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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미래를 만나다, 레스페스트 영화제
김도훈 2006-11-29

영상의 미래를 호언장담하는 축제의 10주년이 막을 올린다. 전세계 6대륙 45개 도시를 돌며 진행되는 영화제 레스페스트가 오는 12월6일부터 10일까지 5일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다. 매년 레스페스트를 기다려온 고정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주최쪽이 마련한 메뉴는 풍성하다. 30개국에서 건너온 297편의 장·단편영화는 물론이거니와, 레스페스트의 지난 자취를 읽을 수 있는 10주년 특별전 <레스페스트 10년 베스트 단편 컬렉션>과 <레스페스트 10년 베스트 뮤직비디오 컬렉션>의 프로그램 또한 알차다. 개막과 폐막 퍼포먼스, 감독과의 밤, 웨타와 오퍼니지를 오가며 활동 중인 특수효과 전문가 박재욱이 참여하는 ‘영화 <킹콩>과 <괴물>의 비주얼 이펙트 세미나’ 등의 부대행사는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요하는 레스페스트 특유의 메뉴들.

레스페스트를 재기발랄한 소규모 영상 축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에 뒤처진 표현일지도 모른다. 레스페스트는 조너선 글레이저(<탄생> <섹시 비스트>), 미셸 공드리(<이터널 선샤인>) 등 창의적인 작가들을 발견해온 선지적 무대였고, 올해도 닐 블롬캠프, 카터 스미스 등 향후 할리우드를 뒤흔들 잠재력을 지닌 신예들의 단편이 빼곡이 숨어 있다. 비록 지난 1~2년 사이에 벌어진 영상 UCC 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레스페스트에서 상영된 단편과 뮤직비디오들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탄생 10주년을 맞이한 레스페스트가 여전히 지상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대담한 영화제라는 사실은 올해 프로그램의 면면만으로도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장편과 단편, 뮤직비디오, 광고 등 수백편의 영상을 포함한 19개 섹션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무리인 만큼 <씨네21>의 강력 추천작과 추천부문 몇개를 선별해서 소개한다. 자세한 시간표와 문의사항은 레스페스트 홈페이지(www.resfest.co.kr)로.

추천작 소개

<버그 크러쉬>(Bug Crush) 글로벌 단편 3: 공포와 전율 부문/ 감독 카터 스미스/ 미국/ 36분/ 2006년

올해 레스페스트의 가장 인상적인 발견. 창백한 금발 소년 벤은 수줍음 잘 타는 교외 마을의 고등학생이다. 성적으로 별로 경험이 없는 그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전학생 그랜트에게 매혹을 느끼고, 그랜트 역시 벤의 접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랜트는 벤을 자신의 외딴집으로 끌어들인다. 벤에게 그것은 성적인 열망을 따르는 가슴 두근거리는 여행이지만, 그랜트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벌레를 이용한 위험한 여행을 벤에게 제안한다. 십대의 첫 경험(약물과 섹스)을 ‘환각벌레’라는 SF적 매개체로 은유하는 이 36분짜리 중편의 지적, 정서적 감흥은 만만치가 않다. 신인감독 카터 스미스는 대담무쌍하게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적 환상을 구스 반 산트의 세계와 접붙이려는 야심만만한 서커스를 펼치고 있는데,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성적인 에너지와 서스펜스로 관객의 목을 죄는 솜씨는 오래두고 음미할 만하다. 2006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Alive In Johanesberg) 태양 아래 모든 것 부문/ 감독 닐 블롬캠프/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6분20초/ 20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가 배경인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불법체류자(Illegal Aliens) 문제를 다룬다. 요하네스버그에 얼굴이 문어모양으로 생긴 에일리언들이 거대한 비행체를 타고 내려온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 피켓이 아니라 사람들의 편견과 군대의 탄압이다.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의 놀라운 점은 닐 블롬캠프 감독이 SF장르와 디지털 특수효과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디지털 특수효과로 창조한 캐릭터와 배경을 VHS를 연상케 하는 거친 화면의 페이크다큐멘터리로 포장한 뒤 시침 뚝 떼고 관객에게 들이민다. 저예산 특수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사례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는 솜씨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닐 블롬캠프는 최근 수백만장이 팔린 컴퓨터게임 <할로>의 극장용 장편 연출자로 영입됐는데, 게임 팬들이라면 마음을 푹 놓아도 좋을 듯하다.

<라디오헤드 특별전> 총 14작품/ 73분47초/ 조너선 글레이저, 미셸 공드리 외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나는 머저리"라고 외치던 초기의 얼터너티브 사운드는 어느덧 일렉트로니카를 교접한 미래 음악 그 자체로 진화해 고고히 빛을 발한다. 물론 음악만이 전부는 아니다. 라디오헤드는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뮤직비디오가 그들 음악의 또 다른 대변자라는 사실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조너선 글레이저나 미셸 공드리 같은 재능들과 손을 맞잡고 MTV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비디오들을 생산해왔다. 올해 레스페스트 개막 섹션인 <라디오헤드 특별전>은 음울한 음유시인들의 감식가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부문. 조너선 글레이저의 <Karma Police>와 <Street Spirit>, 샤이놀라의 <Pyramid Song>과 미셸 공드리의 <Knives Out> 같은 MTV 고전들이 가득하다. 특히 그랜트 기가 감독한 극도로 미니멀한 뮤직비디오 <No Surprise>를 거대한 화면으로 보는 경험은 문자 그대로 ‘숨이 막힐 것’이다.

<시네마 일렉트로니카>(CINEMA ELECTRONICA) 총 20작품/ 85분58초/ 감독 로버트 헤일즈, 니콜라스 랜달 외

전통적으로 레스페스트의 가장 인기있는 종목인 <시네마 일렉트로니카>는 올해 역시 2006년 제작된 가장 혁신적인 일렉트로니카/힙합 뮤직비디오를 모조리 모아놓았다. 가장 재기넘치는 비디오는 올해 최고 신인 중 하나인 날스 버클리의 <Smiley Faces>. 음악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날스 버클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비디오는 우디 앨런의 <젤릭>에 대한 MTV의 오마주다. 아랍계 남자가 파리 폭동의 한가운데서 화염병에 불을 붙이는 순간을 1초당 1000프레임으로 촬영한 매시브 어택의 새로운 뮤직비디오 <False Flags>와 잠든 사이 친구들에게 몸이 묶이고 온몸에 낙서를 당한 젊은이들이 깨어나는 장면으로 구성된 Justice vs.Simian의 <We Are Your Friends>는 간결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뮤직비디오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제언처럼 느껴진다.

<음식전쟁>(Food Fight) 글로벌 단편1: 예술같은 인생 부문/ 감독 스티븐 네이들만/ 미국/ 2006년/ 5분30초

제2차 세계대전부터 지금에 이르는 인류의 전쟁을 음식으로 표현한 단편. 소시지(독일)가 프렌츠프라이(프랑스)와 피시앤칩스(영국)를 침략하고, 초밥(일본)이 햄버거(미국)의 한 조각을 공격하고, 또다시 햄버거가 초밥에 거대한 고깃덩이를 던져넣는 모습을 통해 지구의 케첩(피)에 젖은 지난날을 돌아보는 재미가 흥미진진하다. 특히 거대하게 솟은 두개의 햄버거 타워를 케밥(아프가니스탄)이 공격하는 장면이나 김치(한국)들끼리 벌건 국물을 흘리며 싸워대는 모습에서는 슬쩍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단출하지만 지적인 유머감각만 있다면 직유법도 구태의연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품. 같은 부문의 <0.08>은 0.08 시력을 가진 스페인 소년의 일상을 따르는 가슴아픈 다큐멘터리. 눈시울이 절로 젖는다.

<락더벨스: 우탱클랜의 재결합>(Rock The Bells) 감독 데니스 헨리 헤넬리, 케이시 수챈/ 미국/ 113분/ 2006년

중국 북파 무술의 본산인 무당파에서 이름을 딴 9명의 힙합 유단자 그룹 우탱클랜은 힙합의 세계를 바꿔놓았다. 그들의 94년 데뷔앨범 <Enter the Wu-Tang>은 격한 비트 위에 고통스러운 샘플을 덧씌워내며 말랑말랑한 서부힙합과는 다른 동부힙합의 진수를 보여주는 선언문이나 다름없었다. 장편다큐멘터리 <락더벨스>는 해체한 우탱클랜 멤버들을 재결합해 힙합 페스티벌의 무대에 올리려는 공연 기획자들의 노력을 따르는 다큐멘터리다. 감독 데니스 헨리 헤넬리와 케이시 수챈은 보통의 음악 다큐멘터리스트들이 했음직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뒷이야기들을 따른다. 보통의 MTV 방송용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전설적인 힙합 무공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과정은 꽤나 감동적이다. 우탱클랜 팬이라면 놓칠 수 없다.

<레스페스트 10년 베스트 단편 컬렉션>(A Decade of Resfest: Ten Seminal Short Films) 총 10작품/ 88분11초/ 감독 피르길 비트리히, 데이비드 엘리스 등

제1회 레스페스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갤러리에서 여러 편의 초보적인 디지털 작품을 상영한 소규모 행사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레스페스트에 초청되는 작품들은 10년 전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던 DIY 수작업 예술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은 것들이다. <레스페스트 10주년 베스트 단편 컬렉션>은 지난 10년간의 레스페스트 초청작들 중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실험한 선지적인 작품들을 모은 흔적이 짙다. 이를테면 99년작 <스낵과 음료>는 초기 로토스코프 소프트웨어의 진화 단계를 보여주는 단편이며, 2001년작 <본 조비의 수영장 청소부>는 UCC 혁명을 이끄는 저예산 아마추어 다큐멘터리의 이른 모습이라 할 만하다. 관객의 망막에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의 향연을 남기는 2004년작 <죽음의 의식>은 슈퍼 슬로모션 촬영기법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작품. 가히 영상으로만 만들어진 앰비언트(Ambient) 음악이라 부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