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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인생] 귀향, 재발견
김도훈 2007-04-03

# 2002~2006년 _ 귀향

<할로우맨>의 실패와 그로부터 찾아온 5년간의 공백기.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던 폴 버호벤은 결단을 내렸다. 20년 만에 치즈와 풍차의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 영화는 네덜란드 비평가들에 의해 데카당스하고 변태적이고 얄팍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옮겨왔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미국 비평가들은 내 영화가 데카당스하고 변태적이고 얄팍하다고 비난한다. (웃음) 지난 몇년간 미국에서 일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오리온과 캐롤코의 도산, 소니와 함께 만든 영화들의 연이은 실패는 버호벤을 지치게 만들었고, 9·11 이후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국 문화계는 버호벤처럼 날이 드센 작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부시 정부는 스튜디오들에 최대한으로 애국적이 되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크리스천들이 아랍인을 학살하는 <십자군>을 만들기란 애당초 글러 먹었다.”

<블랙북>

귀향은 모험이었다. 48살의 나이로 할리우드로 떠났던 그는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로 돌아왔다. 그가 알고 지내던 네덜란드 스탭들은 대부분 은퇴한 상태였다. 하지만 에너지로 넘치는 늙은이에게 더이상 휴식을 취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는 즉시 네덜란드 시절 작품들의 각본을 맡았던 오랜 친구 제라르 호이트먼과 함께 <블랙북>의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미국을 떠나기 직전 그는 “더이상 미국사회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의 세계가 되어간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제는 20년간 자신의 세계가 되어간 미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냉정하게 뒤를 돌아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 수 없을 영화를 만들자. 그것이 목표 중 하나였다. 1938년생인 폴 버호벤은 2차대전의 악마가 마지막 불길을 내뿜는 것을 보며 자랐다. “레지스탕스와 독일군은 보이는 족족 서로를 쏘아죽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바그다드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하는 그에게 <블랙북>은 9·11 이후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전 지구적 학살극에 대한 풍자로도 적절한 이야기였다. “이걸 할리우드에서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양민들이 나치 가담자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이라크의 아부 그라비 수용소를 떠올렸을 거다. 당연히 잘라내야 했겠지. 할리우드는 위험요소를 흐리멍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나는 선과 악의 분리를 믿지 않는다. 나치는 모두 악당이고 유대인과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영웅이라는 그 따위 개념은 없다.”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까발리는 폴 버호벤의 영화를 거부하지 않았고, <블랙북>은 박스오피스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네덜란드인 100만명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네덜란드에는 1600만명의 인구가 산다. 그건 미국에서 <캐리비안의 해적>을 본 사람 수나 마찬가지다. 안 그런가? (웃음)” 사람들은 이것을 지상 최대의 컴백 중 하나라고 불렀다. 버호벤에게도 <블랙북>은 컴백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본류를 되찾는 컴백이었다. “뭐 컴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최소한 내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다”라는 그의 말은, 묘하게 감동적이다.

# 2007년~그리고 _ 재발견

<블랙북>을 기점으로 중요한 것은, 지난 5년간 실패작으로 취급받아왔던 그의 작품들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스타쉽 트루퍼스>는 9·11 이후의 세상에서는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예견한 보드리야르식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1997년 개봉 당시, 한국의 언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스타쉽 트루퍼스>를 어설픈 풍자로 가득한 여드름 소년들용 전쟁영화로 간주했다. 척박한 사막의 동굴 속에서 벌레들을 끌어내기 위해 미사일을 퍼붓는 전사들의 이미지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상황을 상상해내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세상이 안온했고 버호벤처럼 날카롭고 새된 감독은 필요없었다. 앨 고어는 미국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고, 민주정부가 한국을 구원할 계획이었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쓰레기이며, 나를 두고는 레니 리펜슈탈을 아이돌화하는 나치라고 불러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라. 괴벨스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의 부패한 공기가 지금의 미국을 떠돌고 있지 않은가.” <쇼걸>은 DVD 확장판으로 영화를 재발견한 캠피 문화의 숭배자들에 의해 일종의 컬트가 되었다. 버호벤의 실패작들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데 동참한 사람 중에는 누벨바그의 전설인 자크 리베트도 있다. “<스타쉽 트루퍼스>를 두번 봤고, 볼 때마다 너무 좋았다. 그러나 <쇼걸>이 더 좋긴 하다. 버호벤의 네덜란드 시절 영화들에 가장 가까운 영화다. 위대한 성심이 담겨 있으며, 대본은 진솔하고 순수하다. 물론 모든 버호벤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매우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쇼걸>은 멍청이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바로 버호벤의 철학이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최근의 모든 미국영화 중에서 <쇼걸>은 진실함을 가진 단 하나의 작품이다.” 폴 버호벤은 이후 자크 리베트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보냈다.

<블랙북> 현장

그는 할리우드로 돌아가게 될까. 물론이다. 이미 그는 신작 <아자젤>(Azazel)의 프리 프로덕션에 힘을 쏟고 있다. 러시아 소설 <겨울의 여왕>(The Winter Queen)을 각색하는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한 추리극이다. 밀라 요보비치가 출연을 결정했고, 할리우드의 자본을 무사히 끌어오는 일만 남았다. 그는 결코 “할리우드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다. “<블랙북>은 마치 안식일을 갖듯이 만든 영화다. 나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지막 할리우드영화 <할로우맨>은 <스타쉽 트루퍼스>나 <로보캅>과는 다른 영화였다. 다른 감독이 만들었어도 다르지 않을 영화였다. 새롭게 만들 미국영화는 내가 잘해온, 그런 영화가 될 거다.” 폴 버호벤은 68살이 됐지만 늙은 노장의 기운으로 자신의 세계를 반추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것이다. 피부 두께만큼의 얄팍함과 성기 굵기만큼 두터운 몽상은 버호벤이 결코 버리지 않을 그의 휘발유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모두가 감추려드는 것에 대한 이른 폭로였다. 간혹 ‘싸구려 자아도취’로 묘사되곤 했던 버호벤의 거침없는 영화적 하이킥은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으로 하여금 “이 네덜란드인은 할리우드에서 인간을 가장 혐오하는 그런 인사로 브라이언 드 팔마를 간단히 능가하는 인물”이라 빈정대게 만들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버호벤에게는 최대의 찬사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내가 공을 잡아채서 물에 던져버리곤 했다. 그것이 나의 게임이었다. 나는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재미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 어린 시절의 괴팍한 성질머리야말로 폴 버호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다. 그는 영화의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게임의 법칙을 깨부수는 쾌감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한다. 그리고 깨부술 법칙이 가장 많은 곳은 그를 내친 뒤 뒤늦게 찬사를 보내고 있는 미 대륙이다. 할리우드 재입성의 플랫폼이 되어줄 폴 버호벤의 귀환작 <블랙북>은, 정말이지 2007년 최고의 컴백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재능을 재확인한 할리우드 용병들

나의 살던 고향은 창작의 샘터~

외국인 용병들에게 할리우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돈벌레들의 소굴이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각국의 재능들을 데려다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굴려먹은 뒤 쓸 만한 흥행작을 내놓지 않으면 내뱉는 짓을 무한반복해왔다. 하지만 어떤 용병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걸작을 만든 뒤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60~70년대 러시아영화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례다. 지난 1979년작 <시베리아드>의 국제적 성공을 계기로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커트 러셀 주연의 한심한 액션영화 <탱고와 캐쉬>(1989) 따위를 만들며 몰락해갔다. 정신을 차린 그가 약간의 명성이나마 되찾은 것은 러시아로 건너가서 만든 <이너 써클>(1991)의 성공 덕이었다. 헥토르 바벤코도 대표적인 예다. <거미여인의 키스>(1985)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At Play in the Fields of the Lord>(1991) 같은 평작들로 연명하다 아르헨티나로 돌아갔고, 모국에서 만든 <카란디루>(2003)의 성공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데드 캄>(1989)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가 잭 라이언 시리즈로 소진하던 필립 노이스가 다시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고향 호주에서 찍은 <토끼 울타리>(2002) 덕택이다. <에일리언4>의 실패를 겪고 프랑스로 돌아간 장 피에르 주네가 <아멜리에>와 <인게이지먼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귀환을 꺼리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화권도 마찬가지. 서극은 (팬의 입장에서는 꽤 즐길 만하지만) 홍콩과 할리우드영화의 단점만 절묘하게 이어붙인 <더블팀>과 <넉오프>로 넉오프된 뒤 홍콩에서 만든 <순류역류>로 훌륭하게 귀환했다. 가장 최근의 예는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다. 세 번째 할리우드영화 <헬보이>는 재능의 소진이 염려되는 아슬아슬한 영화였지만, 멕시코로 돌아가서 만든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는 한 다발의 오스카와 함께 델 토로를 구원했다. 고향에서의 휴식은 예술가들의 재능을 초심으로 되돌려주는 마법을 부리는 모양이다. 리 타마호리와 오우삼도 고향행 비행기 티켓을 구입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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