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싶은 지수 ★ 인물들 말 안 하기 지수 ★★★☆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 지수 ★★★★
<중경>은 장률의 네 번째 장편영화이며 동시에 다섯 번째인 <이리>와는 쌍둥이처럼 연관되어 있다. 애초 한 작품으로 구상되었지만 제작 중 두편으로 갈렸고 한주 간격으로 개봉한다. 장률의 지난 작품들과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조금씩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인구 3천만명이 모여 살아가는 중국의 거대 도시 중경. 쑤이(궈커이)는 거기 사는 많고 많은 사람 중 한명이다. 그녀의 무표정을 보아서는 삶이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쑤이는 다들 사투리를 쓰는 이곳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표준어인 베이징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좀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쑤이에게는 있는 것 같고 어딘가 힘겨워 보인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더 힘들게 한다. 종종 매춘부를 집 안으로 불러들이던 그가 어느 날 들이닥친 경찰에 잡혀간다. 그를 찾아 쑤이는 할 수 없이 경찰서에 간다. 쑤이는 그곳에서 경관 왕위(샤오허)를 만나는데, 그는 이상하게도 아버지를 순순히 풀어준다. 그게 인연이 되어 쑤이는 왕위에게 몸을 허락하고 마음도 기대지만 결국 그가 유부남이며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복수심으로 그의 총을 훔친다. 쑤이는 완전히 마음 둘 곳을 잃는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이리’일 것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하나인 한국에서 온 김씨는 이리 폭발 사고로 다리와 성기를 잃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쑤이의 마을은 이미 철거로 시끄럽고 사람들은 쫓겨나지 않겠다며 시위하고 있다. 그때 마음을 정한 것 같다. <이리>를 보면 쑤이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쑤이 역을 맡은 궈커이는 10대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유망한 중국 여배우로 장률의 눈에 띄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벽돌 같은 표정으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는 주인공 쑤이 역을 연기한다. 한편 왕위 역의 샤오허는 본래 음악인이며 비전문 배우이지만 이번 영화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가 만드는 몇몇 장면은 놀랄 만큼 생생하다. 특히 총을 잃어버린 왕위가 벌거벗은 채 도시를 활보하는 장면은 황폐하면서도 섬뜩하다.
장률이 그려내는 황폐한 이미지들은 <중경>에서 여전히 생생하다. 느린 카메라 움직임이나 표정이 많지 않은 인물들이 그렇고, 모든 게 멈춘 것 같지만 실은 부글부글 끓는 것도 그렇다. 장률이 폭발 직전의 위험천만한 도시 같다고 느낀 중경. 길거리에서 총을 들고 살인이 일어나도 누구 하나 눈 깜짝 하지 않는 초반부 설정으로 장률은 그런 면모들을 암시한다. 최소한의 인물이 등장하는 저예산영화이지만 뚝심있는 장률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중경>을 보고 나면 그곳에 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곳이 궁금해진다.
tip/지난 5월12일 일어났던 쓰촨성 대지진 사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 사건의 중심에 중경도 있었다. 중경이 폭발 직전의 도시 같다고 말한 장률이 이 영화 <중경>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