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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느낀 단상들

동유럽 여성 필름메이커 부활하다

<포도나무를 베어라>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전영객잔’을 쓰고 있다. 카를로비 바리(Karlovi Vary)는 프라하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소도시다. 곳곳에서 철분이 많이 함유된 고온의 온천수가 솟고 있다. 시간을 견뎌낸 키 큰 수목들과 고성, 웅장한 저택과 관광객으로 이 작은 도시는 가득 차 있는 느낌이다. 선물 가게에는 보헤미안 크리스털 물건들로 풍요롭다. 화려한 크리스털 컵은 물론 귀여운 동물들도 많이 만들어놓았는데 가격은 만만치 않다. 산들은 높지 않지만 어딘지 험한 느낌을 주며, 음식은 늘 소금기를 듬뿍 담은 채 식탁에 오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잘 웃지 않고, 농담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나 함께 온 서울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김선아씨에게 “니 하오마”라고 인사를 건네는 정도다. 내가 “나, 중국 사람 아니거든” 하면 “곤니치와”라고 수정한다. 정말 이곳은 아시아인들에게 무지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체코영화와 이웃 지역 동유럽영화들, 즉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등의 국제 창구로 기능하는 카를로 비 바리 영화제는 한국영화에 높은 호감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몰라도 한국영화에는 호감

지난해에 김기덕 감독의 <시간>이 영화제의 개막작이었고- 여기에 와서 보니 그 선택이 더 특별해 보인다. 이 영화제는 국제영화제라고는 하지만 정말 체코와 동유럽 그리고 넓게 본다고 하더라도 유럽이 그 중심이니 말이다- 올해도 경쟁부문에 민병훈 감독의 <포도나무를 베어라>가 올라 있다.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크리스티안 문주(Christian Mungju) 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처럼 올해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영화들을 집결시킨 ‘오픈 아이즈’ 섹션에는 김기덕 감독의 <숨>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총 12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 그렇게 섹션화했는지 아직은 그 논리가 잘 파악되지 않는 ‘수평선들’에는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와 그의 아내>가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와 함께 올라가 있고 ‘또 다른 시선’ 섹션에는 <예의없는 것들>이 그리고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서는 <괴물>이 상영되며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한국영화의 밤’을 이곳 그랜드 호텔에 마련한다.

이외에도 ‘인디펜던츠 포럼’ 섹션과 2006, 2007년 체코 필름 섹션 그리고 특별 프로그램으로는 마사히로 시노다의 <사무라이 스파이> 를 포함하는 ‘쇼치쿠 누벨바그’, 그리고 테렌스 맬릭의 <배드랜즈>를 포함하는 뉴 할리우드와 ‘윌리엄 와일러에게 경배를’, 그리고 ‘뉴 이탈리안 감독 포커스’와 과 같은 다소 안이한 종목들이 있다.

동유럽 여성 필름메이커의 부활

김선아 프로그래머와 함께 서울여성영화제의 집행위원 자격으로 내가 이 영화제에 온 이유는 동유럽 여성영화를 보고 그것을 2008년 제10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을까를 검토하는 데 있다. 우리는 포스트 사회주의 여성주의와 여성영화가 어떠한 사유와 양상과 면모를 띠고 있을까 궁금하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본 것처럼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영화들의 행보는 주목할 만한다(황금종려상만이 아니라 영화 편집 중에 차 사고로 죽은 크리스티안 네메스쿠도 <캘리포니아 드리밍>으로 칸에서 수상했다). 현재 동유럽의 필름메이킹은 20여년의 침체기를 거쳐 사회비판적 그리고 영화언어적 힘들을 다시 모아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알려진 대로 독재정권 시절 중절이 금지된 때, 비합법적인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한 여대생과 그녀의 친구가 미스터 베베라는 악몽의 중절수술 (비)전문가에게 학대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중절수술 직전의 곤경에 빠진 젊은 여자가 받는 협박이 너무 징그럽고 끔찍해 나는 그 호텔 방에 같이 앉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일부 남자 평론가들과 심사위원들은 일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부활로서, 사회적 논평으로 찬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의자가 불편하기도 했다. 카를로비 바리의 극장 의자들은 정말 괴롭다). 여하간 동유럽의 영화 만들기 상황이 좋아지는 와중에 그야말로 동유럽 여성 필름메이커의 부활이라고 보고 싶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 부문이 그러하다. 주류인 장편 극영화쪽은 아무래도 여성감독들에겐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듯싶다. 몇편의 단편과 다큐멘터리들을 보고 포스트 사회주의 여성영화의 향방을 알기는 불가능하나 일단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 출품된 체코 감독 올가 스파토바의 <난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지>나 라트비아의 여성감독 라일라 파칼니나의 <테오도르> 그리고 체코의 젊은 여성감독 루치에 크라로바의 <로스트 홀리데이> 등의 예에서 일별하자면 여성 엔터테이너로서의 삶, 과거 독재 정권 시기의 트라우마가 현재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에 대한 질박한 관찰 그리고 사실을 가지고 진실을 밝혀내려는 다큐멘터리의 어떤 본연의 충동 등의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본 여성감독의 영화 중 인상적인 것은 이번에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일본 여성감독 나오미 가와세의 <애도하는 숲>이 아니라 독일 출신의 안젤리나 마카로네의 <비브르>(vivre, 살다)이다. 나오미 가와세의 <애도하는 숲>은 사실은 뻔한 발상이면서 비에 젖은 숲을 동원, 시각적으로 애매모호한 장려함과 모가리라는 애도의 시간 혹은 장소라는 얼핏 심오한 듯 보이는 일본어를 사용해 관객과 심사위원들을 ‘일본적’인 작가주의로 후려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비브르>는 1965년생 여자감독이 세명의 여자가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그들 세명의 시선으로 구성하고 재구성해내는 희비극적 영화다. 로테르담이 배경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반독일계 반이탈리아계 자매들의 이야기다. 또 EU 통합 이후 점점 더 표면화되는 유럽 내 민족적, 국가적 차이에 대한, 심한 농담을 가장한 사회적 편견도 간간이 드러난다. 동성애의 열정도 다루지만 그보다는 세명의 여자들로 이루어진 대안적 가족이 어느 사이 은근히 만들어져버리는 이야기다.

이외에 <보그> 등의 패션 사진이나 믹 재거와 같은 저명인사들만이 아니라 사라예보와 르완다의 전쟁 사진을 찍어 사진계에선 미국의 마스터라고 불리는 애니 레이보비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형식은 흔히 볼 수 있는 미국 방송다큐이나 동생인 바버라 레이보비츠가 담아서인지 유년기를 포함한 사생활과 애니 레이보비츠가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미국 대중문화계와 반전문화를 함께 잘 다루어내고 있다. 특히 셋업 촬영을 시작한 뒤 베트 미들러를 포함해 최근의 커스틴 던스트까지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인물이 자신의 삶의 이력과 개성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연출력과 촬영술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언제나처럼, 영화여 영원히

2007년 6월29일에서 7월7일까지 열리는 이 영화제는 42번째다. 생각해보면 이제 국제영화제는 영화인들과 시네필들에게 부여된 흥미로운 형식의 영화 보기의 장이다. 10시간 이상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시차 극복은 물론 뒤로하고 하루에 극장과 비디오테크에서 4편에서 5편의 영화를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듣고, 근처의 미지의 식당에서 때로는 맛있는 더러는 소금투성이의 밥을 먹고 또 그 영화들을 자국으로 가져갈 꿍꿍이를 세우고…. 또 영화제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근처에 공짜로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라운지가 있거든” 하고 끌려가 영화계의 소식을 듣고….

아, 그런 경로로 나는 싱가포르국제영화제의 필립 치아를 만나 에드워드 양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그의 <공포분자>와 <타이페이 스토리>는 나를 대만영화로 이끈 입문 격의 영화들이었다. <하나 그리고 둘> 이후 최근 인터넷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장암으로 죽다니 안타깝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에드워드 양에게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보낸다. 한국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으면 좋겠다. 언제나처럼. 영화여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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