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폭발을 향해 달려가는 도시
“엄마, 난 점점 더 더러워져가고 있어”외국인들에게 북경어 강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쑤이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매춘여성을 상대한 혐의로 구속된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호출된 쑤이는
경관인 왕위의 호의로 아버지가 무사히 풀려나게 되자 그에게 몸을 허락한다.
왕위에게 여러 명의 애인이 있음을 알게 된 쑤이는 분노와 절망감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고
그녀는 결국 왕위의 권총을 훔치기에 이른다.
한편, 그녀의 수업을 듣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 중에는 “이리역 폭발사고”로 온 가족을 잃고 중국으로 온 한국인 김광철이 있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면들을 발견하고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던 쑤이는 그가 중국도 한국만큼이나 지겹다며 몽골로 떠난다는 말에 의지할 곳을 잃고 절망한다. 그녀를 옥죄는 현실 속에서 그녀의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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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 <경계>로 세계에서 주목 받은more
재중 동포 장률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전문적인 영화 교육은 한번도 받지 않았던 장률의 필모그래피는 그야말로 떡잎부터 실한 될 성싶은 나무다. 그가 감독으로서 처음 연출을 맡았던 단편영화 <11세>는 2001 베니스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아 신예 감독으로서의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첫 장편영화 <당시>는 밴쿠버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진출했고, 로카르노영화제, 홍콩영화제, 런던영화제, 전주영화제에 초청 받으며 일약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의 변두리에서 김치 파는 조선족 여성을 주인공으로 잔인한 삶의 애환과 절망을 표현했던 영화 <망종>은 장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로 2005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ACID상, 페사로영화제 뉴시네마상, 부산영화제 뉴커런츠상, 2006 프랑스 브졸영화제 대상, 바르셀로나 아시아영화제 대상, 벨기에 노보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투어스 아시아필름페스티벌 경쟁부문 대상 등 각종 영화제에서 그야말로 상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장률의 이름을 전세계에 각인시켰다. 여기에서 또 한번, 그의 세 번째 영화 <경계>는 2007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거장 감독으로 성장했다. 공개하는 작품마다 평단의 호평과 찬사 일색인 그는 천상 예술인이었다.
그리고 2007년 감독은 70년대 한국의 이리에서 있었던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접하게 되었고 이미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폭발 후의 도시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속도로 무질서하게 질주하는 도시를 함께 카메라에 담았다. 그것이 바로 <이리>와 <중경>의 시작이었다. <중경>은 정식 개봉 전 2008년 여름 시네마디지털서울에 초청되어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이리>는 현재 제3회 로마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다시 한번 그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세계인들 앞에 당당히 선보이게 되었다.
언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관계를 맺다!
“제 영화에는 베이징어, 지방말, 조선말, 중국말들이 항상 섞여 나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 사는 입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식으로 중경은 어쩐 영화냐고 묻는다면 언어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경>은 얼핏 보면 중국어로만 이뤄진 중국영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갖가지 언어들이 제법 등장한다. 한국어도 지방에 따라 지방색이 반영된 방언이 발달해 있지만 중국은 특히 지역이 넓다 보니 지방마다 특색 있는 언어들이 발달해 있다. 심지어 제주도 방언은 그 지역인이 아니고서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중국 역시 지역간의 방언으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차이가 심하다.
<중경>에는 북경어(표준어), 중경 방언, 한국어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각기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간의 소통과 갈등이 미묘하게 그 언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주인공 쑤이는 중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지만 중경 방언을 사용하지 않고 북경어(표준어)를 사용하며 중경에 온 외국인 학생들에게 북경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중경 방언을 고집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그녀가 못마땅할 수밖에. 그들 사이의 갈등은 이로 인해 더 깊어져 아버지는 결국 집을 나오고 만다. 가족간의 소통에 언어가 장벽이 된 셈이다.
또 다른 인물 경찰 왕위는 북방 출신으로 중경에 와서 쑤이와 북방어(북경 표준어)로 대화를 하며 한국인 김씨는 중경에 와서 중경 토박이 쑤이에게 북경어를 배우고 있다. 그의 출신과 국적에 상관없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네 인물, 쑤이와 아버지, 경찰 왕위, 한국인 김씨의 소통과 단절 그 갈등과 비극에 관해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서 감독이 밝힌 바 있듯이 중국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어를 듣고 자라 문제없이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재중동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언가에 끌려가듯 점점 더러워지는 여자와 그녀를 파멸로 이끄는 남자,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도시의 자화상을 표현해내다!
환한 대낮,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가 총에 맞는 소리를 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땅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사람의 답답한 변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저녁시간 식당 한켠에서 시비가 붙어 뜨거운 냄비 속에 상대의 손을 집어 넣는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철저하게 나 외에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 살 집과 환경을 빼앗기게 돼서야 비로소 협동과 단결을 외치지만 그것 역시 각자의 이익을 위함이지 결코 어떤 공동체 의식이란 것은 없다. 무엇이 도시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감독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쑤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철저하게 고립되어가는 도시의 사람들을 무덤덤한 타자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중반 즈음 주인공 쑤이가 허무한 마음을 안고 엄마의 무덤가에 찾아가 “아빠는 계속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고 나는 점점 더러워져 가.”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쑤이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풀어주는 대가로 하룻밤을 지낸 경찰 왕위도, 매춘을 일삼는 쑤이의 아버지도,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이 성(性)에서 방황하며 빠져서 헤어나질 못한다.
성(性)이라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고 인간이 타락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망가지는 것도 바로 성(性)이라면 이걸 어떻게 표현하고 얘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감독은 지금의 중국 현실이 바로 그러하다고 판단하고, 이번 영화 <중경>을 통해 한번 정면에 서보자는 생각에서 그의 방식대로 성(性)을 풀어나갔다.
의도치 않은 연작 시리즈 <이리>와 <중경> 두 편의 영화가 탄생하다!
<경계> 이후 장률 감독이 차기작으로 준비했던 영화는 탈북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두만강>이었다. 그 때 마침 그에게 <이리>의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익산에 산 적도 없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재중동포인 그는 결국 폭발사건에 관심을 보이며 익산에 머무르면서 곧바로 구상에 들어갔다. 시나리오 작업과 함께 하루만에 장소 헌팅까지 끝났고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계획대로라면 여름에 중경에서 절반, 겨울에 익산에서 절반을 찍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07년 여름, 중경에서의 촬영이 시작되어 9일만에 완료되었고 예상 외로 분량이 길어져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도 손색없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감독은 이 9회차 촬영분을 <중경>으로 이름 지어 독립된 영화로 구분지었고, <이리>와는 뿌리를 같이하는 연작시리즈가 탄생하게 되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도시를 중경으로 택한 이유
중국 내에서도 독특한 도시로 여겨지는 중경은 인구 3천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중국 서북부 쪽에 위치한 쓰촨성의 중심도시다. 감독은 특히 중경의 사람들은 모두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해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군분투와 좌절, 분노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있다고 보았다. 장률이 바라본 중경은 사람들의 마음이 폭파 직전에 있는 도시, 중국에서 가장 매운 요리를 먹는 사람들이 사는 ‘뜨거운 도시였던 것이다. 폭발한 뒤의 황폐하고 쓸쓸한 도시 이리를 보기 전에 그는 시선을 멀리 두고 다른 공간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폭발을 향해 달려가는 도시 중경을 보았다. 이미 겪은 것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을 때 이제 겪어야 할 쪽을 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판단했던 것. 장률의 <중경>은 그렇게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