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관한 한 한국은 별달리 자애로운 국가가 아니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요구는 종종 공동체적 관습법에 의해 묵살되고, 대신 인간의 의무에 대한 규율만이 꼬리를 문다. 국가적 인권의식의 결여는 종종 이웃 아시아 국가에서 온 인간에 대한 무심한 폭력으로 치환되곤 한다. 이는 다른 아시아 민중의 삶을 우리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소극적인 무지가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10회를 맞은 인권영화제가 아시아라는 대륙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오는 5월6일부터 1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의 스크린은 아시아 민중의 삶을 통해 우리를 되비추는 거울로 화할 참이다.
영화제쪽이 준비한 작품은 모두 42편으로, 국내작품, 해외작품, 다시 보는 인권영화, 비디오로 행동하라, 평택미군기지 반대 투쟁,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등 총 6개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다. 올해의 인권영화상 후보들이기도 한 국내작품들은 최근 불거진 몇몇 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환경단체의 염려에도 괴물 같은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된 지금, 갯벌을 지키기 위해 나선 계화의 여성 어민들을 다룬 <계화갯벌 여전사전2>는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는 작품. <우리는 일하고 싶습니다> <경찰청고용직노조, 1년의 투쟁>처럼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띈다.
해외작품 섹션에는 지난한 분쟁의 과거를 통과하며 미래를 꿈꾸고 있는 아시아 민중의 삶을 사려깊게 기록한 작품들이 많다. 30년간 미해병의 실탄사격 연습지역이던 필리핀 쿠아리 마을의 고통(<쿠아리>),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문화적 독립을 꿈꾸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의 투쟁(<웨스트 파푸아>), 미국과 프랑스의 천연가스 파이프 라인 설치 때문에 고향을 잃고 강제이주당한 미얀마 농민들의 슬픔(<책임회피>), 미군의 침공으로 고통받는 이라크 사람들의 삶(<종려나무 그늘>) 등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아시아 민중의 마음이 스크린 속에서 말을 건넨다. 쿠바의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영문도 모른 채 수감된 스웨덴 시민 메하디의 이야기를 다룬 <관타나모, 전쟁의 새로운 규칙>은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던 마이클 윈터보텀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 개봉하기 전에 봐두면 좋을 작품이다.
모든 작품들은 언제나처럼 무료로 상영된다. 특히 인권영화제는 ‘본다’는 의미보다는 ‘참여한다’는 의미가 큰 만큼 부대 활동을 챙겨두는 편이 좋다. 미얀마 국경을 넘은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버마, 희망을 말하다>가 조계사 건너편 평화박물관에서 5월4일부터 21일까지 열리고, 5월19일 오후 6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미얀마에서 천연가스 개발에 착수한 대우인터내셔널의 의도를 파헤치는 컨퍼런스 <버마 가스개발, 무엇이 문제인가>가 열린다. 미얀마와 필리핀에서 온 민중가수들과 국내 이주노동자 밴드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회 <아시아, 또 다른 우리>가 5월13일 오후 3시30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릴 예정이다.
프로그래머 추천작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The Happiest People in the World/ 샤히 딜-리아즈/ 2004년/ 94분/ 독일 런던 경제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라고 한다. 영화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젊은 방글라데시 감독은 자연재해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모국인들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지 알아보기 위해 수도 다카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난 감독은 사회적 문제를 찾아다니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일상을 기록한다. 아역배우 출신의 소년은 릭샤(리어카)를 끌고 돈을 벌며 영화 스타를 꿈꾸고, 한 여인은 런던과 다카를 오가며 성공적인 사업을 꾸려나가고, 한 남자는 벵골 영화계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같은 영화를 만들기를 기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을 훌륭한 다큐멘터리라 일컫는다면, 그것은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면서도 감상적인 접근을 물리치는 카메라의 시선 덕이다. 희비극으로 뭉쳐 떠내려가는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대단한 정서적 울림을 이끌어내며, 이는 행복을 거시적 수치 따위로 재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명제를 관객에게 전해준다.
<차이나 블루> China Blue/ 미챠 펠레드/ 2005년/ 86분/ 캐나다 상하이의 스카이라인이 한층씩 높아질 때마다 중국의 자본주의 신화도 높아져간다. 하지만 성공의 명암에 숨어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체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캐나다 감독 미챠 펠라드는 중국 소도시에 자리한 한 수출용 청바지 공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가난한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16살의 자스민과 직장 동료들이다.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은 열악한 공장 기숙사에서 청춘의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은 돌아가는 미싱소리와 함께 현실에서 끝없이 멀어져만 간다. <차이나 블루>는 종종 보는 이를 분노케 한다. 생산 계약을 위해 공장을 찾아온 미국과 프랑스, 영국 바이어들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분명히 인지함에도 최소 가격으로 돈을 벌기 위해 계산기를 두들겨댄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한가요?” 백인 여자 바이어는 그들이 행복하다는 공장장의 대답에 카메라를 보고 멋쩍은 듯 웃는다. “그들이 행복하다면 된 거죠. 다 좋은 거지.” <차이나 블루>는 제10회 인권영화제 개막작이다.
<웨스트 파푸아> West Papua/ 데미안 페이어/ 2002년/ 52분/ 프랑스 웨스트 파푸아는 40년이 넘도록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땅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1년에 무력으로 파푸아를 침공했고, 인구의 1/10에 달하는 10만명의 파푸아인이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며 문화와 언어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이는 웨스트 파푸아의 막대한 천연자원 때문이었다. 물론 그 뒤에 중국, 일본, 영국, 미국 등 다국적 회사들이 숨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된 식민지배 아래에서도 국기 ‘모닝스타’를 버리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들의 저항을 알지 못한다. 국기를 게양하는 것만으로도 10년 넘는 형을 살아야 하는 땅. 고문을 행한 살인경찰이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 땅. <웨스트 파푸아>는 동티모르의 독립전쟁에 눈과 귀를 기울이던 서구의 양심을 잊혀진 땅 웨스트 파푸아에도 돌려보려는 필사적 노력의 산물이다.
<종려나무의 그늘> In The Shadow of the Palms/ 웨인 콜스-제니스/ 2005년/ 90분/ 호주 <종려나무 그늘>은 <CNN>으로 각인된 이미지의 오해를 부수고 진짜 이라크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다큐멘터리다. 호주 출신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바그다드를 방문한 것은 전쟁이 발발하기 6주 전. 그곳에는 매일매일의 삶이 있었다. 가족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파티를 하고, 레슬링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은 연습에 한창이고, 노인들은 찻집에 앉아 장기를 두고,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 나가 전쟁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은 무너진다. 사람들은 미군의 포격을 맞고 무너져내린 집더미에서 죽어가는 가족을 구해내고,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카메라를 향해 분노한다. “우리는 더이상 할 일이 없다. 직업도 없다. 왜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찍는가.” <종려나무 그늘>은 서구 문명이라 불리는 미사일 더미들이 오랜 페르시아의 수도와 인간들의 문명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에 대한 탄식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