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완전 호감 지수 ★★★★ 사랑일까 스토킹일까 헛갈리는 지수 ★★★ 솔로 부대 분노 지수 ★★★★
20대 후반이 되도록 방송작가 지호(박진희)의 인생은 우울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봤고, 손대는 작품마다 애국가보다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마침내 방송국에서도 “자리 빼라”는 통보를 받고 돌아오던 날 지호는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그런데 이럴 수가, 차 주인은 지호가 10년 동안 그리워하던 첫사랑 민우(이기우)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지호는 얼떨결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민우는 내키지 않게 그녀의 임시 보호자가 된다. 한편 행방불명된 그녀를 찾아 헤매던 동네 소꿉친구 동식(조한선)은, 지호의 기억상실 소식을 듣자 그녀의 기억을 멋대로 조작하려 든다.
정정화 감독의 데뷔작 <달콤한 거짓말>은 <과속스캔들>과 더불어 2008년을 마무리짓는 한국영화계의 작고도 알찬 수확으로 기록될 만하다. 사실 <달콤한 거짓말>의 시놉시스만 봐도 당장 <당신이 잠든 사이에>부터 <하나와 앨리스>에 이르는 직접적인 레퍼런스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달콤한 거짓말>은 보란 듯 더욱 많은 닮은꼴 영화들의 인용을 과시한다. ‘브리짓 존스’를 떠올리게 하는 지호의 캐릭터부터 <수면의 과학>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수공 오브제들, <러브 액츄얼리> <천장지구> <러브레터>를 패러디하는 ‘<유주얼 서스펙스>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 기억을 잃어버린 청순가련 여주인공, 부잣집 ‘엄친아’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친구 사이의 삼각관계, 초라한 옷차림으로 참석한 청담동 파티장에서 당하는 망신, 결정적인 순간에 멋진 차를 부웅 몰고 와 먼지를 피우며 급정거하는 장면, “나 열흘 뒤에 영국으로 떠나” 등 어디선가 백번은 더 본 장면들투성이다.
이쯤 되면 뻔뻔하고 지루한 클리셰 퍼레이드라고? 놀랍게도 <달콤한 거짓말>은 장르에 대한 단단한 이해를 바탕으로 장르를 넘어서는 재해석에 이르는 반전을 보여준다. 설령 로맨틱코미디에서 ‘로맨스’ 부분을 그닥 즐기지 않은 관객이라 하더라도 이 영화의 ‘코미디’에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기억상실’에 대해서는 “아침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본 설정이라 나도 설마설마했어요”라고 눙치고 넘어가다가 “진실이란 거 별거 아니에요.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걸 믿고 또 믿으면 그게 진실이 되는 거예요”라고, 또 ‘오랜 친구를 사랑했네’ 부분에 이르러서는 “오래 있는다고 사랑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오래 있었던 거야”라며 선입견을 뒤집는 대사의 묘미를 보여준다. 절실한 감정이 실린 아이러니의 연속으로 빚어내는 코미디의 감각도 좋다. 치고 빠지는 리드미컬한 대사와 리액션의 배합, 촌스럽지 않게 매 장면을 마무리하는 편집의 호흡은 진부함을 친숙함으로, 한발 나아가 발랄한 재해석으로 무장시킨다. 지호의 거짓말이 탄로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조차 배신감과 분노에 떠는 장면 없이 깔끔하게 넘어가지만, 대신 그 이후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멜로장면에서 다소 지루하게 늘어지는 게 흠이다. 게다가 ‘오랜 사랑’이 ‘스토킹’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 소름끼치는 무언가로 받아들일지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달콤한 거짓말>은 한국 TV드라마를 점령한 클리셰(불치병과 출생의 비밀만 안 나왔다뿐이지!)를 썩 괜찮은 감각으로 업그레이드한 버전이라는 칭찬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발군의 코믹 감각을 보여주는 박진희의 연기는 <달콤한 거짓말> 최대의 수확이다. 김정은이나 김선아가 <재밌는 영화> <가문의 영광> <위대한 유산> <잠복근무> 등에서 코미디와 로맨스를 결합시켰던 드문 개성을 박진희가 이어받는 순간이다. 기대치 않은 순간에 되도 않게 작렬하는 애교와 온몸을 던지는 슬랩스틱 개그. 자유자재로 변하는 목소리 톤과 얼굴 근육은 박진희의 차분하고 조신한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다.
tip/망나니 동생, 하릴없는 백수 친구, 땍땍거리는 경찰, 철가방 배달원 등 기존의 감초 캐릭터들도 각자의 명쾌한 캐릭터를 가진 채 영화의 결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커피프린스 1호점>의 ‘자뻑하림’으로 유명한 김동욱이 연기한 지호의 동생 지훈, <조폭마누라> <대한민국 헌법 1조>의 최은주가 맡은 백수 친구 은숙은 단연 발군이다.
정정화 감독, “오버가 아니라 진심이어야 했다”
-온갖 클리셰들을 비틀어야 하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뻔하고 식상한 요소와 어떻게 싸우는가가 제일 문제였다. 장르 자체의 특성상 이야기 전개가 관객의 예상을 앞서나가기 힘들다. 결국엔 관객의 감정을 앞서나가야 한다고 계산했다. 웃긴 장면이다 싶으면 캐릭터들은 진지해지고, 진지하다 싶으면 난데없이 코믹하게 치고 나오는 리듬감을 잡으려 노력했다. <달콤한 거짓말>을 준비하면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같은 1940년대 영화부터 시작하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로맨틱코미디를 전부 구해 봤다. 그렇게 집중적으로 학습한 다음, 모두가 봤을 법한 익숙한 장면을 어떻게 다르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수많은 개그 장치들은 배우들의 애드리브도 많이 들어간 건지. =개그 요소들은 시나리오에 전부 있는 그대로다. 선배가 조언한 대로, 시나리오 작업 단계부터 앞에 거울을 놓고 내가 직접 매 대사를 연기해보면서 썼다. (웃음)
-배우들의 연기 지도는 어떻게 했는가. =요즘엔 슈퍼히어로물도 결국 현실로 다 돌아오지 않았나. 1년 동안 여러 가지 버전으로 시나리오를 써봤지만, 최종본은 다시 현실적인 톤으로 썼다. 배우들에게도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추천하면서 웃기려고 하지 말자, 이건 절대적으로 진심이다, 전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조금이라도 당위성이나 타당성이 없으면 하지 말자고 당부했다. 조금이라도 오버한 기색이 보이는 컷들은 전부 편집에서 잘랐다. 그리고 배우들과 리딩과 리허설을 최대한 많이 가지면서 본인 안에 있는 부분들을 반영하려 했다. 아예 비디오로 리허설 장면을 촬영하고 다같이 보고 분석하는 시간을 통해 톤을 잡아갈 수 있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을 꼽는다면. =시나리오 작업할 때부터 다들 코끼리 환상신을 빼자고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는 절대 다시 하지 말라고 했다. 회사쪽에도 “다른 건 몰라도 그 장면은 절대 뺄 수 없다”고 버텼다.
-아쉬운 점이라면. =프로덕션 시간이 촉박해서 콘티에 들인 시간이 1주일에서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촬영할 때도 기본적인 컷밖에 못 찍은 것 같다. 요즘은 다들 미국 드라마를 많이 보니까, 좀 화려하고 정교한 컷을 찍더라도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것 같지 않던데. 좀더 영화적인 재미를 줄 컷을 찍을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쉽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젊은 사람들의 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트>처럼 담배 물고 심각한 청춘이 아니라, <기사라즈 캐츠아이>처럼 현실은 힘들어도 밝게 살아가는 마이너한 청춘들의 이야기 말이다. <달콤한 거짓말>에서의 동식과 지훈 캐릭터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