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카오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김지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달콤한 인생>이 표방하는 구심점은 누아르다. 장르, 스타일, 양식, 사조, 경향, 현상, 운동, 톤, 더러는 아무것도 아닌 비평적 사기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누아르는 이미 영화적 규정의 느슨함에 다다른 개념이다. 누아르라고 불리기보다 언제나 다른 무엇과 함께 말해져야 성립이 가능하거나 또는 누아르적인(noirish), 누아르성(noirness)이라는 애매한 말로 불리는 것이 더 옳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누아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때문에 “액션이 가미된 피범벅 누아르 러브스토리”라는 <달콤한 인생>에 관한 김지운의 복잡한 자기 규정도 이상할 건 없다.
운명적 패배 앞에 쿨한 척하는 남자들의 이야기
한때 한국적 누아르라고 불리던 영화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부여한 운명을 탓했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죽도록 그리워했다. 마지막 남은 순수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고 또는 몸부림을 치면서 순수함을 회복하고는 피로 물든 육신이 되고, 시체가 되어 간절하게 이미 지나간 꿈을 염원했다. <달콤한 인생>은 그 이야기만으로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오히려 많은 차이가 있다. 김지운은 그런 한국적 누아르가 있었음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네 번째 영화를 만들었거나, 암암리에 염두에 두고 완전히 다른 곳에 서겠다고 비켜간다. <달콤한 인생>은 회한에 가득 찬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운명을 마침내 쿨하게 받아들이는,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멋있는 (척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조직의 보스 강 사장(김영철)이 자신의 어린 정부(신민아)를 감시하라고 김선우(이병헌)에게 명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우는 긴 생머리 뒤로 삐져나온 그녀의 귓볼을 보고, 목덜미를 본다. 사랑한 것인지 몰랐지만, ‘잔상’은 남는다. 그것이 모든 되돌릴수 없는 파멸의 시작이다. 넘치는 충심과 능력보다도 “애인 없고, 사랑해본 적 없는” 무심자이기에 더 믿고 일을 맡긴 보스의 신임은 빗나가고, 김선우는 사랑의 잔상에 매인 채 용서하지 말라고 한 것을 용서하고 만다. 세력을 넓히려는 백 사장(황정민)과 동료이자 배신자인 문석(김뢰하)의 협공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강 사장의 분노는 김선우가 받아내야 하는 더 큰 위협이다. 그는 세상에 혼자뿐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자신에게 묻지만 알 길이 없다. 세상에서 지켜지는 원칙이란 단 하나, 어느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도 모르게 어긋난다는 것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옛날 옛적 어느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을 읊어대는 김선우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면서 이 영화는 “덧없음”에 관한 아포리즘, 무상한 존재론의 입구가 여기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장르틀로서의 누아르 첫 번째 공식도 가뿐하게 지켜낸다.
김지운 특유의 공간과 비주얼
<달콤한 인생>의 장점을 대변하는 것은 공간과 그 비주얼이다. 김지운은 공간을 인물처럼 대하는 감독이다. 그가 발휘하는 세심한 세공술은 공간에 성격을 불어넣는다. <조용한 가족>에 산장이 있고, <반칙왕>에 링이 있고, <장화, 홍련>에 귀신 들린 집이 있듯이, <달콤한 인생>에는 주공간으로서 기능하는 호텔 스카이라운지가 있다. 그곳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처음과 끝이 있는 곳이다. 의미로만 버티고 있는 곳이 아니라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추진하는 화려한 액션장면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문석 패거리와 맞붙는 폐허에서의 장면을 불꽃 튀는 불각목 액션에 방점을 찍어 촬영했다면, 이곳에서의 마지막 대혈전은 총을 가진 자들의 무차별한 난사에 초점이 맞춰진다. 예컨대 <달콤한 인생>에서의 액션은 몸과 연장으로 하는 액션신과 총을 도구로 하는 액션신, 이렇게 크게 두번으로 나눠져 있다. 전자가 “불과 비 속에서 좀비처럼 달려드는 수하들과 싸우는 카오스적인 느낌”이라면, 후자는 ‘가짜 나무’ 아래서 피로 물들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허무한 전장지가 되어야 한다. 여기 이 공간으로 다시 진입하기 전까지 서사는 넓게 펼쳐지고, 주인공 김선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사태를 어찌할 수 없고, 그 와중에 웃기는 무기 밀매자들(김해곤, 오달수)은 등장하여 너스레를 떨다가 역할을 마치고 죽어나간다. 죽였다가, 웃겼다가 <달콤한 인생>에는 김지운이 만드는 굴곡이 있다.
<장화, 홍련>과 같은 매혹, 같은 약점
<달콤한 인생>은 <장화, 홍련>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에 호러니 누아르니 하는 구별은 별 소용이 없다. 이건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말도 될 것이다. 전작 두편에서 코미디가 전면에 섰다면, <장화, 홍련>은 웃음을 거뒀다는 의미보다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해야 하는 작품이다. 예컨대 이런 말들. “서사와 내러티브가 아니라 주제에 해당하는 낱낱의 인상들이 초래하는 비극으로 영화를 전개하려 했다”, “나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는 내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기억을 돌이키고 싶지 않고 결과를 돌이킬 수 없어 사람을 옭아매는 순간들 말이다”. 이 언급들은 <장화, 홍련>에 대한 감독 본인의 설명이지만, <달콤한 인생>에 대한 설명에 쓰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셈이다.
지금과 같은 스타일을 서사의 인과율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건 두 영화 모두 엔딩으로만 그 인상들을 함축해 담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서사는 부족한 미스테리가 되거나(<장화, 홍련>), 팔방으로 펼쳐지면서(<달콤한 인생>) 엔딩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 연기된다. 그리고는 앞 장면들에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만한 주요한 이미지들이 집약적으로 엔딩에 첨가되는 방식이다.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모두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설명이 아니라 정서”를 위한 첨가과정일지라도, 엔딩으로만 모든 걸 미뤄두는 것은 여전히 의문거리다. 왜 영화 전체가 아니고 엔딩인가? 그건 영화가 게임처럼 되는 위험한 순간이다.
김지운이 <조용한 가족>에서 이야기를 눈덩이처럼 불리면서도 특별한 혼란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을 서사의 차원으로 다루면서 열린 구조의 가능성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은 이미 벌어지고 만, 혹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더듬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기억과 회상과 운명). 엔딩에 ‘보태진’ 그 숏들이 없을 때 전반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기 때문에, 그 숏들을 아무렇게나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서사의 적절한 타협과 마찬가지로 숏들의 적확한 의미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만큼의 확신도 필요하다. 그것에 설득력이 없으면 허깨비가 되고, ‘폼’을 잡는 일이 된다. 그런 점에서 <달콤한 인생>은 <장화, 홍련>과 동일한 매혹이 있지만, 같은 수준의 약점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엔딩이 전체를 떠맡는 구조보다는 전체의 관계 속에서 엔딩이 중심이 되는 그런 구조가 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