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쉬지 않고 우린 움직이지.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공장은 돌아가지.” 노랫가락에 맞춰 격렬한 춤사위가 펼쳐진다. 양다리를 뒤집어 거꾸로 세우고, 온몸을 빙그르 돌려 회전하는 동작들이 자못 현란하지만, 자로 잰 듯 손과 발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군무는 경쾌함보다는 위압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뮤지컬 <라디오 스타>의 안무 연습 현장. 라디오 스타? 박중훈, 안성기가 출연했던 이준익 감독의 바로 그 영화가 맞다. 변두리 마을을 배경으로 한물간 스타와 속깊은 매니저의 우정을 잔잔하게 펼쳐 보였던 영화와 이곳 연습장의 풍경이 쉽사리 겹쳐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맞다. 영화의 기본적인 드라마와 인물, 테마를 가져온 뮤지컬 <라디오 스타>가 무대적인 상상력을 통해 탄생시킨 새로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스치듯 짧은 악역으로 등장했던 스타팩토리 최영도 사장의 비중이 커지면서, 공연 2막의 오프닝은 기계를 찍어내듯 스타를 양산하는 매니지먼트 산업을 은유하는 군무로 구성됐다. “영화의 미덕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뮤지컬적인 장점을 살리고자 한” 김규종 연출가의 고민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2008년 1월, <라디오 스타>와 함께 신년의 막을 여는 뮤지컬 중에는 <싱글즈>도 있다. 2003년, 장진영, 엄정화, 김주혁 주연으로 200만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불러모았던 영화는 지난해 6월에 뮤지컬로 초연됐고, 80%를 웃도는 객석점유율을 기록하며 창작 뮤지컬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가도를 달렸다. 초연 8개월여 만에 3번째 공연을 올리게 된 <싱글즈>는 신년 첫 무대의 주역으로 손호영, 이종혁, 김지우 등의 라인업을 갖췄다. <라디오 스타>와 <싱글즈>. 두 작품의 공통분모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를 뮤지컬화해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라는 것. 당장 시야를 올해 하반기, 혹은 내년까지 넓혀보면 레이더에 걸려드는 작품은 수없이 많다. <미녀는 괴로워> <용의주도 미스신> <내 마음의 풍금>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달콤, 살벌한 연인> <파이란> <은행나무 침대> <신부수업> <번지점프를 하다> <황산벌>…. 이 모든 영화들이 현재 뮤지컬로 제작 중이거나 기획 중인 작품들이다. 언제부터인가 아예 영화(movie)와 뮤지컬(musical)을 합성한 ‘무비컬’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2008년은 무비컬의 전성시대”라는 식의 헤드라인은 최근 각종 언론 매체를 단골로 장식하는 문구가 됐다.
무비컬 전성시대, 영화자본의 공연사업 진출과 맞물려 도래
굳이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영화를 뮤지컬화하는 작업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미 2004년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무대에 오르며 포문을 열었고, 지난해 <댄서의 순정> <싱글즈>가 그 뒤를 이어 흡족한 흥행 성적을 올림으로써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린 바 있다. 사실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무비컬 바람은 그동안 물밑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영화자본의 공연사업 진출과 긴밀하게 맞물려 이루어진 바가 크다. 황정민의 무대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나인>을 포함해 <캣츠> <지킬 앤 하이드> <지붕 위의 바이올린> <마이 페어 레이디> 등 2008년 한해에만 스무편 남짓의 뮤지컬에 투자, 제작, 배급으로 참여하는 CJ엔터테인먼트를 가장 대표적인 주자로 꼽을 수 있다. 2003년 <캣츠> 투어 공연의 투자 참여를 시작으로 뮤지컬 시장에 진입한 CJ엔터테인먼트는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헤븐 등 다수의 뮤지컬 제작사들과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2006년부터는 <거울 공주 평강 이야기> <김종욱찾기!> 등 창작 뮤지컬 제작에까지 행보를 넓히는 등 매년 200~300억원의 예산을 뮤지컬에 투자하고 있다.
한편 싸이더스FNH는 2006년 <날 보러와요> <아트> <클로저> 등의 공연을 제작해온 악어컴퍼니의 지분 25%를 인수해 투자자 형식으로 뮤지컬 사업에 뛰어들었다. 흥행과 비평에서 고른 성공을 거둔 뮤지컬 <싱글즈>에 이어, 얼마 전 극장에서 개봉한 <용의주도 미스신>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영화와 뮤지컬 두 갈래로 준비돼 올해 하반기 즈음에는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악어컴퍼니의 조행덕 대표는 “콘텐츠 공유가 기본이다. 싸이더스의 영화, 시나리오와 악어컴퍼니의 연극, 뮤지컬 콘텐츠를 공유하고 있고, 현재 공동으로 기획하고 있는 작품들도 몇편 된다. 같이 하자는 이야기는 한 4∼5년 전부터 있었는데, 재작년 즈음부터 회사를 조금씩 섞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뮤지컬 제작사들의 밀려드는 러브콜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KM컬쳐는 <미녀는 괴로워>의 뮤지컬 제작 파트너로 <헤드윅> <벽을 뚫는 남자>의 쇼노트를 선택했다. KM컬쳐의 류은숙 실장은 “아무래도 지금은 영화 하나만으로는 수익을 내기가 힘든 상황이다 보니, 자연히 부가사업쪽으로 뮤지컬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미녀는 괴로워>처럼 꼭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된다면 뮤지컬 제작사들과 함께 공연을 제작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최근 눈에 띄게 활발해진 영화와 뮤지컬의 만남의 배경에는 한국 영화산업의 침체와 뮤지컬 시장의 급격한 성장세가 맞물려 있다. 영화 부가시장이 실질적으로 고사 상태이고, 유일한 수입원인 극장 수익조차 악화된 상황에서 뮤지컬이 ‘원 소스 멀티 유즈’를 통한 새로운 수익의 활로로 부상한 것은 놀랍지 않은 결과다. CJ엔터테인먼트 공연사업본부의 이성훈 부장은 “작품 편수나 관객 동원 수에서 뮤지컬이 매년 20% 정도 성장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의 4∼5배는 되는 단위산업의 성장률이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캣츠> <맘마미아!>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에서 시작된 한국의 ‘뮤지컬 붐’은 최근 몇년 사이 신성록, 엄기준, 송창의 등 국내 뮤지컬 스타들을 다수 배출하면서, 창작극에까지 그 열기를 옮겨가는 추세다. 현재 대학로의 소규모 공연까지 포함해 창작극만 한해 100편 정도가 만들어지는 한국 뮤지컬 시장은 총 2천억원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원 소스 멀티 유즈, 장기 공연을 통한 수익의 가능성 등이 영화사들의 발걸음을 뮤지컬로 잡아끄는 요소라면, 뮤지컬 제작사 입장에서는 극장 흥행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된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요소다. 악어컴퍼니의 조행덕 대표는 “한 가지 콘텐츠를 다양하게 이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또 성공한 아이템을 가지고 오면서 마케팅 비용도 절감할 수 있지 않나. 무비컬은 아주 정상적인 흐름이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원작의 미덕을 보존하되 무대예술만의 매력을 개발하는 게 성공의 관건
하지만 ‘뮤지컬 붐’에 편승한 장밋빛 구상만으로 섣불리 뛰어들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2006년 창작뮤지컬 <폴인러브>를 내놓으며, 향후 공연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것을 선언했던 시네라인-투는 흥행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현재 공연사업 계획 자체를 중단한 상태다. 뮤지컬 헤븐의 박용호 대표는 “공연 쉬운 줄 알고 왔다가 데어서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영화사들이 직접 뮤지컬을 하겠다고 자꾸 나서는 것은 단기적인 이익만을 보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뮤지컬 시장을 악화시키는 측면도 크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킬러 콘텐츠’를 모태로 한 경우에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60여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만들어진 뮤지컬 <대장금>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일제히 혹평 세례를 받으며 외면당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굉장히 좋은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드라마 화면에서 보여졌던 산해진미, 지진희와 이영애의 표정들을 대극장에는 볼 수 없지 않나. 뮤지컬 <대장금>은 그러한 부분을 상쇄할 만한 지점을 무대 위에서 찾지 못했다”고 실패의 원인을 지적한다. 이는 영화를 무대에 올리는 무비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CJ엔터테인먼트 공연사업본부의 양혜영 대리는 “원작의 느낌을 살리면서 무대적인 상상력을 보여줄 수 있는 포인트를 잡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굳이 7천원짜리 이야기를 7만원 들여서 보러갈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작의 미덕을 보존하되, 무대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매력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무비컬 연출자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다. KM컬처의 류은숙 실장은 “<미녀는 괴로워> 영화에서 사실 주진모의 역할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부분에 멋진 멘트를 치면서 클로즈업이 들어가지 않나. 하지만 공연에서는 클로즈업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걸 대체할 수 있는 무대적인 부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 지점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화법을 무대화법으로 ‘번역’하는 과정의 고투는 무비컬이 태생적으로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싱글즈>의 조행덕 연출가는 “하나의 세트라는 공간이 오히려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다. <싱글즈>는 영화의 클로즈업에 해당되는 정서적인 부분을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서정적인 노래로 처리해 라이브 공연만의 색다른 재미를 주려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교차편집, 클로즈업 등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는 <라디오 스타>의 김규종 연출가는 “마치 카메라가 돌듯 스테이지가 변화하도록 무대를 구성했고, 그 밖에도 여러 실험적인 장치들을 통해 카메라의 클로즈업, 롱숏의 효과를 내도록 시도했다”고 말한다.
“무비컬은 콘텐츠간의 호환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할 것”
최근 몇년 사이 부쩍 달아오른 한국의 ‘뮤지컬 붐’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비약적인 성장세를 인정하면서도 ‘거품이 끼었다’는 점을 일제히 지적한다. 현재 난립한 제작사들과 우후죽순 발표되는 작품들이 앞으로 2~3년 안에 30~40% 정도는 걸러질 것이라는 게 공연 업계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다만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는 것은 무비컬이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니라, 결국 하나의 뮤지컬 제작 방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라디오 스타> <용의주도 미스신> <미녀는 괴로워> <내 마음의 풍금> 등 새로운 작품들이 전면에 나서는 2008년 한해는 본격적인 무비컬 시대를 개막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CJ엔터테인먼트 공연사업본부의 이성훈 부장은 “기존에 별로 사례들이 없었기 때문에 올해가 유독 튀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콘텐츠간의 호환이라는 점에서 무비컬은 앞으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할 거다. 올해 성공 케이스가 한두편만 나와주면 무비컬도 제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김아중이 빠진 <미녀는 괴로워>가, 박중훈과 안성기의 호흡을 잃은 <라디오 스타>가, 포복절도의 대사발이 사라진 <달콤, 살벌한 연인>이 과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영화와 뮤지컬의 만남, 그 미래는 이제 막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상태다.
“영화와 분명히 다른 지점들을 즐길 준비를 하고 오셨으면 한다”
<라디오 스타>의 김규종 연출가
-뮤지컬은 영화와 무엇이 달라졌나. =영화는 사실 안성기와 박중훈의 주름진 얼굴이 화면 가득히 차면 말을 안 해도 그 정서가 묻어나는데, 공연은 그러한 표현이 불가능하지 않나.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이 표정이라면, 무대에서의 클로즈업은 노래이고 춤인데, 그 부분을 살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드라마적 충돌이 필요했다. 또 그런 충돌을 만들려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극이 젊어지더라. 영화가 40대들의 이야기라면 뮤지컬은 조금 연령대를 낮춘 30대들의 이야기다.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는 그대로 가나. =사실 변화를 주려고 많이 애써봤다. 각본이 10고가 넘게 나왔다. 많은 인물, 소재를 넣어봤는데 아무리 시도를 해도 만족이 안 됐다. 생각해보니 영화의 미덕을 굳이 벗어나려고 했던 거였고, 결국은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 같더라. 뮤지컬 1막이 최곤의 성공부터 추락, 그리고 영월에서의 재기까지 그린다면 2막은 민수의 정서 라인에 중점을 둔다. 특히 2막에서 스타팩토리의 비중이 크게 등장하는 것이 영화와는 다르다.
-음악은 어떤가. 영화 스코어가 사용되나. =<비와 당신> 한곡만 편곡해서 쓴다. 사실 영화가 음악은 많아도, 인물들이 가져가는 주제는 록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클래식이고, 영월 주민의 정서는 트로트다. 그걸 한 장르로 담아내는 건 힘들다. 뮤지컬스럽게, 대사가 리듬을 타는 음악을 만들어봤다.
-원작이 사랑받은 만큼 작품에 대한 부담도 클 것 같다. =공연이 구정 즈음 시작하는 것부터가 부담이다. 분명히 텔레비전에서 영화 많이 방영할 텐데. (웃음) 배우와 스탭들이 다들 너무나 영화를 감동적으로 봐서, 자기가 좋았던 장면들을 꼭 구현하고픈 욕심들이 있다. 그런 부분이 연출자로서는 사실 부담이다. 좀 나쁘게 본 사람도 있으면 다르게 해석하기가 좋을 텐데. (웃음) 뮤지컬 <라디오 스타>는 영화와 분명히 다른 지점들이 있다.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무대 메커니즘이 실험적인데, 그런 것들을 즐길 준비를 하고 오셨으면 좋겠다. 관객이 영화와 비교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뮤지컬적인 장점에 마음을 열고 함께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