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은 3부로 나뉜 80분간의 다큐멘터리이다. 1부는 광둥 화남의류공업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을 담고 있다. 2부는 중국의 저명한 의상 디자이너 마커의 작업과 파리에서 열린 그녀의 작품 전시회를 다루고 있다. 3부는 지아장커의 고향이자 그의 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간인 산시(山西) 펀양의 가난한 재단사들과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카메라가 포착한 현실(인물과 공간과 상황들) 자체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의 충실한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무용>도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지루한 반복으로 점철된 대규모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적 노동과 침묵, 개별성과 기억이 삭제된 공장생산품으로서의 옷이 아니라 한 장인의 손길과 자연의 시간이 개입하는 창작으로서의 옷을 추구하는 한 의류 예술가의 활동, 그리고 몰락해가는 재단사 혹은 몰락해 광부가 된 전직 재단사의 일상. 옷을 제재로 느슨하게 이어진 이 세 가지 풍경은 옷이라는 정물에 새겨진 중국의 맹렬한 소비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다. 옷은 계급의 징표이고, 동시대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며,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예술가의 개인적 비전을 담을 수 있는 매체이다.
그런데 사정은 좀 복잡한 것 같다. 세 에피소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찍혀져 있기 때문이다.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더라도 시선, 대상과의 거리, 카메라의 움직임, 그리고 편집이 조금씩 다르다. 게다가 세 에피소드는 선형적으로 배열돼 있지만 동시에 각자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세 가지 대구가 성립하는 것이다. 1부와 2부, 2부와 3부, 1부와 3부. 또한 1, 2, 3부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일종의 변증법적 전개의 양상으로 진행된다. 지아장커는 형식주의에 빠진 적이 없으며 <무용> 역시 그러하지만, 그는 여기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한계까지 밀고 간다. 물론 그 동력은 형식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려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그는 비슷한 고민과 시도를 전작인 <동>과 <스틸 라이프>에서 한 적이 있다. 그는 싼샤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싼샤의 노동자를 그리는 화가 리샤오동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동>에 담았고, 그것을 찍으면서 모종의 결단 끝에 픽션인 <스틸 라이프>에 배우자를 찾으러 온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시 인용하자면 지아장커는 그때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씨네21> 575호)
이 인터뷰에서 그는 “당연히 <동>과 <스틸 라이프>는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괴물과도 같은 욕망의 구조물인 싼샤의 댐이 역사적 기억과 2000년간 이어져온 생활공간 그리고 수려한 자연을 한꺼번에 끝없이 폐허화하는 장소에 동시에 도착한 실존하는 한 예술가와 가상의 두 노동자의 이야기. 함께 볼 때 두 영화는 관객에게 어느 자리에서 세상을 볼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라고 정성일은 말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동>은 별로 말해지지 않았고, 픽션 <스틸 라이프>는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래로 끊임없이 말해져왔다.
이를테면, 올 4월 말에 나온 <씨네21> 창간 13주년 기념호에서는 이 영화가 국내외 100여명의 감독, 평론가가 뽑은 동시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5월12일 싼샤 댐으로부터 100km 떨어진 쓰촨성에서 5만여명의 중국인을 몰살시킨 대지진이 일어났고, 싼샤 댐이 그 원인일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면서 나는 이 영화가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느새 위대한 예언자의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신앙 혹은 걷잡을 수 없는 물질적 욕망이 빚어낸 괴물, 그러니까 또 다른 형상의 싼샤 댐이 한반도를 덮쳐오고 있는 지금, 그 예언이 뼈저리게 동시대적이며 전지구적인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더욱더.
반응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동>과 <스틸 라이프>를 나란히 놓으면 어딘지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것은 장르의 차이에서도 부분적으로 기인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동>의 리샤오동이 싼샤의 공간과 그 곳의 인물의 구체성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싼샤에서 11명의 남자 노동자를 그린 뒤에 곧 방콕으로 가서 11명의 여성을 그린다. 자기 그림의 주제가 음양의 조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아장커의 관심사는 고도로 추상화된 주제가 아닌, 그 무너져가는 공간에서 끝내 버텨내고 있는 인민들의 개별적 몸이었다. 앞선 인터뷰에서 그는 “싼샤의 강물이 흘러서 방콕까지 흘러가는 것처럼 물을 따라 두 장소를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싼샤에 남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동>과 <스틸 라이프>의 관계는 마주 보고 있는 대구라기보다 선후 관계, 즉 추상적 조화를 좇는 예술가의 시선과의 결별을 통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에 가깝다.
여기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두편을 나란히 놓을 때 거대한 하나의 질문이 완성되는 또 다른 사례(더 거슬러 올라가 알랭 레네의 <스모킹>과 <노 스모킹>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1993년에 나온 이 두편은 시선의 차이가 아니라 작은 행위의 차이가 초래하는 결과의 거대한 차이에 주목한다). 완전히 동떨어진 문화권에 그리고 전혀 다른 세대에 속한 이스트우드와 지아장커가 거의 같은 시기에 하나의 제재를 서로 다른 시선에 담은 두편의 영화를 동시에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동시대 영화의 자리를 숙고하도록 요청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 해도(특히 시간적 배경의 면에서), 두 영화의 주체는 이오지마 전투라는 하나의 상황 안에서 정확히 마주 서 있다. 한편의 서사의 주체가 다른 편의 서사의 주체를 결코 만날 수 없고 따라서 개별적 서사 ‘안’에서 타자는 결코 말해질 수 없지만,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두 서사의 ‘사이’에서 양자가 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여기에서 생략된 시선은 이 두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의 시선이며, 그 시선은 개별적 서사의 경계를 넘어 일종의 전지성을 얻는다. 한 상황 안에 있는 두 주체의 이야기가 두편의 영화로 나눠져야만 할 때 그 분리 자체는 매우 비관적인 전언을 담고 있지만, 우리가 두 영화를 나란히 보고 두 서사의 주체를 모두(심지어 동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두 주체의 시선이 통합된 상위주체(감독)의 전지적 시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며, 그 순간 대화의 시작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동시에 잉태된다.
그러나 지아장커는 비관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최종적으로 안도케 할 감독의 안정적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질문한다. 그는 <스틸 라이프>를 만들면서 대상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 ‘이야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도 싼샤의 내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외부자의 시선(오래전에 싼샤로 떠나온 배우자를 찾으러 온 외지의 두 남녀)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만으로도 어딘지 불완전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무용>은 <동>과 <스틸 라이프>에 이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그 대상만큼 시선이 중요한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집단적이며 사적인 적대와 마주친 1부
1부의 첫 장면은 작업 중인 화남의류공업 노동자들의 모습을 카메라가 공장의 창문 밖에서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수평트래킹으로 담아낸 숏이다. 공장 벽을 이용한 암전 컷 다음엔, 공장 안으로 들어간 카메라가 더 가까이에서 이번엔 이동과 수직이동을 함께하며 노동자들의 분주한 손길을 담는다. <스틸 라이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이 카메라워크는 1부의 카메라 움직임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무용>의 초반 트래킹 숏들은 이상하리만큼 답답하다. 숏의 끝에서 놀라운 울림의 순간에 종종 이르던 <스틸 라이프>에서와는 달리 1부의 트래킹 숏은 유사한 대상들의 진열, 지루한 반복처럼 보인다. 노동자들은 노동에 몰두하고, 카메라는 천천히 그들 곁을 지나가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공장식 의류 제작공정의 한 단계를 무심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 외엔 없다. 이 양상은 노동자 개인의 식기들이 놓인 긴 식기보관대를 비추는 수평트래킹 숏에서도 반복된다. 그 숏의 끝에 카메라는 ‘오늘의 메뉴’가 상단에 붙어 있는 10여개의 배식구에 이르지만,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먹는 음식을 보지 못하며, 그들이 조금씩 다른 식기에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담아 먹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더 알 수가 없다. 깊이가 부재한 공간에서의 동질적인 대상의 끝없는 도열. 그 점에서 이 카메라워크는 차라리 고다르의 <주말>의 유명한 자동차 트래킹 숏을 떠올리게 한다.
노동 대상으로부터 소외된 단순 반복 행위로서의 노동, 무감각한 몸짓, 일원화된 생활, 평면적인 삶. 1부의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은 개별 노동자들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징후이며, 수평트래킹은 비슷한 대상들을 하나의 숏 안에서 평면적으로 나열함으로써 그들의 개별성을 지우고 익명의 기능 혹은 부속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무용>을 끝까지 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지아장커는 왜 1부에서 2부와 3부에서와 달리 대상에게 즉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라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일까. 사실 1부에서 보여지는 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는 인터뷰에서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1부는 일종의 실패의 기록처럼 보인다. 대규모 공장 안으로 처음 들어간 지아장커의 카메라를 맞은 것은 노동자들의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이다. 혹은 은밀한 적대감이다. 1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점심 시간에 식당에 몰려온 노동자들 중 한명인 어떤 청년이다. 그는 여자 친구인 듯 보이는 동료 노동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카메라를 쏘아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 카메라를 든 사람과 싸울 태세다. 감정을 잃어버린, 노동기계와도 같은 무표정의 행렬, 그리고 그 무표정 안에 잠복한 정체불명의 분노. 그 앞에서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그들의 개별성 혹은 내부에 이르는 길을 찾기를 포기한 것 같다. 작업장을 다시 비추는 장면에서 “나 때문에 다시 울지 않기를 바라”로 시작되는 연가가 울려나올 때, 그 감미로운 노래와 노동자들의 변함없는 무표정과 기계적인 동작(이 음악이 외재적 사운드이므로 그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의 기묘한 부조화는, 그 실패의 자기 은유처럼 보인다. 1부의 유일한 위안의 순간은 차라리 공장 내 보건소 장면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노동자들의 음성(의사에게 자신의 증세를 설명하는)을 가까이서 듣게 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카메라를 어딘지 불편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들 주변을 조심스레 배회하던 카메라는,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 이르러 보건소 의사가 막 자리를 비운 책상 위를 비춘다. 청진기 통과 손전등. 놀랍게도 이것이 진료기구의 전부다. 이 무심하고 삭막한 공간에선 정물들마저 자신의 자리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다시 공장 내부로 들어간 카메라는 완성된 옷이 옷걸이에 진열되는 장면에 이르고, 우리는 그 옷에 붙은 ‘예외’(exception)라는 상표를 보게 된다.
개인적이며 공적인 호의로 다가서는 2부
2부는 모든 면에서 1부와 대조를 이룬다. 옷을 만든다는 행위는 같지만, 중심 인물은 의상 디자이너 마커라는 개인이고, 그는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개인적이고 창의적으로 노동하며, 그가 만드는 옷 ‘무용’(無用)은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독창적 예술품으로 인정받는다. 카메라는, 공장보다 작은데도 공간의 깊이가 드러나는 그의 작업실 및 거주공간과 잘 가꿔진 정원을 여유있게 오가며, 그가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광경을 담고, 자신이 만든 고급 의류 브랜드 ‘예외’에서 오늘의 예술적 브랜드 ‘무용’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정돈된 신념을 듣는다. 그리고 2007년 2월25일 파리에서 열린 그의 작품 전시회까지 담아낸다. 그는 전적인 자율성과 창의성을 지닌 완전한 개인이다. 1부에서 우리를 숨막히게 했던 모든 것들이 여기선 전부 해소되고, 2부는 대상과의 만남에 성공한 온전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영화의 제목이 ‘무용’ 아닌가.
그런데 이 성공이 함정이다. 그 성공의 모든 면들이 의심할 만하다. 먼저, 마커의 성공의 정체는 무엇인가. 지아장커는 2부의 어느 장면에서도 폄하의 뉘앙스를 담지 않았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커와 그의 작업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옷에 어머니의 기억과 자연의 시간과 창작가의 개별성을 담으려 한다. 그것을 위해 그는 옷을 쓸모없음(無用)의 지점까지 밀고 가 온통 정신적인 것으로 채워버린다. 그 옷은 전시회의 모델들이 불평하듯 입기에 “너무 무겁고 너무 큰” 덮개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옷으로서의 유용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옷도 여전히 옷일 수 있는가, 라고 지아장커가 항의하고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대신 그는 ‘무용’이라는 옷이 담으려 한 것을 숙고한다.
그의 숙고를 명료하게 알게 되는 것은 3부에서이지만, 여기서도 질문할 수 있다. 마커는 자신이 만든 옷을 흙에 파묻어두었다가 며칠 뒤에 꺼낸다. 같은 옷이라도 흙이 다른 문양과 질감을 빚어내며 이것이 완성품이 된다. 최초의 구현은 창작가가 하지만 자연의 질료와 시간이 그것을 완성케 한다는 이 훌륭한 발상은, 얼마간 의심스러운 것이다. 엄격하게 선택된 뒤 파리에까지 공수되어온 흙이 자연의 시간과 도대체 어떤 내면적 연관이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것이 삶의 기억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파리의 ‘무용’ 전시회 장면에서 지아장커의 숙고가 심각한 회의에 이른다고 나는 느꼈다. 자연의 시간과 삶의 기억을 담았다는 중국의 옷이, 주하이도 펀양도 아닌 머나먼 파리에서 철저히 인공적으로 설계된 무대 위에 전시되고 서양 관람객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는다. 그 옷은 미끈한 서양 모델의 알몸 위에 입혀질지언정 결코 중국 인민의 왜소한 몸 곁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마커가 손을 흔들며 카메라를 보고 미소 지을 때, 지아장커는 ‘무용’에 자신의 영화를 정확히 겹쳐놓는 것처럼 보인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유럽의 거대 영화제에서 중국 인민의 고단한 삶을 담은 자신의 영화가 고귀한 예술로 상찬되는 상황을 이 장면이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부의 다큐멘터리로서의 표면적 성공은 대단히 미심쩍은 것이다. 그 성공을 가능케 한 마커의 카메라에 대한 지극한 호의와 성실은 그의 개인적 자질 이전에, 저명한 의상 디자이너가 자신의 예술을 조명하려는 저명한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이해관계가 필요로 하는 태도이다. 마커에게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파리의 전시회와 같은 계열에 속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아장커의 의도된 편집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커는 옷에 새겨진 만든 이와 입은 이의 개별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자기 삶의 사적인 영역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실은 마커가 지향하는, 천편일률적인 산업사회의 규격화된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개인상은 그가 시장경쟁에서 성공한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은 각성과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질서의 효과이다. 마커는 사적으로는 계급적 질서의 수혜자이면서도, 공적으로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표상하려 한다.
1부와 2부가 정확히 맞서 있는 지점은 여기다. 1부의 다큐멘터리를 실패하게 만든 노동자들의 집단적 무표정과 은밀한 적대감이야말로 그들의 진정으로 사적인 태도이며(그들은 카메라가 자신의 고단한 생계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거나, 카메라가 환유하는 매스컴 혹은 공적 담론이 자신들의 편이 아님을 이미 체험했다), 2부의 한 예술가의 활달함과 개방성은 그의 공적인 태도인 것이다(그는 카메라가 공중에게 자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선전해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2부의 표면적 성공은, 공적인 태도의 딱딱하고 두터운 표면을 돌파하지 않는 한 1부보다 더 뼈저린 실패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집단적이며 사적인 적대, 개인적이며 공적인 호의를 거치며 두번의 실패를 경유한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잠시 머뭇거린 뒤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고원의 토착민의 생활을 직접 보면서 잃어버린 삶의 기억을 되찾겠다”고 말하며(이것은 자기 이국화의 전형적인 표현 중 하나이며, 지아장커가 비판해온 5세대 감독들의 미학적 태도를 연상케 한다), 떠나온 마커의 차에 동승했던 카메라는 황량한 벌판에서 갑자기 내린다. 이곳은 지아장커의 고향이자 그의 영화적 고향이기도 한 산시성의 펀양이다. 그리고 3부가 시작된다.
비로소 노동자의 표상이 아닌 실재에 다가서는 3부
3부는 처음부터 당혹스럽다. 갑자기 픽션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내린 곳에서, 비닐 봉지를 든 추레한 노인이 마치 카메라를 기다린 듯 서 있다가 카메라가 내리자 몸을 돌려 들판 너머로 걸어가는 첫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고 믿기 힘들다. 노인은 방황하던 카메라를 광산촌 마을로 안내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지아장커는 여기서 이야기를 동원하지는 않지만, 다큐멘터리의 일반적 원칙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그는 좀더 까다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다큐멘터리의 틀을 기조로 하되, 부분적으로 극영화식 연출과 편집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는 토니 레인즈와의 인터뷰에서 이 방식을 ‘조정된(arranged) 다큐멘터리’라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에 우리가 움켜쥔 어떤 현실에 대해 확신을 느끼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카메라로 담지 못한다면, 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요소들을 조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내게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핵심은 주관적인 판단이다. 현실은 가까이 놓인 카메라의 출현으로 왜곡될 수 있다.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지아장커는 은밀하게 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조정을 관객이 충분히 의식하도록 애쓴다. 3부의 첫신에 등장한 노인이 한 재단사 가게에 가서, 수선을 맡긴 바지를 찾는 장면은, 구태여 나눌 필요가 없는 숏들로 나뉘어져 있다. 카메라가 재단사 앞에 있는 숏과 뒤에 있는 숏을 매치컷으로 연결하며 연출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감독(혹은 촬영감독)의 질문하는 목소리를 등장시키면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더 강화하기도 한다. 3부는 그런 방식으로 재단사와 광부들의 일상을 별다른 체계없이 나열하고 있다.
나는 지아장커가 여기서 다큐멘터리의 혁신적 형식을 완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3부는 형식 면에서 어딘지 헐겁고 거칠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3부가 서로 상반된 1, 2부의 다음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으로) 딱딱하고 적대적이어서 조정이 불가능한 노동자들, (공적으로) 이미 스스로를 연출하고 있어서 조정이 무의미한 부르주아 예술가를 거쳐, 마침내 싼샤의 사람들과 조정이 가능해졌을 때 카메라는 인민의 표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민에게 ‘이야기’ 없이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형식의 불균질과 불안정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아장커가 이르려 한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도가 잊혀지기 힘든 순간들을 빚어낸다. 예컨대, 임신한 재단사는 술독에 빠진 남편을 구박한 뒤에, 재봉틀 앞에서 자신이 짠 아기 옷을 정성스레 매만지고 있다. 이 장면은 2부에서 마커가 자신의 옷 철학으로 삼는다고 말한 중국의 옛 노랫말 “어머니의 손길이 떠도는 아들의 옷”이 진정으로 누구에 의해 말없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당사자의 인터뷰를 보면 전혀 그렇게 느끼는 것 같지 않지만 마커에 대한 맹렬한 야유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장면. 전직 재단사였으나 싼값의 공장 의류 때문에 광부로 전업한 중년 남자와 그 아내와의 인터뷰를 끝낸 뒤(광부는 “아내는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쁘다”고 수줍은 듯 말했다) 카메라는 그의 집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비춘다. 아마도 화남의류공업 같은 대규모 공장에서 만들어졌을 법한 범상한, 그리고 수없이 입어 이제 낡아버린 제 각각의 옷들이 미풍에 조금씩 뒤뚱거리며 나란히 걸려 있다. 수평트래킹으로 빨랫줄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멈추면 마지막에 걸린 염색한 인민복 상의가 마침 불어온 바람에 부드럽게 몸을 돌린다. 공장의 옷걸이에 걸린 막 완성된 옷들을 비추는 1부의 질식할 듯한 수평트래킹의 변주이며 대구이다. 이 장면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데,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며, 마지막의 인민복이 카메라에게 인사하듯 움직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싸구려 공장 의류였을 테지만 이제 땀과 먼지와 흙이 깊이 배어들어 어느새 그들에게도 작은 역사가 새겨진 것이다. 지아장커는 정물이 말을 건네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3부 첫 장면의 노인이 그 뒤로 걸어갈 때, 앞에 버티고 선 황야의 세 광부도 잊을 수 없다(1부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던 공장 청년의 대구). 탄가루로 얼룩진 중년의 광부들이 정말 서부 사나이처럼 담배를 꼬나물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싱긋이 웃고 있는 이 장면은 매우 유머러스하고 정감이 넘친다. 얼마 뒤에 그들과 또 다른 광부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몸을 씻는 목욕탕에 카메라가 찾아간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가리지 않는다. 석탄가루로 시커멓게 변해버린 옷가지 밑에서 단단하지만 왜소한 검은 몸을 하염없이 씻어내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는 묵묵히 지켜본다. 옷에서 시작된 <무용>은 여기서 결국 몸으로 돌아온다. 1, 2부의 정(正)과 반(反)를 경유한 합(合)의 자리에 있는 3부에서 그 합의 중심에 인민의 몸이 있다. 그 자체로 평등하며, 열려 있고 노동의 흔적이 새겨진 몸. 마커의 차에 동승하던 카메라가 중간에 내렸을 때 그것이, 소비사회의 몰역사성의 반영이며 계급적 질서의 상징으로서의 옷에 대한, 정당한 저항에서 출발한 마커가 왜 인민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고 탈역사적인 자연성과 원시성을 향하는가에 대한 항의였음을 사후적으로 확인케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 이 대목에서 지아장커는 마커와 최종적으로 결별한다.
거칠지만 촉촉한 남저음에 실려 애절한 노래 <사랑의 노동>이 흘러나오고, 광부 부부의 뒤를 이어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며 웃통을 벗어 허공에 휘두를 때, 세 황야의 광부의 얼굴이 각각 클로즈업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옷에 새겨진 권력과 계급적 질서를 단숨에 벗어던지는 마취적 활력이 보는 이를 몽롱하게 만든다. 그러나, 음악은 그치고, 마지막은 가게가 곧 헐리게 된 또 다른 재단사가 묵묵히 미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틸트 업/다운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얼마 뒤면 그도 광부가 되어 검은 몸을 매일 씻어야 할 것이다.
지아장커는 <무용>이 예술가 다큐멘터리 3부작 중 두 번째라고 했다. 두 가지가 궁금하다. <동>과 <무용>에서 그는 두 예술가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의 자리를 반성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사적 친분과는 별개로) 미학적으로 결별한다. 3번째 예술가에게서 그는 다시 결별할 것인가, 아니면 미학적 동지를 발견할 것인가.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정말 궁금한 건 그가 <무용>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공장노동자들의 차가운 무표정을 어떻게 뚫고 그들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이다. 그가 대상과의 거리를 뛰어넘는 과정에서 때론 흔들리면서도 결국 비약적인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무용>의 형식적 균열도 어떤 비약의 전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