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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영화의 마법을 기다리는 제56회 베를린영화제 개막 전야
글·사진 김도훈 2006-02-14

유럽의 낡은 도시들은 미래를 꿈꾼다. 파리는 교외에 거대한 미래도시 라데팡스를 건설했고, 런던은 썩은 물이 고인 듯 흐르던 템즈강 하구의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베를린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만나는 교차로에 미래를 새겨두었다. 영화제의 주요 상영관이 모여 있는 포츠담 광장은 통일 베를린의 이상향이다.

<메트로폴리스> 포스터를 닮은 도시, 베를린

현대 건축예술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곡선과 직선이 철골과 유리로 현실화된 이곳을 보노라면 프리츠 랑이 그려냈던 독일의 미래가 눈앞에 솟아 있는 듯하다. 마침 소니 센터에 위치한 영화박물관이 창가에 걸어놓은 것도 커다란 <메트로폴리스>의 포스터였다. 프리츠 랑이 살아서 포츠담 광장을 보았다면 흡족해했거나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영화들

제56회 베를린영화제가 개막을 하루 앞두고 있다. 올해 영화제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정치’다. 디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올해 경쟁작들의 경항에 대해 “특히 정치적이며 리얼리즘 계열에 가깝다. 세계화, 분쟁과 사회적 소통의 저하에 대한 고민 등 지금 세상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작품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영화가 일종의 정치적 선언임을 주창해온 베를린의 전통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현지 언론과 영화제 관객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고 있는 작품 역시 마이클 윈터바텀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불법으로 감금되어 인권을 유린당한 세명의 모슬렘이 주인공인 이 영화는 베를린의 <화씨 9/11>이 될 것이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화제 역사상 최초로 두편의 이란영화를 경쟁부문에 초청한 것도 베를린의 정치적 행보를 시사하고 있다. 테헤란 근교의 빈민촌을 다루는 라피 피츠의 <지금은 겨울이다>(It’s Winter)에 이어 여성에게 금지된 축구경기장 입장에 도전하는 소녀를 그린 자파르 파나히의 <오프사이드>도 뒤늦게 경쟁부문에 합류했다. 물론 경쟁부문의 모든 영화들이 노골적으로 정치적 화두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포츠담 광장의 풍경. 영화제 대부분의 행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열린다.

베를린의 열혈 관객은 이미 이틀 전부터 티켓 부스에 길게 줄을 서서 남은 열흘을 위한 예매 전쟁에 들어갔다.

하나 “사회적인 현상을 조망하고 있는 다른 여러 경쟁작 역시 나름대로는 모두 정치적이다”라는 집행위의 말처럼, 올해 경쟁부문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영화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12년간 복역했던 강간범의 갈등을 다루는 마티아스 글라스너의 <자유의지>(Free Will), 보수적인 가톨릭 교육을 받은 소녀에게 행해지는 폭력적 엑소시즘을 다루는 한스 크리스찬-슈미트의 <레퀴엠>, 보스니아 집단 강간의 혈흔을 되짚는 야스밀라 즈바닉의 <그르바비카> 등 독일 자국이 출품한 영화들 역시 하나같이 무겁게 침잠된 세계의 거울이다.

그러나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지금, 베를린의 예상처럼 영화가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지금 베를린의 가장 큰 이슈는 마호메트 풍자만화로 촉발된 ‘문명충돌’이다. 하루 종일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CNN과 독일 방송들, 가판에 뿌려진 일간지의 일면은 세계 곳곳에서 불타오르는 덴마크 대사관과 국기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영화가 정치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베를린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은 “올해 영화제는 참으로 적절치 않은 시점에 개최되는 느낌”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영화제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호소하고 나섰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레드카펫을 밟는 스타들과 영화나 구경하며 열흘 동안 소란을 피워도 되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축제는 필요하다. 베를린영화제가 정치색이 짙은 영화제임을 노골적으로 자처해왔다손 치더라도, 영화제 자체가 정치적인 시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이슬람 교도들이 캐리커처를 이유로 들어 서방의 사고방식에 폭탄을 투척할 기세로 날뛰는 이 시점에서, 올해의 축제는 분명히 정치적 선언의 장으로 화할 운명에 놓여 있다.”

풍성한 상영작, 늘어난 시상 부문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이번 베를린영화제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영화다.

사실 정치적 논쟁의 풍성함을 젖혀두고라도,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꽤 풍요로운 내실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시상 부문과 상영작의 수도 예년보다 훨씬 늘었다. 세명의 독립적인 국제심사위원단에 의해 선정되는 ‘최고의 첫 영화상’(Best First Feature Award)이 새롭게 제정되었고, 퀴어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테디상’의 2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와 상영회도 다채롭게 열릴 예정이다. 특히 ‘테디상 20주년 트리뷰트’상영에서는 지난 20년간 주목받았던 36편의 퀴어영화가 관객을 만나게 된다. <피터팬의 공식>과 <방문자> 같은 한국영화를 비롯해 29개국으로부터 초청된 젊은 작품들이 선보일 포럼 부문의 활기는 여전하고, 파노라마 부문 역시 33개국으로부터 온 37편의 극영화, 14편의 다큐멘타리, 23편의 단편영화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물론 (지난해처럼 갑작스레 취소될 것을 걱정한) 주최측이 자세한 명단을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시고니 위버, 내털리 포트먼, 히스 레저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벌일 레드카펫 행사 역시 예년보다 풍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화제가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내일부터 열흘간. 1만8천명의 게스트와 3800여명의 기자단이 베를린 팔라스트 부근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다닐 것이다. 물론 진짜 주인공은 수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반 관객이다. 이미 팔라스트 근처 쇼핑몰에 자리잡은 티켓 판매소는 “그런 기자 배지가 있으면 이렇게 줄을 안 서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며 기자를 향해 푸념하는 백발의 할머니로부터, 앞으로 열흘은 빨지 않아도 될 군복 재킷을 걸친 10대 히피 소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독일 관객이 줄을 잇고 있다. “정치적인 영화가 많고 날씨가 후지다고 해서 영화제가 우울하기만 하겠나. 오락과 마법은 언제나 베를린영화제의 일부다”라는 코슬릭의 항변을 새겨듣지 않더라도, 마법은 티켓을 거머쥔 관객의 얼굴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우박과 진눈깨비마저 그 마법의 일부로 여기는 베를리너(Berliner)들에게, 앞으로 열흘간의 베를린은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영화의 메트로폴리스로 화할 참이다.

EFM(유러피안 필름 마켓)의 활기

“기록 경신이다! 뭘 더 바라겠는가”

디어터 코슬릭

주최측이 오랫동안 공들여온 EFM(유러피안필름마켓)의 행보는 어느 때보다 의기양양하다. 그동안 데비스 빌딩에서 열렸던 마켓은 올해부터 유서깊은 19세기 건물을 새롭게 단장한 마르틴 그로피우스-바우에서 열릴 예정이며, 모두 354개의 영화사가 참여한 올해 EFM은 지난해보다 무려 45퍼센트나 덩치를 불렸다. 한 독일영화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하루에 10건 정도의 미팅을 하며 칸영화제 스타일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올해는 정말 심하게 바빠졌다”며 행복한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관계자들 사이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영화나 보러 다니는 편안한 장소로 인식되었던 베를린영화제가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시장으로 스스로를 쇄신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실 이 같은 활기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열리던 AFM을 올해부터는 가을에만 개최할 것이라고 선언할 당시부터 예견되기도 했다. 봄 AFM이 사라지면서 EFM은 봄의 칸영화제 마켓과 가을의 AFM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현재 영화제측은 내외적으로 성공적인 리모델링을 마친 EFM의 활기에 잔뜩 고무된 상태. 디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기록 경신이다! 더 많은 회사! 더 많은 영화! 더 많은 평론가들! 더 많은 모든 것들! 뭘 더 바라겠는가”라며 말 그대로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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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지원 진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