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에 슈퍼컴퓨터가 도입되고 위성사진이 실시간으로 분석되는 오늘날, 날씨예측과 기후변화 관측은 과학자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연구주제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 기상청의 일기예보 정확도는 84% 정도. 최고의 날씨예측시스템을 보유한 미국과 영국도 87%를 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시라. 우리나라에서 비나 눈이 오는 날은 1년 365일 중 겨우 80일 내외. 시간단위로 좀더 잘게 나눠보면 강수 시간대는 1년 8760시간 중 10%가 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상청 예보관이 1년 내내 무조건 ‘비가 안 온다’고 예측할 경우에도 일기예보 정확도는 90%가 넘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과학자들은 비싼 장비와 인공위성까지 동원하고 온갖 데이터 분석기법을 도입해 오히려 날씨예측정확도를 85% 이하로 깎아먹는 걸까? 8할 이상의 정확도를 가진 날씨예측시스템은 왜 종종 우리를 비 맞도록 골탕 먹이는 걸까?
자연이라는 이름의 공포
‘84%의 일기예보 정확도’에는 사실 함정이 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맑은 날은 잘 예측하지만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잘 못 맞힌다. ‘맑은 날씨’를 예측하는 정확도는 무려 95% 수준. 그러나 비나 눈이 올 시간대를 예측하는 것은 정확도가 30% 내외로 뚝 떨어진다. 게다가 ‘구름 사진’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홍수나 폭설 같은 재난을 예측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 바로 이 지점에서 할리우드의 모든 ‘자연재난영화’는 시작된다.
<투모로우> <대홍수> <볼케이노> <단테스피크> <하드 레인><퍼펙트 스톰> <일본침몰> <코어> <딥 임팩트> 그리고 <아마겟돈>. 1990년대 중반 <트위스터>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에선 여름마다 자연재난영화가 관객을 찾았다. 80년대 컴퓨터 기술의 진보 덕분에 비약적으로 발전해온 특수효과 기술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 한동안 골몰했다가(<E.T.> <어비스> 등을 보라), 1990년 중반부터는 ‘전혀 특수효과가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련된 장면 연출까지 가능해졌다. 온갖 특수효과를 덕지덕지 발라서 마치 ‘자연현상을 그대로 찍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홍수와 폭설, 지진도 부족해 소행성 충돌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자연재난’이 화면 가득 장대한 스펙터클을 제공하며 SF영화의 단골소재가 됐다.
게다가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 현상이 지구인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오늘날, 자연은 그 어떤 공포영화 속 몬스터보다 더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가 돼버렸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에 따르면 홍수와 폭풍우, 지진 등 대규모 자연재해의 연간 발생 건수는 1980년 120건에서 2006년에는 500여건으로 4배 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관객에겐 ‘이상기후가 몰고올 파국에 대한 불안’이 이미 내재된 상태. 특별히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새 자연재난은 ‘일어날 법한 파국’이 된 지 오래다(이런 안일함 때문에 대부분의 자연재난영화는 드라마가 약하고, 특수효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인과관계.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왔다가 휩쓸고 지나가버리고 가면 그만인 자연재난을 정교한 플롯 안에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자 캐릭터를 눈여겨보라
기후변화를 소재로 한 다른 할리우드 자연재난영화들과 비교해 영화 <해운대>는 상황이 더 극적이다. 영화에서 100만 피서 인파가 몰린 부산 해운대를 덮친 것은 거대한 지진해일 ‘쓰나미’(Tsunami, 해안을 뜻하는 ‘쓰’와 해일을 뜻하는 ‘나미’가 결합된 일본어). 폭풍해일과 달리 지진해일인 쓰나미는 해저 지판이 상하운동을 하면서 지진이 발생해 생겨난 해일로서, 지진 예측은 날씨 예측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점에서(날씨 예측은 ‘대류공식’(Navier-Stokes equation)을 풀면 어느 정도 단기예측이 가능하지만, 지진은 예측할 만한 공식조차 없다!), 또 전조도 눈에 띄지 않으며 전파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일본 열도의 해저지진이 쓰나미를 몰고 올 경우, 한반도를 덮치는 데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생한 지진해일의 최고 높이는 무려 250m. 영화 속 지질학자 김휘(박중훈) 박사가 말한 ‘메가쓰나미’가 아마 여기에 해당할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는 주요 지진대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 쓰나미의 직접적인 공격대상은 아니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도 지진해일 피해에 대한 기록이 여럿 있었던 걸로 보아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도 환경과 경제를 선순환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야심찬 목표를 위해, 최근 주목받는 IT·BT·NT 등을 활용한 ‘27대 핵심 녹색기술’을 선정해 매년 1조4076억원을 투자하는데, 그중 ‘기후 관측과 날씨 예측, 자연재난방지 기술’이 핵심 녹색기술 중 하나다. 전형적인 카오스 시스템인 날씨와 기후를 예측하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단기적인 예측과 철저한 재난방지기술이라도 잘 갖춘다면 매년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로부터 오는 태풍을 몸으로 막아내는 데 유용하리라 기대된다.
<해운대> 같은 자연재난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묘미 중 하나는 자연재난영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과학자’의 역할과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일이다. 자연재난영화에서 과학자들은 늘 파국을 미리 예측하고, 코웃음치는 정부와 시민들에게 이를 열심히 설파한다. 위기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며, 심지어 소행성의 경로를 바꾸고 자폭까지 하는 등 스스로 ‘영웅’이 되기도 한다. 21세기 과학기술의 시대에, 자연재난영화 속 과학자들은 거대한 재난에 처절하게 맞서 싸우는 ‘모비딕의 에이헙’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기존 SF영화에선 과학자들이 지구를 정복하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미친 과학자’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크게 대조적이다).
<해운대>에서 과학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박중훈씨가 연기한 지질학자 김휘 박사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메가쓰나미를 예측했는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는 일본 열도와 환태평양 지진대의 해저지진을 모니터링하고, 해저지진이 몰고 올 해일의 크기와 방향, 속도 등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하지 않았을까 싶다. 재난방재청은 으레 그렇듯 ‘지질학적 통계로 봤을 때 쓰나미가 부산 해운대를 덮칠 확률은 없다’고 단언하며 김휘 박사와 각을 세운다(실제로 우리나라 재난방재청은 ‘재난 가능성’에 꽤 민감한 편이다). 그는 ‘메가쓰나미’를 예측하지만 결국 무력했고, 쓰나미의 공격 앞에선 인간적이지만 속수무책인 캐릭터였다.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었다. 지진해일이 너무 셌던 걸까, 아니면 대한민국 과학자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을까?
쓰나미의 고통,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500년 만에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최대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와 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와서 열악한 환경임에도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몰려든 3만여명의 인파가 개기일식 관측 지점에 빼곡히 모여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태평양 크기만한 달이 400배나 더 큰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광경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날마다 경험한다. 도시를 덮어버린 쓰나미, 건물을 날려버리는 트위스터,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소행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스케일의 자연현상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나게 영화를 통해 보면서 ‘자연의 경외감’을 체험한다.
방재기술 연구자들은 영화 속 ‘한스 울릭의 특수효과’가 할리우드 수준이냐 아니냐만에 열을 올리는 관객 속에서 ‘해운대의 실제 미래’를 불안하게 들여다본다. 과학자들에게 영화 <해운대>는 고마운 ‘우리 재난영화’다. 불가항력의 재난으로 인해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부산 해운대를 미리 상상하게 해주고, 그래서 감이 ‘팍!’ 오는 파국을 보면서 쓰나미의 고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해주었으니 말이다.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 더미들. 그 속에서 ‘월·E’와 이브처럼 사랑과 희망을 복구하는 설경구와 하지원, 우리의 두 주인공들. ‘SF는 현재를 위한 미래우화’라고 했던가. 오늘부터라도 ‘재난 뒤 피해복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리 예방할 궁리를 시작한다면 영화 <해운대>는 그 자체로 더없이 행복한 ‘해피엔딩’일 텐데.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에서 ‘의사결정의 신경과학’을, 문화기술대학원(CT)에서 ‘신경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예술을 아우르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