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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발견! 벨라 타르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한국 젊은 관객의 열기에 고무된 때문일까? 전주국제영화제 참석차 내한한 벨라 타르 감독의 열성 때문에 주최쪽은 꽤 난감한 눈치였다. 관객과의 대화를 두번만 할 예정이었는데 벨라 타르가 자기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마다 매번 찾아가 무대인사를 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이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예정에 없던 관객과의 대화인지라 통역자를 갑자기 어디서 구하겠냐며 골치아파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다. 벨라 타르의 영화들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은데다 감독이 자진해서 관객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겠다고 하니 프로그래머로서 흐뭇할밖에. 벨라 타르는 올해 전주의 최고 스타였다. 길에서 만난 민병훈 감독은 인사하기가 무섭게 “벨라 타르, 짱”이라 외쳤고 허문영 평론가는 <씨네21>에서 벨라 타르의 인터뷰를 길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영화 몇편을 보면서 나 역시 이 미지의 감독에 대한 환호는 당연하다고 느꼈다. 맘만 먹으면 웬만한 영화는 볼 수 있는 시대지만 벨라 타르는 진정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 감독이다.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오프닝은 벨라 타르 특유의 롱테이크로 이뤄져 있다. 카메라가 물 흐르듯 움직이며 이어지는 롱테이크가 벨라 타르의 유명한 스타일이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스스로 자기 영화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드문드문 의자가 있는 넓은 술집,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데 그중에 젊은 남자주인공이 있다. 술 취한 중년 남자의 권유로 그는 술집에 있는 사람들을 한명씩 불러세워 태양과 지구와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중앙에 있는 남자가 태양이며 그 주위를 지구인 남자가 빙글빙글 돈다. 그러는 동안 또 한 남자가 달이 되어 지구 주위를 돈다. 그들은 춤을 추듯 움직이며 자전과 공전의 이치를 보여준다. 문자 그대로 벨라 타르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중심에 어떤 인물이 있고 카메라가 위로 움직이면 상대편이 누구인지가 눈에 들어오고 다시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이면 그곳이 어디인지 드러나며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전체 상황이 보인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조금씩 세상의 형상을 보여준다. 벨라 타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어떻게 영화의 총체성 또는 복합성을 만드느냐의 문제다. 이번호에 실린 홍성남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가 카메라에 담기는 것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양이 있으면 주위에 지구가 있고 지구가 있으면 주위에 달이 있듯 인물을 둘러싼 상황과 공기와 질서가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하나둘 포착된다. 우주의 이치와 같은 원리로 이뤄진 영화. 스토리나 인물이 아니라 관계와 흔적과 떨림을 담는 영화. 자신의 영화는 영원성을 포착하려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벨라 타르는 아직도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적지 않은 관객이 벨라 타르를 통해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봤다는 뿌듯함을 공유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씨네21> 창간 13주년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리>와 <중경>의 관객 또한 발견의 기쁨을 만끽했을까 궁금하다. 장률 감독의 전작들처럼 두 영화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한 여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망종>과 <경계>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장률 영화의 진화를 목격한 관객이 <이리>와 <중경>의 서늘한 충격을 널리 전해주길 기대한다.

P.S.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야 해서 마음이 아프다. 13년간 <씨네21> 지면을 빛냈던 정훈이 만화가 이번주로 막을 내린다. “그만 해야겠어요”라는 정훈이 작가의 전화를 받았을 때 솔직히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그래도 계속 해주면 안 되냐”는 말을 하면서도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정훈이 작가는 “지쳐서 그래요. 이해해주세요”라고 말하며 “당분간 지방에 내려가서 쉬겠다”고 전했다.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 기색에 더는 잡지 못했다. 정훈이 작가가 푹 쉬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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