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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토크]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

김혜리 “혁명 자체를 희화화한 것이 아니라 영웅과 열정적 사람들 말고도, 이런 평범하고 별볼일 없고 치졸한 사람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기분.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였습니다.” 이동진 “이야기의 틀만 이야기하자면,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런 설정들을 훌쩍 뛰어넘는 시선이 들어 있더라고요.”

불망기: 다음 영화는 세계 영화지도에서 급부상한 루마니아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입니다. 혹시 이제 ‘스키’자 돌림 감독님들의 시대가 가고 ‘우’자, ‘쿠’자 돌림의 시대가 오는 건가요? ^.~

물망가: 욱, 쿡.^^

불망기: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그때’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국민들의 봉기에 항복 선언을 한 1989년 12월22일 12시8분입니다. 소도시 바스루이의 지방방송 토크쇼에서 16주년 혁명 기념일에 즈음해 과연 우리 동네 사람들이 혁명 대열에 나섰던가, 사후에야 거리로 나왔나를 따집니다. 극중 시간으로 보면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는 새벽에 시작해서 다시 켜지는 해질녘에 끝나는 한나절의 이야기고요. 보는 동안은 황당하고 독특한 코미디고 보고 나니 따뜻하고 쓸쓸했어요.

물망가: 조금 온도가 낮은 듯, 여유로운 유머감각이 상당한 코미디영화였어요. 앞뒤에 붙인 관조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이 특히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더라고요.

불망기: 일단 많이 웃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고 16년- 10년도 아니고! 15년도 아니고!- 이나 흐른 뒤 뜬금없이 “가만, 그때 우리 시에서도 혁명이 과연 있었나?”를 따진다는 모티브부터가요. ^0^

물망가: 이 영화도 이야기의 틀만 이야기하자면,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런 설정들을 훌쩍 뛰어넘는 비범한 시선이 들어 있더라고요.

불망기: 시청자 전화를 받는 토크쇼를 거의 40분쯤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본론이지만, 그것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소도시 바스루이 사람들의 일상이 영화를 전혀 다른 영역으로 밀어올렸습니다.

물망가: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시점은 우스운 문제 같지만 토크쇼에서는 사실 중요한 질문이에요. “우리 도시에 혁명이 있었는가”라는 토론 주제는 “항복 선언이 있었던 12시8분 이전에 시위가 있었는가”로 판가름나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거대담론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상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가를 영화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어요.

불망기: 역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왜소함이 있죠. 종종 자문하게 되잖아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일어난 한국사회 대사건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는데 그때 거기서 난 뭘 했을까?

물망가: 바로 그런 자문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5·18 그 시각에 친구들과 대구에서 화투를 쳤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심하게 자괴감을 느꼈다는 이창동 감독의 경우도 그렇고요.

불망기: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은 세 남자인데요. 한명은 토크쇼 진행자이자 혁명 뒤 방송사 사장이 된 즈데레스쿠고요. 내정된 게스트의 거절로 얼떨결에 섭외된 주정뱅이 교사 마네스쿠와 혼자 사는 할아버지 피스코시가 나머지입니다. 즈데레스쿠는 역사의 거창한 의미를 규정하려는 욕심이 있고 마네스쿠는 적어도 그때 나도 한몫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하죠. 피스코시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고요.^0^ 꽤나 긴 도입부가 셋의 시시껄렁한 가정사와 일상부터 보여주는데, 뭔가 인생에서 대수로운 기대를 않는 사람들 특유의 코미디가 일품입니다. 한편 토크쇼는 혼란을 가장한 잘 조율된 소극이고요. 이리 멘첼 감독 영화를 봐도 그렇고, 동구권이야말로 코미디의 보고가 아닐까 싶어요. 연극 전통도 강고하잖아요?

물망가: 유머에는 뜬 유머와 가라앉은 유머가 있는데, 동구권의 유머는 후자쪽의 진수 같더라고요. 꾹꾹 눌러담은 유머 상자를 슬쩍슬쩍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서 보여주는 식이라고나 할까요.

불망기: 동유럽 친구를 사귀면 왠지 대화가 즐거울 듯!*.*

물망가: 기왕이면 <원스>의 마르케타 이르글로바 같은 사람으루다가…. ^^

불망기:-_-# 그런데 토크쇼에 걸려오는 시청자 전화들이 하나같이 가관이잖아요. “그 시간에 당신 술 마시는 거 봤는데 무슨 시위를 했다는 거냐?”는 반박을 비롯해서 점입가경이죠. 이건 뭐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대로 된 전화를 기다리며> 버전입니다.T-T

물망가: 그런 전화는 끝내 오지 않는다는 거.^.~ 그동안 출연자 할아버지는 종이배를 접지 않나. ^^ 그걸 또 스탭이 뺏어가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잡다함으로부터 갑자기 도약해 전혀 다른 경지를 보여주는 결말로 넘어가죠.

불망기: ‘이 영화가 어디로 가는 걸까’ 싶을 즈음에 막상 의제와는 아무 관련없는 두 대사가 갑자기 머릿속을 확 개게 하더군요. 하나는 피스코시 할아버지가 맥락없이 장황히 풀어놓은 죽은 아내와의 추억이었어요. 혁명이 있던 날 아침 지금은 죽은 아내와 싸웠는데, 꽃을 선사하면 풀어질 것 같아서 목련 세 송이를 훔쳐다주었다고요. 그랬더니 그녀가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텔레비전에서 차우셰스쿠의 항복 선언이 나와 그녀에게 용감해 보이려고 거리로 나갔다는 추억이었죠.

물망가: ^^ 사실 그 할어버지는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불쑥불쑥 내뱉 듯 하고 있죠.

불망기: 그리고 혁명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아주머니의 마지막 전화가 걸려오죠. 서두만 듣고는 “한심한 놈들아!” 일갈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더이상 아들 이야기를 안 하고, 방금 내리기 시작한 눈 이야기를 합니다.

물망가: 그게 바로 ‘이 한심한 인간들아’라는 일갈임다. ^^

불망기: 전혀 뜬금없고 예기치 못한 이 두 이야기가, 기적처럼 설득력있는 결말을 턱 안기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분하지만 졌다’는 기분이었습니다. -..-

물망가: 그리고 카메라는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거리로 돌아가죠.

불망기: 혁명 자체를 희화화한 것이 아니라 영웅과 열정적 사람들 말고도 이런 평범하고 별볼일 없고 치졸한 사람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기분. 가로등이 꺼지고 다시 켜질 때까지 그렇게 하루 해가 뜨고 지면서 역사가 한땀 늘었다는 기분,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였습니다.

물망가: 저도 그 점이 가장 맘에 들었어요. 어느 누구도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과도한 정치적 의미부여로 빡빡하게 굴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푸근한 서설로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어요. 혁명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의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이문열씨의 소설 <칼레파타칼라>의 냉소적인 태도와 다른 면모였습니다.

이동진 “기본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은 ‘슬퍼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 숱한 난맥을 드러낸다는 거죠.” 김혜리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러 간다면 누구나 그 동화가 모티브라는 점은 염두에 둘 거예요. 그런데 이 영화는 모티브가 된 동화와 영화 전체 이야기, 그리고 극중 은수가 지어낸 동화가 밀도의 차이가 없어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방금 보고 오셨죠? 그림 동화가 원래 알고 보면 무서운 이야기가 많죠?

물망가: 그림동화뿐 아니라 서양 전래동화가 그런 예가 많은데 그건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아이들이 그저 ‘신체가 작은 어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와 살면서 부모가 잠자리에 드는 모습부터 어른들이 걸쭉한 욕설과 음탕한 말을 하는 모습, 그리고 마을 광장에서 참수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보아온 결과라는 거죠. 술도 일찌감치 마셨잖아요.

불망기: 어린이는 보호해야 할 존재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최근 것이지요.

물망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글로리아>에 보면, 갱이 아이를 쏘라고 명하면서 “그저 좀 작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돼”라고 하는데, 그게 딱 중세와 근세 유럽의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라는 거예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학대받은 어린이들이 중심에 있는 영화인데요. 청년 은수(천정명)가 낙태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다가 교통사고로 숲에서 길을 잃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실 도로변에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것부터 일찌감치 판타지 세계의 입구임을 암시하죠. ‘도달불능점’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나, 인물들이 멈출 수 없는 마법에 걸려 있다는 점, 마력적 공간의 비밀을 담은 ‘일기’가 등장한다는 점은 감독의 전작 <남극일기>와 통하는 요소예요.

물망가: 기본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은 ‘슬퍼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A.I.>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도 그런 영화들이죠. <A.I.>의 마지막 장면은 대부분 사족이라고 비판했지만, 저는 아이의 눈물을 기어이 닦아주려는 스필버그의 따뜻한 마음의 산물이라 느껴져서 감동받았어요. <판의 미로…>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런 면이 있죠. 이 두 영화는, 바다 밑에서라도, 판타지 속의 지하세계에서라도, 기꺼이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죠. <헨젤과 그레텔>도 그런 지점에서 분명히 강한 전달력을 가진 영화예요. 문제는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 난맥을 드러낸다는 거죠. 우선 상상력에 아쉬움이 남아요. 판타지영화이고 잔혹동화를 표방한 영화라서 상당한 볼거리를 안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관습적이거나 다른 데서 차용한 묘사가 많더라고요.

불망기: 숲속의 집 공간 자체가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를 통해서만 ‘행복한 세계’의 상을 형성한 불우한 아이들의 단순한 상상력으로 창조된 상상세계이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변호할 수는 있을 거예요. -.-

물망가: 하지만 불우한 아이들의 상상력이 제한된 것과 그걸 소재로 그려내는 감독의 상상력이 제한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극중 악역인 변집사(박희순) 같은 경우는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의 로버트 미첨 캐릭터에서 그대로 빌려온 인물로 여겨집니다. 기독교 광신도 사이코면서 아이들을 공격해 자신의 잇속을 차리려는 인물이잖아요. 날개를 펼치고 포르르 날아오르는 장난감 요정에서 <판의 미로…>가 떠오른다든지, 스타일이 같다는 게 아니라 미술로 방점을 찍는 방식이 <장화, 홍련>을 떠올리게 한다든지, 괴저택에 담긴 아이들과 관련된 비극의 틀이 <더 헌팅>을 생각나게 한다든지, 기시감이 많은 반면 참신한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불망기: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명하려 한 영화인 만큼 더욱 어린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체를 묘사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의 주체가 상투적인 악당으로 묘사된다면 실제로 어린 배우들이 클리셰를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치르는 데 그칠 수 있으니까요.

물망가: 바로 그런 것들이 이 영화의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어린이 학대장면이 지닌 문제점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금 전에 말한 <그르바비차>의 태도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불망기: 저는 자루를 동원한 매질장면과 “제가 더 예뻐요”라는 대사가 나오는 대목이 오랫동안 섬뜩했습니다. 그런 장면은 정말로 필요할 때만 써야 합니다.

물망가: “제가 더 예뻐요” 장면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아이들의 눈물을 다루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학대를 전시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런 장면들 때문에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는 진심마저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대의 양상이 너무나 전형적이면서 자극적이잖아요. 이 영화를 일반 시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객이 거의 다인 극장에서 봤거든요. 그런데 저 아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니 마음이 흐려지기도 하더라고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은수가 ‘즐거운 아이들의 집’에 온 날부터 날짜를 헤아려 영화를 단락지었는데요. 그 구성에 걸맞게 미스터리 속으로 점점 빠져든다거나 위기가 고조되는 리듬감은 부족했습니다.

물망가: 편집이 상당히 성긴 반면, 카메라는 매우 조급했어요. 카메라가 수시로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특정 신체 부위들을 비추는데, 그런 앵글이 너무 지시적으로 인물의 상태를 전달하려 한다는 거죠. 은수가 혼자 빵을 먹는 장면의 시작은 부감으로 찍혔고 이어지는 숏은 그 빵을 뜯어먹는 입의 클로즈업인데 그런 앵글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냥 다양한 앵글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인상이죠. 편집도 마찬가집니다. 원장이 방문자에게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고 말하자마자 이어지는 숏이 감금되어서 비참하게 굶주린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인데 너무 부박한 편집이라고 느꼈어요. -_-

불망기: 대사가 반복적이라는 점도 약점입니다. 성인 배우들은 대화한다기보다 준비된 대사를 순서가 오면 암송하는 인상도 주었고요.

물망가: 특히 천정명씨 경우가 그랬죠. 클라이맥스의 순간조차도 데면데면한 얼굴에 고저장단이 없는 대사였으니까요. 박희순씨처럼 재능있는 연기자조차 얇아 보이더군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러 간다면 누구나 그 동화가 모티브라는 점은 염두에 둘 거예요. 그리고 그 모티브를 어떻게 전개시켰는지에 관심을 두겠죠. 그런데 이 영화는 모티브가 된 동화와 영화 전체 이야기, 그리고 극중 은수가 지어낸 동화가 밀도의 차이가 없어요. 무엇이 모티브고 무엇이 그 모티브를 빌려 재구성된 현실인지 차원의 분별이 좀더 명백했다면 재미있었을 거예요.

물망가: 이 영화의 시도는 무척 용감하고 좋았다고 생각해요. 한국영화 상당수가 다 고만고만하고 어슷비슷한데, 이런 영화를 누가 또 만들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용감한 시도가 모든 것에 선행하는 지표가 될 순 없다는 거죠.

불망기: 임필성 감독의 단편 <소년기>를 본 관객은 <헨젤과 그레텔>을 보고 그 작품을 많이 떠올릴 듯합니다.

물망가: 저도 그랬어요.

불망기: 어른을 겁내고 미워했던 소년이,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이 성인이 된 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승인을 받고 ‘어른됨’을 용서받으면서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의식을 영화에서 느꼈어요. 어쭙잖은 심리 분석을 하려는 건 아닌데 <소년기>와 이번 영화를 연결해보고 떠오른 감상입니다.

물망가: 뒷부분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불망기: 오늘 이야기한 영화들 면면을 보니 기억도 통조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음미하기도 어려운 것이 기억이니, 통조림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감당이 안 되면 그냥 유통기한 지날 때까지 찬장구석에 박아놓다 버리면 되고, 대면할 준비가 됐다 싶으면 그때 깡통을 열어서 먹으면 되잖아요?

물망가: 개인의 성격에 따라선 그 유통기한 때문에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고생하는 <중경삼림>의 금성무 같은 사람도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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