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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하고 영화 같이 하자고 한 게 프러포즈였을까요”
이영진 사진 오계옥 2007-08-01

공주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 준비한 영화배우 최은희

“아직 거울도 못 봤는데….” 인터뷰 전에 사진부터 찍자고 했더니 최은희 선생은 같이 자리한 며느리에게 거울부터 달라 한다. 선생의 첫마디를 해석하면 이렇다. “나 할머니 아냐. 나 여배우야!” 카페 안의 조그마한 정원으로 선생을 인도했는데, 이번엔 사진기자가 호되게 당한다. 시선을 카메라쪽으로 유인하려는 사진기자에게 선생은 계속 “나, 정사진은 안 찍는데…”라며 놀리듯 허공으로 눈빛을 쏘아올린다. 일흔을 넘긴 연세지만, 여전히 배우로 살아가는 최은희 선생과의 만남은 다소 진땀나는 승강이로 시작됐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거대한 영화왕국 신필름의 안살림을 챙겼으며, 1978년 납북된 뒤에는 북한영화에도 영향을 끼친 선생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어디서부터 여쭤야 하는 것일까. 고령에도 불구하고 고(故) 신상옥 감독을 기리기 위한 2007 공주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8월10∼14일) 준비에 여념이 없는 선생을 대면하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다. 눈치챈 것일까. 질문지를 훑어보시더니 “나한테 뭘 물어볼 게 있다고 이렇게 구석구석 적어왔어?”라고 말문을 먼저 트신 선생은 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 나눈 삶과 영화의 고락의 순간들을 한 프레임씩 열어젖히셨다.

-건강은 어떠세요. =보다시피 괜찮은데. 몸이 이젠 보링할 때가 되서 그런지 병원에 자주 드나들어요. 한참 활동할 땐 병원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어요. 그러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니까 서글퍼요.

-4월11일이 신상옥 감독님 1주기였습니다. 어떻게 보내셨어요. =1주기 때는 뭐. 하여간 지난해는 1년 동안 정신없었어요. 어떻게 눈 깜박하는 새 1주기를 맞이하고. 후우. 다들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데 나한테 신 감독은 그게 아니야. 날이 갈수록 생각이 나고 그립고.

-같이 해오신 세월이 더 길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맞아요. 맞아요. 휴∼ 50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까. 50년 넘게 하루 24시간 같이 행동하고 쭉 일하고 그랬기 때문에 구미구미 생각이 나요.

-가끔 감독님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말벗을 해주신 적은 없어요? 감독님도 하늘에서 심심하실 텐데. =왜 안 나타나시는지 모르겠어. 꿈에서 뵌 적이 없어요. 항상 내 주변에, 내 곁에 계신 것 같긴 한데 영상으로 나타나질 않아. 이상하게.

-외려 더 힘들어하실까봐 그런가보네요. =글쎄 그런가. 내 기분으로는 항상 같이 댕긴다고 하는데.

-보고 싶으시면 사진을 꺼내 보시나요. =그냥 울지 뭐. 사진,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대신 우리 집안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 액자 하나하나 다 그 양반 손을 거친 것이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이 팔찌도 파리 여행가서 사준 것인데. 5∼6년 좀 더 됐죠. 회고전 할 때였을 거예요.

-특히 감독님이 아끼셨던 물건은 뭔가요. 어루만지면 감독님이 가장 많이 생각나는. =평소에 피에로를 많이 수집했었어요. 신 감독 생전에 뭐가 (피에로가) 왜 그렇게 좋으냐고 그러니까 피에로가 진짜 예술인이라면서 그걸 모셔뒀어요. 아, 그리고 신 감독이 미술학교 출신이잖아요. 영화에 쫓기다보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린다 하면서도 못 그리셨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리셨어요. 나한테 딱 1점이 있어요. 그거 보면 가슴이 메어져요. 그림을 그릴 때 심정이 다 표출되어 있거든. 아마 75, 76년이었을 텐데.

-선생님을 모델로 그린 것인가요. =아니. 풍경을 그린 건데. 고궁을 그렸는데 색채가 굉장히 어두워요. 고궁이라면 화려해야 하는데 어둡게 그렸더라구. 그때가 신필름 회사 간판도 내리게 되고, 나하고는 헤어지게 됐을 적이지. 그때 그리신 것이기 때문에. 아이구∼우리 딸이 지금껏 보관하고 있어서 서재에 걸어놨는데.

-신상옥청년영화제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는지요. =신 감독하면 연출뿐만 아니고 기획에서부터 제작, 감독, 촬영, 편집까지 다 하신 분이거든요. 근데 그 분이 영화계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내여서가 아니라 몇 십년을 지켜봐온 영화동지로서 그래요. 다른 훌륭한 감독들도 많지만, 신 감독은 자기 모든 것을 바쳤거든요. 영화를 위해 살고 죽은 인물이에요. 그래서 누군가가 그런 신 감독의 영화정신을 기렸으면 했던 건데. 그런 일은 혹 내가 재력이 있다고 해도 나보다는 영화인들이 해야 할 일인데. 그래서 춘사영화제 때 인사말을 하면서 그랬어요. 신상옥 감독 이름을 내건 영화제를 했으면 좋겠다. 그걸 정인엽 감독이 머리에 담아뒀다가 이번 행사를 준비하게 된 것이고. 난 행사가 잘 이뤄지기 위해서 옆에서 마음 써준 정도이고, 대부분은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많이 애를 쓰고 있어요.

-신 감독님과의 첫 작품이 <코리아>인가요. =그렇게 되죠. 부산에서 처음 만났어요. 피난살림 하면서. <코리아>는 뭐 극영화가 아니고 세미다큐멘터리예요. 그때 난 극단 신협에서 <춘향전>을 공연하는데 (신 감독이) 그걸 와서 봤고. <코리아>라는 게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춘향전>도 한 장면 넣고 싶다고 해서 출연 교섭을 받았어요.

-첫 인상은 어떠셨어요. =여배우들도 그렇고 다들 신 감독 보면 참 멋쟁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난 첫눈에 싹 들어온다는 건 못 느꼈어요. 그냥 수더분하고 청신하고 순박해 보이는 정도. 군대식으로 따지면 또 내가 영화 밥그릇 수로 위였거든. 그냥 젊고 유능한 감독이구나 정도였어요.

-전란 중에 데이트를 하셨겠네요.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는데, 뭘. 다만 내가 연극하면 와서 꼭 보셨어요. 윤백남의 <야화>라는 작품일 거예요. 주인공 야화를 내가 했는데, 연출하신 분이 전창근 선생이라고. 그분이 신 감독을 참 애껴줬어요. 그랬기 때문에 (신 감독이) 연습장에도 오게 되고, 공연할 때는 거의 매일 와서 보고. 그래서 내 입장에선 연극을 참 좋아하나보다, 정도로 알았죠. 그런데 한번은 무대에서 사고가 났어요. 주릿대 치마를 입고 내가 액션하는 장면이었는데. 칼 들고 남자 장정들하고 싸우는 설정이에요. 높은 무대 위에 뛰어오르고 내리고 그랬어요. 당시에 내가 몸이 아마 굉장히 쇠약한 상태에 있었나봐요. 심장이 멎을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고 쓰러졌어요. 나중에 눈떠보니 병원이에요. 그래서 누가 날 업고 왔냐 했더니 신 감독이 날 업고 왔대요. 스탭들이야 분장을 한 상태라서 바깥에 나갈 수 없어 쩔쩔매고 있는데 신 감독이 제일 먼저 무대 위에 뛰어올라와서 날 둘러업었다고 하더라구요. (전 남편과 헤어진 뒤라) 정신적으로 굉장히 외롭고 그런 처지였는데, 그 일 있고나서부터 관심이 가더라구요.

-프러포즈는 그럼. =프러포즈? 꽃 들고 와서 사랑한다 뭐 그런 표현 못하는 분이에요. 우리 세대가 그런 세대잖아요. 다만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가 연극하는 걸 많이 따라다니면서 쭉 봤더라구요. <맹진사댁 경사> 같은 거는. 앞으로 나하고 영화 같이 하자고 한 게 프러포즈라면 프러포즈지.

-결혼은 <꿈>(1954)을 찍기 전에 하신 건가요. =찍으면서 한 거지. <꿈>이 같이 본격적으로 작업한 첫 번째 작품이에요. 하루하루 진행비 조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주먹밥을 싸가지고 스리쿼터 타고 다니면서 촬영하러 다녔어요.

-잠깐 돌아가서, 최은희라는 이름은 어떤 감독님이 지어주셨나요. =내가 지었어요. 원래 내 이름이 경순. 좀 촌스럽잖아요. 해방되고 가만 생각하니까 나도 좀 새롭게 살아봐야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바꿨어요. 당시 소설가 중에 박화성 선생이라고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 소설 주인공 중에 은희가 있어요. 그게 어찌나 맘에 들던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언제 처음 품으셨는지요. =배우가 뭔지도 잘 모르는 숙맥이었어요. 학교에선 말괄량이로 놀았지만 바깥 출입은 잘 안 했구요. 연극도 많이 안 봤고. 학교에서 학예회 하면 무용이나 음악 같은 거는 좀 했는데. 영화는 제목은 기억 안 나는데 문예봉씨. 문예봉이라는 배우를 보면서 ‘야! 천사가 왔다갔다하는구나’ 정도였어요. 극단 아랑에 들어가게 된 건 동네 친구들하고 얽혀가지고 그런 거예요. 내 고향이 경기도 광주예요. 한번은 (폭격 대피를 위한) 방공호 연습에 나갔다가 같은 동네 사는 문정복씨라고, 유명한 연극배우를 알게 됐어요. 작고한 문정숙씨의 언니예요. 이쪽에 관심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친구였는데 난 곁다리로 연구생이 되었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출도 하셨고. (웃음) 18살 때 <청춘극장>에서 하녀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서게 되셨는데 그때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조연급이었어요. 생각 못했는데 갑자기 박수가 나와서 대사를 중간에 까먹기도 했어요. 쩔쩔매다가 프롬프터가 겨우 대사를 불러줘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고. 연구생 신분이라 단역도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있는 역들을 많이 맡았어요. 당시 신파를 잘 쓰는 임선규 선생이 있었는데 그분이 쓴 <새벽길>에서는 주연도 맡았고. 호평을 받으니까 여배우를 술집 여자랑 똑같이 생각했던 부모님들도 누그러지셨어요.

-조선연극회, 토월회, 극협, 신협 등에서 활동하시다가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6),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 등에 출연하시게 됩니다. 해방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웠던데다 제작편수가 많지 않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죠. 배우 양일민 선생의 회고를 보니까 전란 중에 납북되실 뻔했다던데요. =사변 전후로 과학자, 교수들 많이 갔어요. 예술계도 나 말고 하옥주라는 선배가 있었고 주증녀, 김동원, 양배명씨 등 주·조연 할 것 없이 많이들 갔어요. 도중에 몇번 탈출 기회를 봤는데 여의치가 않았고. 그래서 평안남도 순천까지 가게 됐는데, 비행기에서 낙하산이 떨어지고 양쪽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그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빠져나왔어요. 야. 그때는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낙하산 떨어지는 거 실물로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못 봤는데요. =하늘 전체에서 꽃 이파리들이 떨어져내리는데. 총격전이 벌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것에 홀려가지고 멍청하게 서 있었어요. 누가 빨리 튀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놀라서 수수밭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성천까지 걸어와서 국군을 만나서 그렇게 왔어요.

-1950년대 출연하신 작품들 중에서 제가 본 건 <어느 여대생의 고백>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 정도인데요. 신 감독님의 영화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 중 하나인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영화들입니다. 감독님이 그리고 싶어했던 여성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글쎄. 그건 그 양반 계실 적에 질문했어야지. (웃음) 처음에 나보고 같이 영화하자고 그런 것부터도 최은희라는 여배우를 놓고 저 여자를 써서 무슨 작품을 해야겠다 그런 이미지네이션이 애초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반응이 괜찮으니까 계속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택했을 것이고. 이게 좀 답이 되려나. 신 감독이 동양적인 얼굴로 첫손에 꼽았던 배우가 문예봉씨예요. 그 다음이 한은진씨. 그 다음이 나라고 했어요.

-희생하는 모성 혹은 강하고 지적인 인물을 연기했을 때와 달리 <지옥화>(1959)의 양공주 소냐에 대해선 관객의 반응이 차가웠다고 회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 감독 이야길 먼저 하면, 그분은 항상 앞장서서 가고 싶어했어요. 레퍼토리도 그랬고. 그래서 손해도 많이 봤고. <백사부인>(1960) 같은 영화는 따지고 보면 <괴물>이잖아요. (웃음) 뒤늦게 평가받았던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지옥화>도 일종의 모험이었어요. 기차 위에서 수공업적으로 찍은 장면 같은 거는 당시 관객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그때 선전문구들을 보면 대개 손수건 몇개 준비해가지고 오시오, 예요. 고무신짝 손님들이 많이 와야지 흥행이 되고, 한이 많은 우리 여성들은 극장 와서 후련하게 한풀이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지옥화>의 악녀 캐릭터는 호응이 덜 됐어요. 확 울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그 시대에 웃는 것도 손님이 별로 안 들었어요. 그러고보면 1950년대는 신 감독이나 나나 관객하고 얼굴을 익히느라 고생한 시간이었어요.

-후배 평론가들은 대개 신 감독님의 연기연출의 특징 중 하나로 ‘절제’를 꼽는데요. 선생님이 맡은 인물들도 눈물을 흘리지만, 흐느끼진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내가 맡은 인물들이 대체로 유교사상을 뿌리깊게 갖고 있는 인물들이고, 또 여전히 그런 시대에서 살던 인물들이고. 과부 역할을 많이 했는데. 사실 당시 여성들은 웃어도 크게 웃지 못했어요. 웃음이 담 밖으로 들리면 안 되니까. 슬퍼도 크게 울지 못하고. 억제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절제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대목에서는 좀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라고 의견을 냈다가 감독님과 다투신 적은 없나요. =충돌한 적은 없어요. 아. 북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탈출기>였나. 억울해서 넋을 놓고 우는 장면이 있는데. 털어버리고 막 우는데 콧물이 나잖아. 나야 아무리 슬픈 역이라도 좀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야지. 요즘 배우들 보면 콧물 쫙, 눈물 쫙, 모두 입으로 들이켜고 그러는데 난 아주 참 싫더라구. (웃음) 아름다와 보여야지 추해 보이면 안 된다구요. 그래서 치마로 코를 푸는 액션을 했더니. 왜 그런 걸 하느냐고 처음으로 지적을 하더라고. 여보, 여기선 리얼한 연기를 해야 되고 이 여자의 심정으론 그런 거 저런 거 따지지 못할 심정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그래도 처리를 해야지 했더니 가만히 계시더라고. 평소엔 다 맡기시지 이야기 잘 안 해요. 작품이나 역할의 큰 선에서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유도하고. 여기서 울어라 여기서 웃어라 안 해요. 그게 신 감독의 장점이에요. 카메라를 직접 했기 때문에 연기자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와주고 커버해주고. 반면 다른 작품 찍으러 가면 구속이 많더라고. 카메라맨이 여기 몇 걸음 와서 딱 서서 연기 해달라고 하니까. 프레임 벗어나면 또 뭐라 그러고.

-<민며느리>(1965)를 비롯해서 남과 북에서 4편의 영화를 연출하시기도 했는데요. 선생님도 신 감독님처럼 연기 디렉팅을 하셨나요. =하하. 그게 조금 달라요. 감독님은 참 대범해요. 난 연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자꾸 시킨다고. 이렇게 연기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배우들 만날 때면 답답했어요.

-신상옥 프로덕션이 신필름이라는 거대한 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건 <성춘향>(1961)의 흥행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개봉했죠. 흥행에서 <춘향전>을 앞지를 자신이 있으셨나요. =겁부터 났어요. 홍 감독쪽에는 든든한 스폰서가 있었고. 우리는 자력으로 영화제작을 했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는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김)지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미인이고. 그러니까 기자들도 짓궂게 기사를 써요. 10대 춘향이와 40대 춘향이의 대결이라고. 내가 그때 31살 정도 됐을 텐데. 10대 춘향이를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 제작비 등의 문제로 직접 춘향의 의상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의상도 갑사로 내가 직접 만들었고. 무명 사다가 집에서 물감 들이고. 그래도 다들 열심이었어요. 이 도령하고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가 가을이었어요. 밤에 라이트 비추면 추우니까 입김이 나잖아요. 그래서 신 감독이 나랑 (김)진규씨한테 얼음물을 갖다 멕여요. 근데 한 1, 2초는 괜찮은데 대사치면 또 입김이 나오잖아요. 나중에 신 감독이 그래요. 숨쉬지 말고 대사하라고.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에요. (웃음)

-영화밖에 몰랐던 감독님은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오해를 받으신 적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수용 감독님의 회고록 첫장에도 인사도 없이 반말하는 감독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요. =신 감독은 격식, 형식 이런 거 싫어해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한테 특히 말을 놓는다구요. 아우, 참. 또 신 감독은 선배한테 깍듯하게 인사할 줄 몰라요. 대충 고개만 까딱하고 마니까 선배들이 건방진 놈이라고 욕 많이 했어요. 한번은 을지로를 둘이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윤봉춘 감독님이 걸어오시더라구요. 그래서 쿡쿡 찔렀어요. 그랬더니 (로봇처럼 걷는 모양을 흉내내며) 그렇게 가서는 꾸벅 45도 숙이는데 외려 윤 감독님이 웬일이냐며 당황하시더라구요. 청와대 가끔 초대받아 가도 대통령한테 그냥 까딱하고 말던 사람이니까.

-신필름이 제작한 영화에 거의 대부분 나오셨지만 개런티는 못 받으셨잖아요. =신 감독도 개런티는 없었죠. 자신의 회사니까. 내 입장에선 곤란할 때가 있어요. 살림도 해야 하고 또 여배우니까 필요한 게 많았다구요. 근데 화장품이든 의상이든 영화에 쓴다고 하면 잘 사주는데, 개인 용도로는 안 사줘요. 첨엔 생활비를 줄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영화사 작품에 출연한 거예요. 신 감독 몰래 계약해서 필요한 걸 좀 얻을 수 있었어요.

-주방도구까지 감독님이 소품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감독님에게 뺏긴 물건 중에 가장 아쉬운 게 어떤 건가요. =궁중에서 나온 빨간 화류장이 있어요. 인사동에서 진짜를 들여다놨는데 한번은 영화에 쓰겠다는 거예요. 사극 찍는데 후궁 방에 들여놓을 거라고 하면서. 제발 이것만은 그러지 말라고 사정했어요. 처음엔 알았다고 했는데 내가 한번은 외출하고 왔더니 조감독 시켜서 이미 들고갔더라구요. 나중에 빙그레 웃기만 하고. 가구나 자개농 한번 못 들여놨으니까. 안양에 있던 신필름 소품창고에는 없는 게 없었지만. 우리야 지구를 한 바퀴 돌다시피한 인생을 살기도 했고 그래서 쭉 트렁크 살림이었어요.

-1950, 60년대 활동했던 여배우들과 비교하면 체구가 좀 크셨잖아요. 이민 선생님 회고를 보니까 안고 드는 장면에서 다리가 후들거려서 혼났다고 하던데. =하하하하하하하. 이민씨가 남자치곤 호리호리하고 약했어요. <밤의 태양>(1948) 찍을 적에도 을지로 입구에서 교통순경 역을 맡은 김동원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날 가볍게 봤다가 내 위로 엎어진 적도 있어요. NG 나고 나는 창피하고. 그때만 해도 날씬했는데 내가 통뼈여서 보기보다 무거워요.

-배우로서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팬들이 사랑해준 작품이 조금 더 유별나긴 해요. <성춘향>이 그렇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상록수>. 신필름에서 제작한 대작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이 영화로 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고. <다정불심>의 1인2역도 특별하고. 왕비부터 촌부까지 거진 다 해봤는데, 수녀복은 못 입어봤어요.

-1978년 납북되셨던 상황이 궁금합니다. =신 감독과는 이별을 하고 나는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살려보겠다고, 대학까지 발전시키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어요. 학교 부지도 사고, 설계 도면 맡기고. 그 무렵에 홍콩에서 자매결연을 맺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학생들을 우물 안 고기로 키울 것이 아니고 국제적으로 키워서 배우를 만들자. 잘됐다 해서 갔는데 함정이었어요.

-5년 만에 감독님을 다시 만나서 꺼낸 첫마디가 떠오르시는지요. =어떻게 된 거예요, 소리밖에 못하지. 신 감독은 내가 홍콩에서 행방불명됐다는 말을 듣고 어렴풋이 북으로 끌려간 것 아닌가 생각했데요. 신 감독 본인도 납북된 뒤에 최은희 안 왔느냐고 물었는데, 북쪽에서는 중앙정보부에서 잡아 죽였다,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말만 들었다고 하고. 신 감독은 그 뒤로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혹독한 감옥 생활을 했고. 난 전혀 낌새를 못 차리고 있었어요. 북쪽에서는 영화나 방송 일을 해달라고 하는데 갑자기 만나서 좋은 일이 되겠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 입장에선 신 감독이 좀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떼어놓자는 시나리오였을 테고. 나야 5년 동안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고 영화보라고 하면 영화보고 그랬어요. 그때 주사파가 됐어요. 주체사상을 배웠으니까. (웃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서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북쪽에서의 낯선 생활을 견디게 해줬던 건 영화작업 때문이었을 텐데요. =우리를 필요로 하니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주자. 그래서 2년3개월 동안 둘이서 17작품을 했어요. 북쪽에서는 우리보고 배신자라고 하는데 우린 할 만큼 했어요. 북에 처음 가서 한 게 궁중사극인데. 이북에는 사극이 없었어요. 주로 프로파간다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으니까. 의상이나 소품은 거의 내가 맡아서 했어요. <춘향전>과 <심청전> 뮤지컬도 우리가 했고. 또 <홍길동전>이나 <임꺽정> 같은 경우는 우리쪽에서 시켜서 젊은 감독들이 맡았고. 내가 연출한 <약속>은 총알이 쏟아지는 교전 중에도 처녀 교환수가 자리를 지키는 내용인데, 줄거리 말고는 기억이 전혀 없어. 북쪽에서 만든 작품 중에는 <탈출기>가 제일 맘에 들어요.

-소재나 표현의 제약 같은 건 없었나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가 이거 하겠다고 하면 보고나서 아 좋다, 그랬어요. 이데올로기 생각없이 맘대로 하라고 했어요. 근데 영화라는 게 예술이라는 게 자유가 없으면 못해요. 맘대로 하라고 해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으니까.

-탈출까지 고심도 많았을 텐데요. =나야 동유럽에 나가서 미국대사관 보면 몇번이고 뛰어들어가고 싶었어요. 가족들이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몇번 실패한 적이 있는 신 감독은 그때마다 자중하라면서 완전무결한 준비가 안 되면 실행할 수 없다고 그래서 가장 좋은 기회를 본 거죠.

-감독님에게나 선생님에게나 미국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시간들은 가장 원했던 시간들이지만 아마 가장 안타까웠던 시간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신 감독님은 <마유미>부터 유작인 <겨울이야기>를 내놓긴 하셨지만. 그토록 원하시던 <칭기즈칸>은 결국 완성이 안 됐으니까요. =10년 가까운 시간을 저당잡히면서 아끼던 학교도 날아가고, 집안에는 검부러기 하나 안 남았으니까. <칭기즈칸>을 끝내 못하시고 간 게 좀 그렇긴 해요. 어머니 역할을 나보고 하라고 그랬는데. 신 감독은 동양의 영웅이나 몽골의 아버지가 아니라 칭기즈칸의 인간적인 측면을 파헤쳐서 영화화를 준비했어요. 한 20년 됐죠. 북에 가서 시나리오를 쓴 다음에, 그 이후로 마음에 안 든다며 끊임없이 고쳤으니까. 의상이나 디자인까지 다 준비했는데 제작비가 적은 것도 아니고 결국 무산됐어요.

-지금 갖고 계신 꿈이 무엇인가요. =내 말이오? 꿈이 많으면 뭐해요. 학교를 제대로 못한 건 많이 안타깝죠. 팔자에 학교하라는 게 없나봐요.

-10월에 자서전을 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제목이 뭔가요. =신 감독 것은 가제로다 <나는 영화였다>. 내 것은 아직 제대로 못 정했는데 <최은희의 고백> 정도? 하하하. 국내에서 영화 안 한 지가 몇 십년 됐는데 그래도 가끔 알아보는 팬들이 있는 것 보면 감사해요. 보답하고 싶은데 요즘 젊은 영화에 발디딜 틈이 있어야지. 이야긴 그만 하고 이쪽으로 와서 같이 사진이나 하나 찍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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