애들이나 보며 울부짖는 영화란 소리겠죠. 그러다보니 이 장르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로맨틱코미디는 뭘까요? 간략하게 말하자면 로맨스 장르와 코미디 장르의 요소들을 취합해서 만든 일종의 서브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해놨습니다. “두 주인공이 첫 만남 뒤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하거나 대립을 겪고는 결국 다시 합치게 된다는 이야기. 대부분의 로맨틱코미디들은 관계의 중요함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그렇다면 장 비고의 <라탈랑트>(L’Atalante, 1934)도 로맨틱코미디일까요? 한 미국의 영화 사이트는 최고의 로맨틱코미디 1위로 장 비고의 <라탈랑트>를 뽑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현대적 로맨틱코미디와 <라탈랑트> 사이에는 조금 불안한 다리가 있을 겁니다.
속사포 대사로 승부하는 스크루볼코미디가 원조
로맨틱코미디의 원조가 30년대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스크루볼코미디(Screwball Comedy)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스크루볼코미디는 성격과 계급이 다른 남녀가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빠르고 위트 넘치는 대사로 표현하는 장르입니다. 스크루볼코미디는 이른바 발성영화 시대의 창조물이었습니다. 말로 승부하는 스크루볼코미디는 무성영화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코미디를 멋지게 대체했지요. 많은 영화학자들은 시초를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1934)로 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 영화에는 우리가 스크루볼코미디로부터 기대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백만장자의 딸과 평범한 계급의 신문기자가 끊임없는 말싸움을 벌이다 결국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니까요.
스크루볼코미디가 대중화됨에 따라 초기 스크루볼코미디의 사회/계급적 갈등은 점점 옅어졌습니다. 대신 남녀의 성 대결에 더 확연하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루볼코미디를 포함한다면 로맨틱코미디영화 베스트에서 1위를 차지함이 마땅한 조지 쿠거의 <필라델피아 이야기>(1940)만 하더라도 프랭크 카프라의 초기작들보다 남녀의 대사발에 더 집중하는 편입니다. 스크루볼코미디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정서적으로 메마른 관객이 스크루볼코미디에 흥미를 잃었다지만, 더 큰 이유는 TV의 발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남녀의 속사포 같은 입씨름을 다루는 스크루볼코미디는 대사에 좀더 긴 호흡을 제공하는 TV에 어울리는 장르였으니까요. 스크루볼코미디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는 곳 역시 <윌 & 그레이스>나 <프렌즈> 같은 시트콤의 세계 속입니다.
그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대적 로맨틱코미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60년대 록 허드슨과 도리스 데이 영화들에서 원류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서브 장르는 확실히 80년대 이후의 산물입니다(우디 앨런의 <애니홀>(1977)이라는 고결한 선례가 있지만). 조너선 드미의 <썸딩 와일드>(1986), 게리 마셜의 <환상의 커플>(1987)이 이 장르의 기초를 닦고 롭 라이너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완벽한 형식적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후 로맨틱코미디는 20여년간 전성기를 이어오며 수많은 유형()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여배우()들을 할리우드의 여왕으로 등극시켰습니다. 이제 로맨틱코미디는 단순한 서브 장르를 떠나서 하나의 영화적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비할리우드 영화사의 진출도 잇따라
로맨틱코미디는 이제 할리우드만의 산물은 아닙니다. 90년대 후반에는 점점 진부해지는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에 상호 영향을 끼치며 장르를 진화시킨 영국의 워킹 타이틀이 등장했습니다. 기욤 카네와 마리안 코티아르가 주연한 <러브 미 이프 유 대어>(2003)나 오드리 토투의 <프라이스리스>(2006)처럼 프랑스도 할리우드의 영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어냅니다(한국은, 불행하게도 이 장르를 아직 한국화할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했습니다. 한국형 로맨틱코미디는 여전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의 민망함과 강남을 맨해튼으로 착각하는 촌스러움 사이의 어딘가에서 방황 중입니다).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는 가벼운 장르입니다. 30년대 스크루볼코미디(심지어 60년대 록 허드슨/도리스 데이 영화)들이 가졌던 영화적 근심은 거의 없습니다. 현대적 로맨틱코미디는 일반 여성 관객의 구미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공장 조립품의 향취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로맨틱코미디는 각각 다른 시대,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의 환상을 공유하는가를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휴일>(1953)과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2004)은 50여년 만에 판타지의 대상이 공주에서 왕자로, 능동적인 주인공이 남자에서 여자로 변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샌드라 불럭의 <프로포즈>는 고전 스크루볼코미디의 성적인 주종관계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영화입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애 딸린 사별한 유부남의 로맨스를 볼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나쳤지만 사실 꽤 잘 만들어진 청춘로맨스 <우리 사랑일까요?>(2005)는 수백년 뒤 1990년대 X세대라 불리던 젊은이들의 문화와 행동양식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료로 남을겁니다.
<프로포즈>, 관습의 종말 될지도
물론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는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한 기운이 역력합니다. 샌드라 불럭 역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미국에서 거둔 <프로포즈>는 사실 지난 20여년간 개봉한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의 관습을 모조리 가져와서 짜맞추어낸 듯한 영화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직장 내 주종관계, <스위트 알라바마>의 귀향 로맨스, <그린카드>의 위장 결혼이 고전 스크루볼코미디의 오마주와 뒤섞여있습니다. 어쩌면 <프로포즈>는 관습적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의 마지막 불꽃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로맨틱코미디라는 대중적 장르의 힘은 여전하며, 이 서브 장르 역시 꽤 흥미진진한 내부 실험을 계속 진행해왔습니다. 도리스 데이/록 허드슨 영화들을 거의 완벽하게 패러디한 르네 젤위거의 <다운 위드 러브>(2003), 작가주의 로맨틱코미디라 할 만한 <펀치드렁크 러브>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장르의 관습 속에 머물면서도 장르의 관습을 벗어버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는 고전으로 남을 만한 장르의 걸작입니다. 주드 애파토우의 <사고친 후에>와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는 할리우드 스토너코미디(Stoner Comedy: 대마초에 전 루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남성코미디, 요즘은 그냥 루저들이 등장하는 코미디를 지칭하기도 한다)와 로맨틱코미디를 합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로맨틱코미디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이름이 바뀌겠지요. 20여년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사라진 스크루볼코미디가 사실은 현대적 로맨틱코미디의 기초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몇 십년 뒤에는 로맨틱코미디를 대체하는 새로운 단어를 누군가가 발명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 로맨틱코미디들을 너클볼코미디나 자이로볼코미디라고 부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름이 어찌되었건 그 장르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로맨스’와 ‘코미디’일 건 분명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한 <씨네21> 기자가 말합니다. “로맨틱코미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재미있게도 한창 브란젤리나에 시달리던 제니퍼 애니스톤도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인생은 웃겨요. 코미디, 드라마, 액션,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죠. 왜 그저 로맨틱코미디일 수는 없는 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삶은 그저 로맨틱코미디일 수 없는 건지. 어쩌면 그런 체념이 우리를 로맨틱코미디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잡아채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