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김강우는 생계형 배우다. 먹고살고자 연기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연기한 남자들은 대부분 끈질기게 사는 법을 고민하곤 했다. 이름이라도 남겨 영원히 살기를 바라거나(<실미도>의 민호), 좌절이 두려워 숨이 차도록 뜀박질을 하거나(<나는 달린다>의 무철), 몸의 흉터를 훈장처럼 떠벌리면서도 다치지 않으려 야심을 버리거나(<태풍태양>의 모기). 그런가 하면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도 다른 이의 삶을 위해 1분을 아꼈고(<경의선>의 만수), 최고보다는 영원한 장인으로 남으려 칼을 들었다(<식객>의 성찬). 아마 배우로서 김강우가 보낸 지난 7년도 그들 못지않은 생존투쟁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로” 현장에 나갔고 어떤 감독이든 간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는 그도 한때는 <경의선>의 만수처럼 잠을 설치며 살았다. “그래도 가끔은 좋은 꿈을 꾸면서 잤던 것 같다. 내 영화가 흥행도 잘되고, 내가 시상식에서 상도 받는, 그런 즐거운 일이 잠자리에서는 있곤 했다. (웃음)” 2007년은 그의 꿈이 예견한 일들이 비로소 현실로 나타난 해다. 최근 전국관객 300만명을 기록한 <식객>으로 필모그래피에 흥행작 한편을 채웠는가 하면, <경의선>으로 토리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수상무대에도 올랐다. 게다가 얼떨떨한 기분을 추스를 새도 없이 새 영화 <가면>을 통해 끝까지 살아남는 건실한 남자에서 벗어나 파멸을 향해 내딛는 거친 남자로 변신할 예정이다. 그동안 꼭꼭 쟁여둔 작품들이 연달아 개봉한 터라 영화촬영보다 사진촬영이 많았던 한해를 보낸 그는 지금 하루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이 건실남은 이제 어떤 얼굴을 드러낼까. 2008년이면 우리가 씌운 그의 가면이 벗겨질지도 모르겠다.
-어제 쇼케이스는 어땠나. 김종도 대표는 김강우가 호스트라고 소개했지만, 조금 민망해하는 모습이던데.(12월10일, 김강우의 소속사 나무엑터스는 ‘김강우의 밤’ 행사를 열었다.) =좀 부담스러웠다. 창피하기도 했고. (웃음) 원래 그런 자리가 좀 난감하지 않나. 특히 배우들은 언제나 많은 대접만 받지, 다른 사람을 모시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대표님도 “너도 한번 나의 고통을 당해보라”고 하시더라. (웃음)
-쇼케이스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좋은 때 같다. <식객>이 장기흥행하고 있고, 게다가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까지. 조금은 얼떨떨하겠다. =내가 이런 상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흥행을 해보니까 흥행이 정말 힘들다는 걸 알겠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정말 편하게 사는 인생은 아닌 것 같다. <식객>도 완성되기까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느님이 나한테 너는 앞으로도 거저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웃음)
-출연한 영화가 흥행한 건 <실미도> 이후 처음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내 이름을 건 영화가 흥행했다는 면으로 보면 매우 빠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식객>을 시작할 때부터 부담이 많았다. 원작과 비교되는 것도 그랬고, 또 허영만 선생님의 <타짜>도 영화화돼서 잘되지 않았나. 그런 기대치를 견디는 게 꽤 힘들더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는 언론 때문에 힘들었다. 제작비가 없어서, 밥값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고 있다는 루머들 때문에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토리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도 남다르게 벅찬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씨네21>과 했던 첫 인터뷰를 보면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날리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고 했는데. =하하하.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이 목표치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막상 상을 받는 순간, 그냥 감사하다는 말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조금은 시간이 더 지나봐야 이게 뭔지 알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이라….
-가족들은 뭐라던가. =굉장히 좋아하시지. 부모님은 또 자식이 상받아오는 걸 제일 좋아하시지 않나. 요즘 주변 친구분들에게 밥사느라 바쁘신 것 같더라. (웃음)
-그동안 촬영했으나 밀린 작품이 계속 등장한 한해였다. 곧 드라마 <비천무>도 방영된다고 하고, 이제 <가면>이 개봉한다. <가면>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보았나.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풍기는 영화였다. 그러면서도 인물 안에 있는 여린 내면을 건드리는 지점들이 좋았다. 또 양윤호 감독님이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촬영기법을 사용하셨는데, 매우 힘있는 영상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조경윤이란 남자에게 끌렸다. 사실 그동안 나는 정말 그렇지 않은데도, 많은 분들이 성실하고 선한 이미지로만 보는 게 있지 않았나. 조경윤이 그런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가면>은 잘 살던 남자가 파멸해가는 이야기다. 김강우란 배우가 이전에 연기한 캐릭터와는 조금은 다른 드라마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연기한 남자들은 대부분 좌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 않나. =자기 의지대로 밀고가는 남자들이었지. 하지만 조경윤 같은 캐릭터가 진짜 사람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운명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모습들이 있지 않나. 그건 존재하지 않는 힘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기가 만든 덫에 빠지는 사람들이지. 조경윤도 그런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터프한 남자라기보다는 진짜 성숙한 남자를 보여주려는 욕심도 있었을 것 같다. <실미도>의 민호나 드라마 <세잎클로버>의 성우, <태풍태양>의 모기도 강한 면은 있었지만, 그들은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면>이 나한테는 무척 중요한 작품이다. 언제까지 소년의 이미지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제는 더 성숙해야 할 테고, 또 <가면>이 좋은 결과를 내야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경의선>의 만수가 남자와 소년 사이의 경계에 선 남자가 아닐까. 연기하는 입장에서 만수에게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지하에 갇혀 산다. 1분도 늦어서는 안 되고, 매일 정신상태를 체크받아야 하고. 초반에 악몽을 꾸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도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꾸는 꿈처럼 보였다. =만수는 이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사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고 기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을 시작한 뒤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강박관념에 빠져 긴장된 삶을 살지 않나. 만수도 그 정도의 포지션일 것이다. 그때가 자신의 일을 가장 신선하게 느끼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기인 것 같다. 그런 모습들을 상상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답답할 수도 있지만 또 그런 분들 때문에 세상은 돌아가니까.
-한편으로는 김강우라는 배우도 잠자리에서 비슷한 꿈을 꾸곤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주된 이미지가 항상 그렇게 건실히 일하는 이미지니까. 배우로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 꿈에서 나타난 적은 없나. =처음 단역에서 시작했을 때는 다음날 촬영장 가기가 무서웠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돼야 한다는 불안감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지. 사실 지금도 그렇다. 더이상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굉장히 크다. 그래도 그런 긴장과 강박이 나를 유지시켜준 것 같다.
-연기를 대하는 것 외에 실제 성격은 어떤가. 겉으로 보기에는 농담 잘하고 마냥 유쾌한 성격은 아닐 것 같다.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다. (웃음) 무덤덤하고 흥분하지도 않고. 이번에 상받았을 때도 나보다 매니저가 훨씬 좋아하더라.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야수와 미녀>의 탁준하는 쉽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원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 왕자님 같고 억지로 멋있게 드러내야 하는 감정들은 잘 모르겠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정다감하게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잘 못한다.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자인거지. (웃음)
-그래도 <나는 달린다>의 무철을 연기하면서 그런 무뚝뚝하면서도 성실한 이미지로 호감을 얻었다. 독서광에 용접공인 무철은 사실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성실한 남자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어필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배우 김강우의 한계점을 만들었던 것 같고. =그때는 나를 그런 남자로 봐주는 게 정말 놀라웠다. 방송이란 게 정말 무섭구나 싶더라. 나는 절대 성실하거나 남에게 자상한 사람이 아니다.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예민하다. 솔직히 한때는 나를 그런 이미지로만 보는 게 싫었다. 또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보니 일부러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남자배우가 그런 이미지를 한번이라도 갖는다는 게 운처럼 느껴진다. 카리스마가 넘치거나, 재벌 2세 같은 캐릭터는 우리나라에서 남자배우라면 언젠가는 하게 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배우로 평생 살면서 그처럼 성실하고 착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웃음)
-<야수와 미녀>와 드라마 <세잎클로버>는 왠지 흥행에 대한 조급함으로 선택한 게 아닐까 싶더라. =그런 조급함이 당연히 있었다. 나의 존재를 더 알려야겠는데 잘 안 되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 그건 내가 드러내고 싶다고 드러내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식객>은 어떻게 생각했나. 흥행성을 염두에 둘 수는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전의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에 위험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조금은 그런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하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거든. (웃음) 성찬이 가지고 있는 진실성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원작이 흥행적인 코드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고.
-성찬이 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치고 올라오는 인간형이어서 좋았다는 인터뷰를 봤다. 그런데 바닥까지 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 다니면서 <해안선>에 캐스팅되었고, <실미도>와 <나는 달린다>까지 연이어 맡게 되지 않았나. =그 말을 나에게 비유한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가 바닥까지 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바닥을 치고 나면 사람이 가장 순수해지고 치열해지는 것 같다. 성찬도 어떻게 보면 완벽하고 성실하지만, 초반에는 자기 입으로 “난 실수 같은 거 안 해!”라고 할 만큼 교만에 빠져 있다. 그런 인물은 자의든 타의든 결국 나락에 빠지게 되어 있다. 성찬도 결국에는 자기가 즐기면서 요리를 하다보니까 부활하지 않나. 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도 과거에는 현장을 전쟁처럼 여겼지만, 이제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정말 힘이 들고 긴장했지만, 내가 가장 즐겁고 성장할 수 있었던 곳은 현장 같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