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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뜨거운 그녀들의 윤리와 미덕이 좋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세 가지 미덕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적어도 세 가지 미덕을 지닌다. 첫째, 박진감 넘치는 화면과 장르의 규칙에 충실한 플롯으로 스포츠영화의 쾌감을 선사한다. 둘째, 풍부한 서사로 휴먼드라마의 감동이 살아 있다. 셋째, 긍정적 여성성을 제시함으로써 기존 영화들과 다른 방식의 여성주의를 표방한다. 이 세 가지 미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쾌감 가득한 스포츠영화

<우생순>은 2004년 올림픽 직후 기획되어 3년간 공을 들여 완성된 작품으로 스포츠영화로서 성취도가 매우 높다. 이는 스포츠영화 제작 경험이 절대 부족한 국내 여건과 세계 최초의 핸드볼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근래 나온 스포츠 소재의 국내 극영화를 열거하면 <YMCA 야구단> <반칙왕> <챔피언> <남자 태어나다> <슈퍼스타 감사용> <역도산> <말아톤> <주먹이 운다> <맨발의 기봉이> <1번가의 기적> <각설탕> <천하장사 마돈나> <펀치레이디> 정도다. 다룬 종목을 살펴보면, 마라톤은 주인공 혼자 뛰는 모습을 위주로 하니 간단한 편이다. 경마는 경주마들끼리 따라잡고 기수가 낙마하는 등의 복잡한 모션을 살려야 하지만 대역이 가능하다. 권투, 레슬링, 씨름 등 격투기는 훨씬 역동적인 장면을 요하고 대역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렵지만, 두 선수의 액션-리액션만 담으면 되니 덜 복잡하다. 여러 명이 움직이는 구기(球技)는 더 어려운데, 그나마 야구는 신체접촉이 가장 적은 종목으로 공으로 연결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담으면 된다. 하지만 여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거나 정교한 세트플레이를 만들어내는 농구, 배구, 축구 등은 화면구성이 훨씬 어렵다. 그래서 이들 종목의 극영화는 국내에서 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더욱이 핸드볼은 부상의 위험도 높고 체력소모도 심해 빈번하게 선수를 교체해가며 경기해야 하는 매우 격렬한 종목인데다, 팬층이 두텁지 못한 이유로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다. <우생순>은 국내에서 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난이도 높은 스포츠영화를, 참고할 만한 외국영화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일일이 선수들의 동선과 카메라앵글을 새로 디자인해서 화면을 구성한 영화다. 핸드볼 관계자의 조언과 감독의 치밀한 콘티, 그리고 배우들의 강도 높은 훈련과 팀워크로 영화는 실제경기를 보는 것 같은 박진감 넘치는 경기장면을 보여준다.

스포츠영화의 쾌감이 돋보이는 또 다른 이유로 장르에 충실한 플롯을 들 수 있다. <우생순>의 플롯은 두개의 실화, 즉 은퇴할 나이에 주전으로 뛰며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던 30대 노장선수들과 동점만 19번에 연장전을 거쳐 승부던지기에서 아깝게 패한 결승전이라는 두개의 초점을 중심으로 삼아, 스포츠영화의 공식에 따라 그려낸 타원형이다. 영화의 전반은 노장선수들이 올림픽 결승에 출전하기까지의 픽션드라마가 주축이고, 후반부는 ‘극본없는 드라마’ 인 결승전 경기장면이 주축이다. 영화는 팀 해체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선수들이 하나둘 모이고, 훈련과정 중 불화를 겪지만 열정으로 똘똘 뭉쳐 불가능할 것 같은 선전을 펼치고, 마지막 결전의 순간 가장 중요한 선수가 위기에 빠지지만 끝내 최선을 다한다는 흐름을 갖는다. 이러한 흐름은 두 가지 장점을 지닌다. 첫째 관객에게 익숙한 친화력을 지니고, 둘째 점차 상승하여 마지막에 폭발하는 뒷심을 발휘한다.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을 결합하여 장르의 법칙에 충실하면서도 내적 완결성을 지니는 탄탄한 플롯을 자랑한다.

2. 감동이 살아 있는 휴먼드라마

핸드볼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단체구기종목이지만, 올림픽 때가 아니면 관심을 받지 못한다. 더욱이 IMF 이후 실업팀들의 해체가 시작하여 지금까지 팀 해체가 줄을 잇는다. 올림픽 성적도 88년 금메달, 92년 금메달, 96년 은메달에 이어 2000년에는 4위로 밀려났다.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본선티켓도 놓쳤지만,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임오경, 오성옥, 이상은, 오영란 등 노장선수들의 활약으로 3위에 입상하여 가까스로 본선진출권을 따낸다. 당시 이상은과 오영란이 속했던 양대 팀은 해체되었고, 임오경과 오성옥은 일본실업팀 소속이었다. <우생순> 제작자는 올림픽 직후 임오경, 오성옥을 담은 TV 인간극장 <히로시마의 두 여인들>을 보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한다. 영화는 2004년 당시 5개 실업팀을 보유한 한국팀이 1035개의 실업팀을 보유한 덴마크를 상대로 접전을 펼쳤던 실화를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을 재창조하여 휴먼드라마의 감동을 극대화한다.

최고 선수였지만 팀 해체로 마트사원이 된 미숙, 남편도 핸드볼 선수였지만 빚지고 도피 중인 탓에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선수촌에 들어온다. 일본팀 감독으로 갔다가 국내에 감독대행으로 와서 노장선수들을 불러모으지만 이혼경력 등의 이유로 다시 선수로 뛰게 된 혜경, 그녀는 신임감독과 과거 연인이었다. 팀 해체로 은퇴했다가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된 정란, 그녀는 잉꼬부부지만 선수 시절 생리조절 탓에 불임이다. 보람 등 신예들은 노장들의 활약에 위압감을 느끼고, 신임감독은 노장들을 거북해하며 유럽식 훈련방식을 도입하려 한다.

이중 가장 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은 미숙인데, 그녀는 “이기든 지든 먹고살려고 미친 듯이 뛰었다”고 자신의 핸드볼 인생을 요약한다. 그녀는 빚을 갚기 위해 대표팀에 합류하여 승리의 의지를 다지지만, 결승전을 앞두고 남편이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는 대신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더 물러설 곳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그녀가 남편에게 한 말, “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마”는 결국 영화가 관객에게 하는 말이다. 영화가 그녀의 실패를 숨죽이며 사려 깊게 전할 때 관객은 아쉬움이 아닌 용기를 얻는다. 최선을 다한 과정을 알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며, 영화의 감동이 현실을 망각게 하는 판타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팍팍한 현실을 일깨우고 그것을 이겨나가도록 북돋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생순>은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갈등이 촉발되고 화해하는 과정을 ‘승리를 위한 한길’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갈등을 개별화하고 세분화하여 접근하는데, 가령 혜경-보람의 갈등은 곁가지에 해당되지만, 이들이 감독과 선수, 노장과 신예, 다시 존경하는 선배와 아끼는 후배로 만나게 되는 지점들을 성심껏 그린다. 이는 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보듯이, 인물들과 그들 주변으로 확장되는 관계망에 대한 감독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연출이다. 또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류승범이 그러하듯 골키퍼 수희나 정란처럼 밝고 현실적이며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통해 유머와 함께 진솔하고 명랑한 삶의 태도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 역시 감독의 개성이 한껏 묻어나는 대목이다.

3. ‘긍정적 여성성’을 제시하는 여성영화

그녀들은 강하다. 체력이 강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응집력이 강하다. 약한 남자들이 그녀들과 대비된다. 미숙의 남편은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가족을 피해 혼자 운다. 어디든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거두어 먹이고 끝까지 책임지는 미숙에 비해 그는 약한 사람이다. 그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포기한다. 그러나 미숙은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남편 주변의 남자들은 그를 보듬지 못한다. 복덕방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장 감독이나 승필도 그를 붙잡지 못한다. 그러나 미숙의 고통을 혜경은 보듬는다. 그녀는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돈을 빌려주고 미숙의 퇴촌을 막기 위해 감독과 대결하며, 남편 소식에 우는 미숙을 진심으로 꼭 안아준다. 남자들은 가족을 돌볼 줄도 모르고 친구를 위로할 줄도 모르지만, 여자들은 자식을 챙기고 서로의 아픔에 연대한다.

승필은 취임 첫날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감독으로 성공하고 싶은 야심을 내세워 선수들의 사정을 살피지 않는다. 그에게 선수들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며 과학적 조련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합리적 관리를 저해하는 것들, 가령 선수들의 사생활이나 미숙의 아들은 거치적거리는 존재다. 혜경은 그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애도 낳아보고 감독 자리에도 앉아보니까 다른 사람 힘든 것도 보이더라” 말한다. 모성적 체험이 인격 성숙의 계기가 된다는 뜻이다. 그녀와의 ‘우중산책’ 이후 그도 조금 변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남자들은 친구 관계지만 공무원과 환경운동가로 대립하다 공무원이 자살해버리고, 밴드 멤버들은 서로의 쓸쓸함을 보듬지 못한다. 영화 속 인물들 중 가장 긍정적인 인물은 야채장사를 하며 혼자 아이를 키우던 인희이다. 그녀는 씩씩하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머뭇거리는 남자주인공의 일상을 챙겨주며 성큼 다가온다. <세친구>를 포함하여 임순례 감독이 남성들에게 품는 시선은 일종의 연민이다. 그러나 <주먹이 운다>류의 남성 신파에 등장하는 자기 연민의 시각이나, “아빠 힘내세요~” 노래로 대표되는 ‘고개 숙인 남자’들에 대한 연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임순례 감독 영화에서 남자들은 ‘남성성’의 과잉이나 결핍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가 지니는 내적한계 때문에 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들의 과도한 ‘남성성’을 비난하거나 부족한 ‘남성성’을 북돋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없는 더 나은 삶의 가치와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른바 ‘긍정적 여성성’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우생순>을 통해 끈질기고 관계 지향적이며 약자를 보듬는 ‘아줌마성’을 ‘긍정적 여성성’으로 제시한다. 이 ‘아줌마성’은 허문영 등에 의해 언급되었던 ‘소년성’과 대극에 놓이는 개념이다.

<우생순>은 ‘긍정적 여성성’을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여성영화’라 불리던 여느 영화들보다 높은 여성주의를 성취한다. 자폐적이거나 무책임하거나 신경증에 빠진 여성을 보여주면서 그녀들의 병폐를 남성중심사회의 억압 탓으로 돌리고, 여성은 피해자이기만 할 뿐 윤리적 주체이기를 포기해버리는 영화들, 가령 <여자 정혜> <피아노> <밀애> <디 아워즈> 등에 비해 훨씬 큰 힘을 지닌다. 원한에 사무친 희생자가 아니라, 억압자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한 윤리와 미덕을 보여주는 힘! 가히 니체적 전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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