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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진짜 사나이, 배우 김희라 [1]
박은영 2006-01-04

10월 어느 날, 영화 <사생결단>의 고사 뒤풀이 자리에 배우와 스탭 모두가 모였다. 이 자리의 최고참 어른으로서 먼저 마이크를 건네 받은 이는 김희라였다. 살집이 있고 풍채가 좋던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서, 얼굴도 홀쭉해지고, 머리도 하얗게 세고, 걸음걸이도 불안하고, 발음도 어눌해졌다.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사이, 그는 정계 진출에 실패했고, 건강을 잃었다. 가족 덕에 재활에 성공했다는 미담이 알려졌지만, 이렇게 빨리 배우로 현장에 복귀하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좌중에 옅은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김희라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전엔 이 나이 되면 공기 좋고 물 좋은 데서 요양하고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영화 찍고 있을 줄 몰랐는데, 기왕 하기로 한 거, (우렁차게) 내 ‘사생결단’으로 한번 노력해보리다. 파이팅!” 누군가는 소름이 돋고, 누군가는 울컥해진 채로, 덩달아 화이팅을 외치고 말았다고 한다. 용맹하고, 의리있고, 호탕하고, 강적과의 싸움을 즐기고, 술을 좋아했다는 <삼국지>의 장비를 빼닮았던 배우. 김희라가 여전한 그 기백으로 돌아왔다.

부산에 29년 만의 추위가 찾아왔다던 12월의 어느 오후, <사생결단>의 촬영 막간에 난로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희라에게 현장에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피곤해. 하나도 안 좋아.” 무뚝뚝한 답변과 그보다 몇배 더 긴 침묵만이 돌아온다. 하지만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내 김은정씨에 따르면, 평소엔 아침에 깨우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촬영이 있는 날이면 새벽에 혼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차편을 알아보라고 재촉한다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런 기분 모른다.” 시간이 흐르자, 그가 문득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같이 모여 서로 의논하고 촬영하는, 여기가 바로 내 고향이다. 고향을 떠났다 돌아오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그동안 얼마나 변했나 실감하게 되고 그렇다.” 원로 영화인들의 단체 사진을 가리켜 자신의 ‘가족 사진’이라며 울먹이던 TV 속(KBS <인간극장> <미워도 다시 한번> 편)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며, 영화라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 그가 겪었을 고독의 깊이를 헤아려보게 된다.

<사생결단> 촬영현장.

김희라는 류승범의 삼촌으로 나온다.

황정민과 류승범이 함께하는 <사생결단>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마약 딜러 상도(류승범)의 삼촌으로, 마약 때문에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망가뜨린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조카만은 그 세계에 몸 담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류하지만, 돌아오는 건 원망과 분노의 화살뿐이다. 밖으로 도는 조카를 찾아갔다가 얻어맞는 수모도 당한다. 하지만 무력하고 비참한 노년처럼 보이는 ‘상도 삼촌’은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커다란 한방’의 감동을 보여준다. 서서히 몸을 풀어가는 중인 김희라에 대해 <사생결단>의 제작자인 심보경 MK픽쳐스 이사는 “삼촌 역할은 범상치 않은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걸 표현해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사실적인 연기를 주로 하셨기 때문에 호흡이나 톤을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촬영이 진행될수록 영화의 필을 정확히 이해하고 준비해 오시는구나 실감하게 된다”고 일러준다. 김희라 스스로 “뽕영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도, 다른 영화와 드라마를 제치고, 8년 만의 재기작으로 굳이 <사생결단>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할이 딱 나다. 내가 내 역할을 하는 거다. 남이 봐서 합당하게 여겨질까, 그런 생각하면서 연기하고 있다.”

서민의 친구, 시대의 반영웅

30대 전후의 세대들은 <TV 손자병법>의 장비로 기억하는 정도겠지만, 1970년대 액션영화를 즐겨 보았던 세대에게 김희라는 각별한 추억일 것이다.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 등 선이 굵은 얼굴, 쩌렁쩌렁 호령하는 듯 풍부한 성량의 목소리를 지닌 그의 개성은 남성성이 강한 액션물이나 시대극과 특히 잘 어우러졌다. 1969년 <비 나리는 고모령>으로 데뷔한 김희라는 액션물이 퇴조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왼손잡이 사나이> 시리즈나 <시라소니> 등의 다양한 액션물을 선보였다. 액션은 당시 그가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던 만큼 그 자신도 애착을 갖고 있는 장르. 청소년 축구 선수 출신이었던 김희라는 액션에 주력하기 시작하면서, 합기도와 불무도 등 도합 23단까지 무술 실력을 쌓기도 했다. “젊어서는 액션물이 좋았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진짜로 치고받고 싸우고. 최대한 아슬아슬해 보이도록 연출하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왼손잡이 사나이> 시리즈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몸 씀씀이가 좋았던 영화로 기억되고, 유리창을 깨고 나오거나 하는 당시로선 첨단의 액션을 선보였던 작품이라서다. 그땐 요즘처럼 욕하고 주접떨다 투닥투닥하는 액션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통’ 액션이었다.”

그렇긴 해도 김희라를 ‘왕년의 액션 스타’라고 부를 수만은 없다. 그는 장르와 역할에 한계를 두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선보였고, 어떤 연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3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에 개성있는 연기자가 많았다. 신영균, 최무룡, 박노식, 허장강, 김진규, 황해, 장동휘…. 다들 확실한 개성이 있었다. 연기자의 길로 가려면,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뭔가가 있어야 하잖나. 그래서 그걸 만들기 위해 그분들을 찾아가서 배운 거다. 그분들의 개성을, 때에 맞춰 잘 써먹은 거지.” 신필림 전속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여러 감독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에 고사했고, 결과적으로 “임권택, 김효춘, 설태호, 정진우, 이장호…. 의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아껴준 감독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전성기 작품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시대성’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쾌남아> <의리에 산다> <오사카의 외로운 별> 등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용맹한 애국 청년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에서도 시대와 정권이 필요로 하던 ‘나라 위하는 마음’을 전파하곤 했다. 당대 인기 배우들이 그러했듯 반공영화에도 상당 편수 출연했는데, 평생 추적당하는 빨치산 ‘짝코’ 역으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짝코>의 경우는 의도와 무관하게 반공물로 둔갑하는 웃지 못할 소동도 겪었다. 실종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신상옥 감독의 <증발>은 도발적인 소재 때문에 철퇴를 맞는 등 스캔들이 되었던 작품이다.

<시라소니>

<짝코>

<꼬방동네 사람들>

<석화촌>

김희라는 애국 청년뿐 아니라 건달 두목과 악당 등의 다양한 역할을 섭렵해갔는데, 선과 악을 떠나 모든 역할에 공통적으로 ‘반항’적인 감성을 가미했다. 초기작 <사나이가 왜 울어>에서 가죽옷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삐딱한 청춘으로 분한 그의 외양과 분위기는 확실히 젊은 시절 말론 브랜도를 닮아 있다.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에서도 그는 창백한 지식인 스타일이던 주인공과 하나에서 열까지 대조적인 이복형으로 출연해, 동생의 연인을 사랑하지만 떠나보내기 위해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어둡고 복잡한 청춘의 이면을 체현해 보였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로 계속된 이장호 감독과의 작업에서 김희라는 반항아의 이미지에 그악스런 삼류인생의 리얼리티와 인간미를 보탰고, 이는 <꼬방동네 사람들> <수탉> 등으로도 이어져 갔다. “1980년대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았는데, 그만큼 작품의 리얼리티를 살려낼 현장성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김희라에겐 그런 현장성을 발현하는 동물적인 기질 같은 것이 있었다. 또 이대근이나 백일섭 등 많은 배우들이 그 아버지인 김승호씨 연기 스타일을 흉내냈지만, 김희라는 달랐다. 고유한 반항적 기질 같은 것이 있었다.”(이장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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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