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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불황에 타오르는 영감

<자전거도둑>에서 <반칙왕>까지 어려운 시대에 빚어진 미국·이탈리아·한국의 명작들

불경기가 각종 파산의 행렬을 줄줄이 달고 또다시 나타났다. 유럽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라디오에서 변덕스런 일본 주식시장 소식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 온종일 미국의 주가변동 상황을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그다지 반길 만한 현상이 아니다. 때로는 불경기를 타고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걸 아는 정신 나간 영화광들만 빼놓고.

영화 역사에 남을 만한 한 가지 장면을 들라면 그중 하나는 중절모에 대나무 지팡이가 나오는 장면이다. <황금광 시대>에서 헌 신발로 탕요리를 만드는 불황기 뜨내기의 대명사, 바로 채플린이 나오는 장면 말이다. 하지만 채플린 하나만이 아메리카 대륙의 빈민들을 대변했던 건 아니다. 존 포드(<분노의 포도>)로부터 제리 샤츠버그(<니들 파크에서의 공황>), 혹은 존 카사베츠(<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거쳐 존 휴스턴(<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에 이르는 1970년대의 몇몇 거장들까지, 그야말로 이 슈퍼맨 민족은 소외된 이들을 촬영할 때만큼은 말 그대로 슈퍼맨답다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화들 역시 전후의 폐허에서 탄생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자전거 도둑>으로 전쟁의 폐허 속을 휘젓고 다녔고, 로베르토 로셀리니도 <독일 영년>에서 전쟁의 잔해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그렇다면 대처 총리 시절의 영국영화나 축제 분위기 넘치는 스페인의 모비다(프랑코 독재정권 이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회문화운동-편집자) 역시 같은 지점에서 언급할 수 있겠다. 다들 실업률 20%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니 말이다.

정통 한국영화는 1950년대 말 가족의 불황기 속에서 탄생했다.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 강대진 감독의 <마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등 한국의 대표적 멜로드라마는 모두 ‘영년의 서울’같은 진흙탕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좀더 최근 영화를 언급하자면 한국의 새로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시아를 휩쓸었던 불황으로부터 분출했다. 언뜻 보기에 경제위기 분위기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쉬리>에 나오는 엄청난 화기(火器)의 대함대 역시 예의 (분단 상황으로부터 오는) 한국인들의 피해망상증을 미묘하게 건드리면서,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대중에게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다. 불경기는 또한 정지우 감독이 <해피엔드>를 만드는 매우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지금은 까맣게 잊혀졌지만 <해피엔드>는 현대 한국영화가 만든 걸작이다. 정 감독은 이 작품에서 자폐증에 빠지는 환상, 살인자로 변신한 한 실직자가 직장과 가족, 일체의 외부세계와 하나하나 관계를 끊게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황은 장선우 감독에게도 영감을 주는데, <나쁜 영화>에서 장선우 감독은 하층민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카메라를 잠수시킨 뒤 감춰진 한국의 모습을 대형 스크린 위로 끌어올린다. 또한 뛰어난 총평가 형식의 대작 <박하사탕>에서 이창동은 한 남자의 재정적인 몰락, 아니 인생 그 자체가 몰락하는 것을 거의 생중계하듯 생생하게 재현한다. 또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김지운의 <반칙왕>은 낮에는 고용인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밤이 되면 가면을 쓰고 사는 주인공을 통해 재기의 슬로건 ‘파이팅 코리아’가 지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나는 처음으로 영어버전 한국영화 사이트를 개설했던 달시 파켓과 함께했던 산책이 생각난다. 긴 종로의 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파산 직전의 비디오 가게에서는 한물간 듯한 VHS 비디오테이프를 무더기로 세일판매하고 있었다. 그건 한국의 재벌그룹들이, 그들이 새로 개발한 DVD 플레이어를 돌아가게 만들어줄 한국영화계에 벌써 투자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광경이었다. 이상하게도 VHS 비디오테이프는 그 모든 시대와 더불어 깡그리 사라질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해 가을은 쌀쌀했고 우린 그 황폐한 현재의 어딘가에 미래가 이미 뿌리를 내렸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번역 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