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피범벅
<도살자> The Butcher/ 김진원/ 한국/ 2007년/ 76분/ 금지구역
<도살자>를 본 관객은 배우들의 신변과 영화를 만든 데빌그루브픽쳐스가 도대체 어떤 일당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한 부부가 어느 도살장에 끌려온다. 이곳에는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가 있다. 그는 괴물의 희생양이 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카메라를 매달아놓고 그들의 사지를 절단하며 영화를 찍는다. 끌려온 사람들의 머리에 4대, 도살장에 1대, 도살업자의 목에 1대씩 달려 있는 총 6대의 카메라는 <도살자>의 공포감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몸에 달린 카메라는 고통과 함께 흔들리고, 거친 사운드는 대사보다 비명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작정한 고어영화인 <도살자>는 공포감 조성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잔혹함까지 놓치지 않는다. 톱에 갈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귀청을 때린 뒤에는 뼈를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는 광경이 여과없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내를 죽이고 자신은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남편의 몸부림이나 목숨을 놓고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하는 도살업자의 만행도 잔인하긴 마찬가지. 그 와중에 도살업자가 어머니와 통화하며 나누는 살가운 대화에 서정적인 음악을 덧입히는 악취미도 있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내내 제발 이 모든 게 쇼였다는 반전이 있기를 바라게 될 듯.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살자>는 그런 자비심 따위를 갖추지 않은 영화다.
비보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플래닛 비보이> Planet B-Boy/ 벤슨 리/ 미국/ 2006년/ 96분/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지하철 역사의 만질만질한 바닥에서 춤추며 뒹구는 아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가. 밥먹고 할 일 없이 왜 춤만 추는지 궁금했던 이라면 다큐멘터리 <플래닛 비보이>를 추천한다. 재미동포 감독인 벤슨 리는 비보이 월드컵으로 불리는 독일의 ‘배틀 오브 더 이어’ 결승에 참가한 일본, 프랑스, 미국, 한국 비보이팀과 대화를 시도한다. 춤의 색깔이 저마다 다르듯 그들이 춤을 사랑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그들에게 비보이는 하나의 문화이면서 예술이거나 자유를 향한 행동이자 살아 있다는 즐거움이다. 남들은 그저 생각없이 춤만 좋아하는 아이들로 바라보지만 비보이의 세계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행복과 갈등이 있다. 나라별 비보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갈등과 꿈, 목표를 털어놓는다. 한국의 비보이들은 군대 생활 동안 굳어버릴 자신의 몸을 걱정하고, 그들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저 번듯한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꾸리기를 바란다. 물론 비보이의 세계를 조망한 만큼 점잔만 빼는 영화인 건 아니다. 그들이 춤을 추는 공간이 곧 그들만의 행성이라고 말하는 <플래닛 비보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춤사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순수 무협액션의 맛
<도시락> The Code od a Duel/ 여명준/ 한국/ 2006년/ 84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영화의 한국은 사적복수가 허용되는 사회다. 만 20살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경관 1명과 공증인 1명이 있는 자리에서 원하는 사람과 결투를 벌일 수 있다. 주인공 영빈은 회사에서는 무능한 직원이지만, 결투의 세계에서는 백전백승의 숨은 고수다. 어느 날 친구 운광의 무술도장을 찾은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닮은 본국을 만난다. 본국은 결투에서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수련을 쌓는 고등학생. 어느 날 운광의 신분증을 훔쳐 결투를 신청한 본국은 결투장소에서 영빈을 만나게 된다. <도시락>은 야만의 사회에서도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그로 인해 친구가 적이 되지만 영화의 고수들은 그럼에도 칼의 섭리를 지키려 애쓴다. 죽음을 맞을지언정 후회하지 않고, 결투와 우정은 별개라는 쿨함도 있다. 연출과 연기, 무술감독을 맡은 여명준 감독은 과거 무협영화에 대한 애정을 곳곳에 드러낸다. 도시에 숨은 고수들의 삶과 아버지와 형제의 복수를 위해 무술을 갈고닦는 모습들이 은근한 유머와 함께 묘사된다. 공들여 찍은 액션이 눈에 띄는 작품으로 독립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영화다.
이방인의 눈에 담긴 한국영화의 오늘
<한국영화의 성난 얼굴> The Angry Young Men of Korean Cinema/ 이브 몽마외/ 프랑스/ 2006년/ 54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프랑스의 다큐멘터리스트 이브 몽마외 감독이 칸과 부산서 만난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인터뷰과 자료 화면으로 단출히 구성된 이 영화는 한국 감독들의 육성에 충실하다. 봉준호와 김지운이 자신의 창작의 원동력과 미국 장르영화의 영향을 직접 말하고, 이창동, 임상수가 권위주의 정부의 잔재가 한국사회의 삶의 조건과 자신들의 영화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 몽마외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조용한 가족>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에서 보이는 비틀린 장르성과 <지구를 지켜라!> <그때 그사람들>에서 묻어나는 사회적 폭력의 기억 등을 탐구한다. <한국영화의 성난 얼굴들>은 외국인이 차린 한식 상찬 같다. 한국 관객의 입엔 맛의 깊이가 조금 부족하지만, 호기심과 애정이 담긴 프랑스 감독의 렌즈를 통해 한국영화를 본다는 이질감이 흥미롭다.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서 듣는 것도 매력. 박찬욱이 왜 자극과 폭력으로 “관객을 못살게 구는지”, 김기덕이 왜 인간의 극단적인 경험에 천착하는지 본인의 언어로 들을 수 있다.
B급 감성이 웨스턴을 뒤집다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몬테 헬만/ 미국/ 1966년/ 82분/ 미국 B무비의 영웅 몬테 헬만 상영작
마카로니 웨스턴이 반영웅을 앞세워 장르를 경쾌하게 비트는 맛을 냈다면, 몬테 헬만의 66년작 서부극은 웨스턴의 한복판에서 시치미 뚝 떼고 완고한 반란을 일으킨 모양새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의 대결 구도는 기괴하게 뒤집어져 있고, 먼지바람 자욱한 황야는 조용한 살육전을 나긋이 감싸안고 있다. 하나 더, 감독 몬테 헬만의 인장을 확인하기 전에 시나리오와 프로듀서와 주연을 한 묶음에 해치운 이가 잭 니콜슨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말끔하고 건장한 미청년 잭 니콜슨이 스크린에 어른거리는 것도 흥미롭지만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기운이 그에게서 물씬 배어나온다는 점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다. 역마차를 터는 첫신부터 범상치 않다. 빼앗는 자나 빼앗기는 자 모두 희생자를 내는데 그들이 터는 재물의 수준이 아무래도 ‘뒷골목 핀 뜯기’스럽다. 이 와중에 흘러나오는 그들의 무심한 표정이 황야의 스산한 법칙을 조용히 반영한다. 본론은 그 다음부터다. 이 무법자들의 오두막 거처를 우연히 스쳐지나가던 카우보이 일행 웨스(잭 니콜슨)와 번과 오티스는 단지 이들 곁에서 노숙을 한 정황 하나로 강도 무리로 취급받는다. 지역치안대의 ‘습격’을 헤치고 간신히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동료 한명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카우보이나 갱스터가 아니라 지역치안대를 비판적 타깃으로 삼은 이 서부극은 당시 세계경찰로 나선 미국 자신에 대한 명백한 알레고리다.
당신은 왜 묶이고 싶으세요?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 히로키 류이치/ 일본/ 2007년/ 90분/ 판타스틱 감독백서: 히로키 류이치 & 금지구역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는 특히 여성에게 불쾌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다큐멘터리다. ‘바쿠시’를 한자로 풀면 ‘縛師’, 즉 묶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적인 흥분을 얻기 위해 결박을 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전문가를 일본에서는 바쿠시라고 부른다.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는 바쿠시들이 하는 ‘긴바쿠’(결박)이란 무엇인지, 묶이는 여성은 누구이고 왜 하는 것인지 등을 물어보는 다큐멘터리다. 여성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바이브레이터>를 만들었던 히로키 류이치가 왜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 같은 ‘바쿠시’를 찍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바쿠시들은 하나같이 그 행위가 ‘커뮤니케이션’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SM이란 것이 또 하나의 사랑의 형태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히로키 류이치는 어떤 해석도 가하지 않고, 묶는 행위를 보여주면서 바쿠시와 여성들의 대답만을 들려준다. 그들이 왜 ‘긴바쿠’를 하고 있는지를.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묻자, 묶였던 여성들은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딱 맞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면서. 그것은 아직 우리의 일상 언어에는 속하지 않는 종류의 ‘희열’인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말 그대로 판타지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60년대 한국 사회를 향한 냉소적 시선
<육체의 문> The Door of the Body/ 이봉래/ 한국/ 1965년/ 106분/ 이봉래 회고전: 희로애락일기
“만약 여자의 육체에 문이 있다면 나는 그 문패에 불행의 문이라고 써놓을 테야.” 60년대 서울역에 도착한 시골소녀들의 삶은 기구했다.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꾐에 빠져 사창가로 팔리거나,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다가 겁탈을 당하거나, 공장에 취직했다가 결국 청계천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야만 했다. 이봉래 감독의 1965년작 <육체의 문>은 과거 한국 멜로영화에서 드러난 이러한 전형성을 품고 있지만, 여타의 영화들과는 달리 암울한 사회에 대해 끝까지 냉소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작품이다. 사창가 생활을 청산하고 증기탕 마사지사로 일하던 은숙은 새로운 삶을 꿈꾸며 증권회사 직원인 만석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은숙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급기야 돈을 빼돌려 그녀의 이복동생과 바람을 피운다. 이봉래 감독은 <삼등과장> <월급쟁이> 등 주로 가족의 화합을 코믹한 터치로 그린 감독. <육체의 문>은 그의 다른 작품과 달리 아무런 화해도 묘사하지 않는 영화다. 애숙은 남성중심의 사회가 원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가지만 가혹한 현실은 그녀를 다시 증기탕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굴레를 묘사한 <육체의 문>은 이번 이봉래 감독의 회고전에서도 유독 도드라지는 작품일 것이다.
트뤼포의 가장 아름다운 엔딩
<화씨 451> Fahrenheit 451/ 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스/ 1966년/ 프랑스 SF 특별전
올해 부천의 ‘프랑스 SF 특별전’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트뤼포의 이 작품과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를 고르면 틀림이 없다. <화씨 451>은 ‘SF 소설계의 시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1951년작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책이 금지된 미래에 가장 각광받는 직업 중 하나는 소방수의 반대말인 방화수다. 그들의 일과는 불법적으로 책을 보는 사람들을 적발해서 책을 모조리 태우는 것.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표지로 실린 <카이에 뒤 시네마>도 불타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도 불탄다. 하지만 어떠한 전체주의 세계에서도 뒤늦게 삶의 열정과 지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로맨티스트들이 있게 마련이다. TV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아내 린다에게 질린 방화수 몽타그도 그중 한명으로, 책을 읽는 소녀 클라리스와 사랑에 빠진 그는 독서가들이 숨어서 살아가는 망명지로 탈출을 시도한다. <화씨 451>은 트뤼포의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트뤼포의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눈이 내리는 숲에서 책을 암기하며 거니는 ‘북 피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쨌거나 <화씨 451>이 원작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예술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린다와 클라리스 1인2역을 맡은 줄리 크리스티는 <닥터 지바고>에서보다도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