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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신자유주의시대의 적나라한 초상

영화평론가 황진미, 634호에 실린 <용의주도 미스신> 영화읽기에 반대함

<씨네21> 634호에 <용의주도 미스신>에 관한 두개의 글이 실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김현진은 “한예슬급 미모에 능력을 겸비한 그녀가 남자를 얻고자 분투하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 비판했고, ‘영화 읽기’의 송효정은 “진부한 신데렐라 동화의 재탕이요, 차라리 철저하게 속물적인 여성으로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비판했다. 나는 이글을 통해 두 평자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들이 놓친 영화의 함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신미수는 ‘한예슬급’ 미녀가 아니다

첫째, 신미수는 ‘한예슬급’ 미모를 지닌 여자가 아니다. 김현진은 예쁜 배우에게 뿔테를 씌우고 못생겼다 거짓말하는 영화들과 달리, <용의주도 미스신>은 신미수가 ‘평균보다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지적하면서, ‘한예슬급’ 미모를 지닌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김현진의 논리에는 오류가 있다. 그녀가 꽤 예쁘다는 것과 ‘한예슬급’ 미모를 지녔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의 평균 미모가 전체 인구의 평균을 훨씬 상위하는 현실에서, 캐릭터의 미모는 할인해 보는 게 상식이다. 가령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사랑을 놓치다> <행복>의 그녀들이 여배우들과 동급의 미모를 지녔다고 본다면, 이 ‘개념작들’ 역시 ‘공상과학’이 된다. 그녀들은 ‘이미지가 비슷한, 그러나 그 정도로 예쁘진 않은’쯤으로 이해되어야 된다. 신미수가 ‘한예슬급’ 미모를 지녔다면 광고회사를 다닐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꽤 예쁘고 능력있는 여자가 왜 굳이 남자를 찾아 동분서주하는가?’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영화의 핵심 문제로, 이미 까칠남의 대사로 등장한다. 신미수는 “화려한 여자 뒤엔 반드시 능력있는 남자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 예쁘고 잘나가는 직장녀라 할지라도 ‘능력있는 남자’가 보증하지 않으면, ‘마케이누(負け犬: 패배한 개, 30대 싱글 여성)’로 취급받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여성학적 인식은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신자유주의시대 모든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짤릴까’ 불안하다. 무한불안은 무한욕망을 추동한다.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으로, 그녀의 취향과도 무관하고(“당신은 취향도 없나?”), 김현진이 언급한 ‘남자 굶는’ 문제와도 무관하다. 즉 남자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돈·권력·몸 등 자본주의사회의 ‘기표’에 대한 욕망이다. 그녀는 세 남자와 끝난 뒤, 까칠남에게 끌리지만 그를 택하진 않는다. 이는 송효정의 독법처럼 ‘자아를 찾아 떠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괜찮은 남자이긴 해도 ‘기표’를 표상하진 않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검사에게 ‘발리는’ 그에게 귀의하느니 차라리 ‘시크한 백인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좇는 그녀의 무한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신데렐라-실패담’이다

둘째, 영화는 신데렐라 동화의 재탕이 아니라 ‘신데렐라-실패담’이다. 송효정은 그녀가 ‘왕자를 찾아 나서는’ 초반 설정에만 주목해 실패를 보지 않고, ‘미스’에 방점을 찍으며 대사로 음미되는 이름 ‘미수’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흡사 <구운몽> 같은 시뮬레이션을 거쳐 영화가 도달한 교훈은 ‘철저하게 속물적으로 굴어도 왕자를 얻/을/수/없/다’다. 그녀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까닭은 그녀가 덜 속물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도 마찬가지로 속물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벌 3세와 결혼을 꿈꾸며 봉사활동을 많이 해야 하니 피곤하겠다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변태 행위를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 정도 난관이 아니라면 6명의 여자들이 재벌 3세를 찼겠는가? 그녀는 고시생을 키워 권력을 얻고자 했지만, 그놈이 검사가 되고자 한 것은 ‘그녀와 매일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놈 역시 권력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 좋은 연하남을 키우려 했지만, 그놈 역시 연상녀를 자신의 섹스 상대 리스트 중 하나로 두고 떠벌리고 싶었을 뿐이다. 의기양양 “골라 먹는 재미”를 운운했지만, 정작 골라지고 있는 건 그녀였고, 그녀의 모든 시도는 ‘미수’에 그친다. 그녀의 패착은 자신이 속물인 줄만 알았지 남들도 다 속물인 줄은 몰랐던 데 있다.

<용의주도 미스신>은 리얼한 신자유주의시대의 초상이다. 꽤 괜찮은 ‘스펙’을 갖고도 자본의 낙점을 받고자 취향도 적성도 없이 봉사활동이니 공모전이니 동분서주하지만 언제나 취업 ‘미수’에 그치는 젊은이들, 나아가 전 국민이 투표를 통해 노골적으로 “경제를 원한다” 외치는 ‘이명박 대통령 시대’에 이제 체면이고 윤리고 다 떠나서 돈 되는 건 뭐든 하겠다고 나서도 결코 돈/을/벌/수/없/는 ‘대다수 국민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이 영화가 보기 괴로운 진짜 이유는 진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적나라하게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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