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배우를 만나면 꼭 하게 되는 말이 있다. 30대 여배우가 주인공인 시나리오가 많지 않아 힘들지 않나요 하는 질문. 한국영화가 많이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여주인공이 돋보이는 영화는 여전히 적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인어공주> 촬영현장에서 만난 전도연과 <청연> 촬영현장에서 만난 장진영에게 똑같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요. 여성영화가 많지 않죠. 나이가 많아지면 더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이영애 주연의 <친절한 금자씨>가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는 상황은 반갑다. 그간 한국영화 흥행작 가운데 여성영화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제작의 전반적 기류에 작은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활동 폭에 제한이 있는 건 30대 여배우만이 아니다. 젊은 여배우들에게 주어지는 배역도 그저 보기 좋은 예쁜 인형이 되길 요구하는 영화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원천봉쇄되기도 하고 거꾸로 예쁘기만 하면 연기를 잘하건 못하건 괘념치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연애의 목적>과 <웰컴 투 동막골>에서 진가를 보여준 강혜정의 등장은 반갑다. 여성이 중심인 영화도 아니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 영화지만 <웰컴 투 동막골>의 강혜정은 전쟁터 가운데 자리잡은 천국, 동막골 그 자체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며 강원도 사투리로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강혜정이 아니었다면 동막골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여겨질 만큼 그녀의 연기는 빼어났다.
눈치챘겠지만 지난주 이영애 인터뷰에 이어 이번주에 강혜정 인터뷰를 기획기사로 비중있게 다루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시야를 좀더 넓히면 최근 여배우들의 활약이 이영애, 강혜정에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일본에서 개봉한 <린다 린다 린다>의 배두나를 보자. 지난주 통신원리포트 지면에서 이 영화가 일본에서 호평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김영희 도쿄 통신원은 여기 덧붙여 <씨네21> 블로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한국의 웬만한 남자배우나 탤런트가 모두들 일본에 들러 팬미팅을 하는 모습을 계속 듣고 보다보니, 그런 식의 ‘규모’의 한류에 좀 질려 있기도 했다. 규모는 작지만 자기한테 딱 맞는 역을 고른 그의 모습이 참 좋다(뭐라 해도 이번 작품의 배두나의 모습은 <플란다스의 개>를 연상시킨다).” 강혜정에 앞서 20대 개성파 여배우의 시대를 열어젖힌 배두나는 역시나 배두나다운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넓혀가는 중이다.
섣부른 예상이지만 2005년은 여배우들이 한국영화를 구한 해로 기억될지 모른다. 곧 개봉할 <가발>의 유선, 채민서 두 배우도 가능성에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연기를 보여줬고 앞으로 개봉할 영화들 가운데에도 여주인공의 비중이 높은 영화들이 상당수다. 김정은의 <사랑니>, 엄정화의 <오로라 공주>, 장진영의 <청연> 등이 그것. 올해 상반기를 돌아봐도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마파도>의 놀라운 성공이다. TV 탤런트로 익숙한 아줌마 배우들이 300만 관객을 끌어모으지 않았던가. 좋은 여배우가 많아져서 여성영화가 많아진 것인지 여성영화가 늘어서 좋은 여배우를 발굴할 기회가 생긴 것인지 원인과 결과를 선명히 가르긴 힘들 것이다. 아무튼 이건 좋은 신호 같다. 적어도 연기는 남성이, 미모는 여성이 담보한다는 해괴한 방정식을 가진 영화는 줄었다는 증거 아닐까. 안 그래도 한국의 연기파 배우 하면 매번 남자배우만 떠올리는 세태가 지겹던 차라 성급히 여배우 전성시대를 선포하고픈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