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디지털 삼인삼색’, 그 여섯 번째 프로젝트를 완성한 감독들은 쓰카모토 신야, 송일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다. 쓰카모토 신야는 전매특허에 가까운 신체의 상상력으로 재장전했고, 송일곤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즐기며 연극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정글을 배경으로 이미지의 편린들을 모아서 영화 안 세계와 영화 바깥 세계를 공존시킨다. 극장에서의 상영 순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의 욕망>, 쓰카모토 신야의 <혼몽>, 송일곤의 <마법사(들)>이지만, 여기서의 소개순서는 <혼몽> <마법사(들)> <세계의 욕망>으로 한다.
<혼몽>.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남자는 좁은 몇뼘 간격의 벽 사이에 갇혀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뿐 아니라, 왜 거기 그렇게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혼몽>은 영화의 주인공인 벽 속에 갇힌 남자(감독인 쓰카모토 신야가 직접 주인공을 연기한다)가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모습에 거의 모든 장면을 할애한다. 인과가 없으므로 내러티브가 중요치 않고, 상대방이 없으므로 관계의 갈등 또한 찾을 수가 없다. 신체의 불온함에 특히 민감한 감각을 갖고 있는 쓰카모토 신야는 여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지속시키기보다 몸뚱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쪽으로 질문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오로지 그 벽과 마주한 육체의 맥박을 광각의 앵글과 들고나는 초점들, 떨림의 운동으로 포착해낸다. 쓰카모토 신야가 즐겨 추구하는 ‘파괴적인 공간에서의 고독한 주인공의 사투’가 여기서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뒤틀린 영화적 기하학과 세포학으로 무장한 그 상상력이 쾌감의 끝이나 혹은 사유의 끝을 끌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혼몽>은 쾌락의 B급무비도 철학적 예술영화도 아닌 그 중간쯤의 벽에 갇혀 있다.
<마법사(들)>. 어느 산중에 있는 술집. 젊은 술집 주인(정웅인)과 친구(장현성)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곁들여 진지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때 한 스님(김학수)이 술집을 찾는다. 그 이상한 스님과 이야기 벗을 하던 친구는 술집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간다. 그러면 이제 그곳은 장소도 시간도 바뀐 과거의 어느 자작나무 숲이다. 거기 여자친구 하영(강경헌)이 웅크리고 있다. 그 둘은 이미 자살하여 죽어버린 친구 자은(이승비)을 떠올린다. 어느 순간 혼령처럼 자은이 거기 나타나고 카메라는 다시 그녀를 따라 장소를 이동하고, 시간은 다시 다른 때로 와 있고, 거기에는 자은의 남자친구였던 술집 주인이 과거의 모습으로 있다. <마법사(들)>의 연결은 이런 식이다. 총 4개의 공간을 하나의 카메라가 실제 시간으로 연이어 잡아낸다. 따라서 인물들의 등·퇴장을 따라 연결되는 네개의 연이은 세트 공간은 네개의 무대이며, 네번의 막이며, 하나의 숏 안에 들어 있는 네개의 신이고, 네개의 시간이다. 물론 이 화술은 제목이 반영하듯 영화 자체의 느낌을 마법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고안된 설정일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들)>는 영화적 마법을 찾는 대신 지나치게 연극성에 의존한다.
<세계의 욕망>. 경이로운 것은 이 영화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언제나 이 질문을 포함한다. 그리고 언제나 중첩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의 욕망>에는 한편 또는 두편의 영화가 있고, 그걸 찍는 스탭들의 모습이 있다. 그들이 찍는 영화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밤장면은 뮤지컬이고, 낮장면은 도피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다. 밤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영화와 낮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 영화 이렇게 두편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 가르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큰 의미도 없다. 게다가 영화 한편의 낮과 밤, 또는 낮과 밤의 두편의 영화를 찍는 스탭들의 모습과 목소리는 다시 그들이 찍고 있는 그 영화 이미지에 섞여들어가면서 혼동을 준다. 때때로 카메라 뷰파인더상의 이미지, 사운드가 없는 모니터상의 이미지로만 화면을 채우기도 한다. 여기에 영화의 일부인지 아니면 스탭들이 쳐다보는 밀림인지 알 길 없는 인서트컷들까지 모이면 <세계의 욕망>에 영화 안과 바깥이란 아예 없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 섞여들어가는 과정이 생기는 것이다. 즉, <세계의 욕망>에는 중심적인 이미지가 있고 나머지 인서트 이미지가 있는 게 아니라, 모조리 차등없는 인서트 이미지들의 조합만 있다. 이미지의 경중이 없다. 그럼으로써 이미지가 해방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편집의 작가이다. 그 창조적인 배열 방식으로 이미지의 해방감을 가져오는 독창적인 시네아스트다. <세계의 욕망>은 단지 몇개의 배열 요소만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영화 비기에 가깝다. 이 영화 한편 덕에 여섯 번째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는 가치를 갖는다.
아시아 디지털 영화의 미래를 낳는다
‘디지털 삼인삼색’은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첫해부터 시행해온 주요 프로젝트다. 일찍부터 디지털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아시아 각국의 세명의 감독을 모아 중편영화 세편을 만들어내도록 기회를 제공했던 것. 그동안 로카르노영화제, 밴쿠버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 진출의 활로를 넓혔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작품들을 모아 DVD 박스로 출시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리고 6회째 행사에 이르러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된 것이다. 참여한 감독만 총 18명인 그동안의 ‘디지털 삼인삼색’, 과연 완성된 영화들은 어떤 것들인가?
제1회 김윤태의 <달 세뇨>, 장위안의 <진싱 파일>, 박광수의 <빤스 벗고 덤벼라>로 시작한 이후 2회에는 지아장커의 <공공장소>, 존 아캄프라의 <디지토피아>, 차이밍량의 <신과의 대화>가 만들어졌고, 3회에는 ‘전쟁, 그 이후’라는 공통적인 화두를 두고 왕샤오솨이의 <설날>, 문승욱의 <서바이벌 게임>, 스와 노부히로의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가 완성됐다. 4회부터는 다시 자유 주제를 놓고 아오야마 신지의 <처마 밑의 부랑자>, 박기용의 <디지털 探索>, 바흐만 고바디의 <다프>, 5회에는 봉준호의 <인플루엔자>, 유릭와이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이시이 소고의 <경심>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몇개의 대표작도 나왔다. 우선 지아장커의 <공공장소>. 디지털영화의 미학을 믿는 지아장커는 이 영화에서 개인이 아닌 군중을 통해 현대 중국사회를 보여준다는 작정을 했고, 불안정한 중국의 분위기를 거친 디지털의 질감으로 담아냈다. 한편, 3회에 만들어진 스와 노부히로의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는 역사에 대한 관점과 영화적인 형식이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영화는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부탁으로 영화 출연을 위해 일본으로 한국 배우 김호정이 건너간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 자신의 시점과 한국 배우 김호정의 시점을 따라 한·일 양국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히로시마의 역사를 어떻게 영화에 담아낼 것인가를 둘러싸고 감독과 배우의 시점이 교차하는 흥미로운 영화다. 4회에는 아랍지역의 대중적인 타악기 다프와 그것을 만들어 파는 음악가의 가족을 중심으로 현실의 아픔을 전한 바흐만 고바디의 <다프>가 주목할 만했다. 5회에는 봉준호의 <인플루엔자>가 독특했다. 캠코더, CCTV 등등 사회 도처에 널려 있는 이미지들을 모아 한 인간 조혁래의 가상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는 것.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짚어낸 작품이기도 했다. 6회의 대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의 욕망>. 제작비 5천만원에 30분 분량의 디지털영화. 아시아의 감독들은 이 작은 제한만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화두를 풀어낼 기회를 제공받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