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일수록 다시 보고픈 영화가 있다는 것은 순수성을 잃은 세태의 저항 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영화의 기술과 새로운 도전에서 이룬 성취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잃어버린 필름 속에서 빛나는 보석 같은 배우들과 작품들이 있었기에 다시 꺼내 기억하고픈 것이다. 그것들은 대중 속에 있었으며 그 대중은 그들을 만들어냈다. <마부>의 김승호, <오발탄>의 김진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최은희, <남과 북>의 최무룡, <연산군>의 신영균, <성난 능금>의 신성일 등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던 작가주의, 감독주의, 배우 중심의 작품들이 오늘날 거대한 자본 시대에 인간 중심적 영화가 되기를 고대한다.
1930년대 <임자 없는 나룻배>를 감독한 이규환 감독과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일제 말기에 잃어버린 민족정기를 영화 속에 숨쉬게 한 감독으로, 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이 그의 문하생이다. 50년대 그는 <춘향전>에서 절제된 연출과 지금은 잊혀져가는 이민, 조미령, 전택이, 노경희를 내세워 매력적이고 품위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규환 감독이 새삼 존경스러운 것은 그의 정통적인 영화정신이다. 배우의 내면적 진실을 중요시했으며 진실이 없는 외모지상주의는 경멸했다. 50년대 영화는 작품 수로나 질적으로 새로운 영상 시대의 장을 열었다.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는 양산도 가락과 판소리의 애절함, 한 맺힌 감정을 드러낸다. 오늘날 요식적인 무대 공연에서 듣는 소리와는 느낌이 다르다. 현재 보관 중인 필름에서는 아쉽게도 마지막 장면이 삭제되어 있을 것이다. 가마를 탄 신부가 남편의 무덤가를 지나면서 시어머니의 칼침을 맞고선 남편이 누운 곳으로 기어가 무덤을 쓰다듬을 때, 무덤이 갈라지면서 신랑 신부의 모습으로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다분히 샤머니즘적 표현에 종교적 의미를 담은 김기영 감독의 독특한 초기 작품이다.
그외에도 <젊은 그들> <홍길동> <아리랑> <처녀별> <며느리 설움> <단종애사> <옥단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망나니 비사>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 50년대 작품들을 사랑했다. 이후 점차 한국영화는 멜로물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비극은 없다> <꿈은 사라지고> <장마루촌의 이발사> 등 통속적인 멜로영화는 당시 관객이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달콤한 사랑의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한편 서민의 애환을 그린 <마부> <박서방> <로맨스 빠빠> <서울의 지붕 밑> <해떨어지기 전에> 등도 있었다. <해떨어지기 전에>는 김승호, 김진규 주연으로 형제애와 비극을 그린다. 동생의 실수로 교통사고가 나자 형인 김승호는 머리 좋은 동생 대신 옥살이를 한다. 출감 뒤 부둣가에서 구두수선을 하면서 지내던 형은 어느날 신문에서 의학박사가 된 동생을 보고 그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남루한 형이 찾아왔을 때 동생의 가족은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무시한다. 그 순간 김승호의 명연기를 잊을 수 없다. 눈물을 머금고 동생의 가족을 뒤로한 채 “해 떨어지기 전에 가자”고 중얼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점차 한국영화는 장르를 넓혀가면서 반공멜로, 액션영화 등으로 다양해졌다. <두고 온 산하> <서울로 가는 길> <오인의 해병> 등을 비롯해 <오발탄> <비무장지대> <잉여인간> <심야의 고백> <서울은 만원이다> 등의 사회고발영화도 있었다. 또한 <폭풍의 언덕> <카츄샤(부활)> <심야의 고백(죄와 벌)> 등 외국 문호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들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심야의 고백>은 하유상 각색 노필 감독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강로를 배경으로 증오의 대상을 살해한 뒤 고뇌하는 청년(최무룡)과 검사(김진규)의 논쟁과 심야에 교회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면서 청년이 소냐(문정숙)에게 고백하며 자수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특히 이지적이며 날선 반항적 연기를 보인 젊은 시절 최무룡의 연기가 돋보였다.
요즘 같은 거액투자의 시대에는 저렴한 제작비의 작품으로 느껴지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생각난다. <만추>는 영상미의 리얼리티를 보여준 수작으로 늦가을 고독과 외로움에 젖은 두 남녀 죄수의 사랑 이야기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창경원 벤치에 앉아 남자(신성일)를 기다리는 여인(문정숙). 빛바랜 바바리코트를 입고 굵은 꽃무늬의 머플러를 두른 우수어린 문정숙은 이 영화를 빛낸 배우였다. 이 영화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밤 11시 희뿌연 서울역 대합실, 만나기로 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 여자의 초조하고 조여오는 심리적 연기, 기적소리가 출발을 알릴 때, 체념하고 개찰구를 빠져나갈 즈음, 희- 하고 소리지르며 나타나는 남자, 그 환희의 기쁨을 안고 간신히 3등 열차에 몸을 싣는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에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은 깊은 애상과 슬픔의 전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