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과 눈발 그리고 우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리는 베를린의 먹먹한 날씨만큼이나 베를린영화제의 장래는 어두웠다. 베를린의 좌파 신문 <타게스슈피겔>은 평론가 얀 슐츠 오얄라의 입을 빌려 “규모만 늘려가는 영화제, 장래가 불안하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런 먹구름은 일찍이 예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성품 블록버스터를 만들던 롤랜드 에머리히 심사위원장, 할리우드 배우가 오지 않는다고 상영작을 뒤바꾸는 집행위원장 등이 맞물리며 어이없는 수상 결과를 낳았다. 코슬릭 위원장이 그토록 애원했던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왕림을 거절하면서 베를린영화제의 깃발은 속절없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보석들마저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수상 결과를 정리하고 베를린영화제 가운데 우뚝 빛나는 작품들을 꼽아봤다.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을 비롯한 다섯 작품과 감독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그리고 평론가 심영섭은 권력자의 최후에 주목한 영화들에 관해, 그리고 주목할 만한 젊은 영화들에 관해 글을 보내왔다.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남아공 영화 <카예리차의 카르멘>에 금곰상
<카예리차의 카르멘>의 주연 여배우(가운데)와 마크 돈포드 메이 감독(오른쪽)
시상식을 이틀 앞둔 2월17일 늦은 저녁, 구동베를린에 자리한 민중극단극장 로비에서는 영포럼 부문 스탠딩 파티가 열렸다. 와인과 맥주를 손에 든 영화인들의 표정에서는 즐거움과 피로감이 겹쳐 있었다. LJ필름 김소희 이사는 <여자, 정혜>(감독 이윤기)의 넷팩상 수상 소식을 영화제쪽으로부터 일찌감치 전해들었다. 전양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나 데릭 엘리 <버라이어티> 기자, 평론가 토니 레인즈, 심영섭 등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놀라지도 않는다. “칼리가리상을 받아야 상금을 받는데….”(전양준). 조용히 상금을 챙긴 사람은 신재인 감독(<신성일의 행방불명>)이었다. 두둑하지는 않지만 베를린의 <베를린 차이퉁> 독자들이 그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다(표 참조). 더 큰 주머니를 채울 사람은 누굴까. 모두들 차이밍량을 꼽았다. “<떠다니는 구름>은 그의 야심작이며 이번이야말로 좋은 기회이고 적어도 감독상은 받을 것”(토니 레인즈)이란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떠다니는 구름>을 본 관객은 상영 도중 두서없이 일어나 출구를 찾아나섰고 그들은 한떼의 먹구름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기자회견장은 차이밍량 영화의 공허한 복도처럼 텅 비어 있었는데 누가 과연 상을 줄 수 있을까. 점잖은 베를린 우파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은유이기에는 수박살이 너무 난무하고 정액이 너무 묻어나고, 섹스는 너무 노골적이다.”(<벨트>)
정치색 영화 수상 전통 깨트려
수상 결과는 뜻밖이었다. 오페라 <카르멘>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슬럼가로 옮겨 다시 만든 영화 <카예리차의 카르멘>(감독 마크 돈포드 메이)은 아프리카적인 미술과 음악이 어울린 수작이긴 했지만 대상 후보는 아니었다. 영국 출신 마크 돈포드 메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연예술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로 이번이 첫 영화 연출이다. 베를린의 저명한 비평가 슐츠 오얄라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비제의 스크린 옮기기 시도에 그친” 이 영화의 대상 수상에 국제영화계가 생소한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52회), <매그놀리아>(50회), <씬 레드라인>(49회) 등 역대 금곰상 수상작을 떠올리면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지는 결과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건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 <파라다이스 나우> <내 심장이 놓친 박동> 정도였다. 스크린에 별점을 매긴 9명의 다국적 평론가들은 영화제 내내 시큰둥했다. 별 4개 만점에 기껏해야 3.0점을 받은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이 1위였고, <카예리차의 카르멘>의 점수는 2.14였다. 작품이 정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영화제는 노골적이지 않고 무던한 <공작>에 심사위원대상을 안겼다. 첸카이커의 촬영을 오랫동안 맡았다고는 해도 연출은 처음이며 이야기 솜씨도 서투른 구창웨이 감독에게는 너무 큰 격려다. <소도시, 이탈리아>나 <유럽에서의 어느 하루>처럼 파노라마 부문에 갈 영화가 본선에 올랐다는 <스크린>의 지적이나 3년 전 〈할베 트레페〉로 은곰상을 받은 안드레아스 드레젠의 <빌렌브로크>가 파노라마로 밀려난 데 대한 <벨트>의 개탄을 들으면 왜 이런 수상 결과가 나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소신있게 차이밍량이나 소쿠로프에게 금곰상을 안겼다면 베를린영화제 전통은 유지되었을 텐데. 디이터 코슬릭 위원장은 아프리카로 문을 열고 아프리카로 닫아야 이번 영화제의 주제가 일관되게 전달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심사위원장 롤랜드 에머리히도 여기에 화답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르완다 인종청소를 다룬 <4월 언젠가>는 이야기가 산만하고, 개막작 <맨투맨>은 비경쟁으로 나가야 옳았으니(<스크린>) 금곰상의 선택지는 단 하나였던 셈이다.
대조적인 여배우 바이링과 옌치
<엄지손가락 빠는 아이>의 주연 루 테일러 푸치는 시상식장에서 기자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 역의 미셸 부케나 <내 심장이 놓친 박동>의 로맹 뒤리가 가져가야 옳을 상이었다. <소피 숄…>의 율리아 옌치는, 지난해의 샤를리즈 테론(<몬스터>로 여우주연상)처럼 경쟁자 없이 내내 독주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베를린이 사랑했던 두 여자는 심사위원이자 프루트 챈의 <만두>에 출연한 배우 자격으로 온 바이링과 율리아 옌치였다. 바이링이 반쯤 벌거벗고 다니며 극장 바깥의 냉기를 데웠다면 옌치는 극장 안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보여준 수줍은 미소와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상기된 볼은 <소피 숄…>의 결단력 있는 연기와 더해져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크 로테문트 감독(<소피 숄…>)의 감독상과 더불어 이 두 상은 거의 유일하게 예측과 결과가 맞아떨어진 사례다.
강력한 대상 후보작이었던 <파라다이스 나우>와 <떠다니는 구름>은 유럽영화상과 예술공헌상을 나눠 갖고 그 밖의 작은 상들을 휩쓸며 아쉬움을 달랬다. 팔레스타인 감독 하니 아부-아사드는 상금 액수가 가장 많은 상도 받고 이스라엘 영화기금으로부터 지원도 받게 돼 영화 속의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려도 될 듯하다.
외면은 호황이나 내실은 없어
영화제쪽은 눈발과 강풍도 영화제의 열기를 식힐 순 없었다며 티켓 18만장이 팔려나간 호황에 기뻐하고 있다. 120개국에서 온 1만7천여명 영화관계자들이 붐빈 EFM은 거래액이 30%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제는 이런 수치상의 증가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관객은 자신들이 주가현황판이나 보러 온 게 아님을 잘 알고 돌아갔을 것이다. 소쿠로프의 <태양>처럼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넬 줄 아는 영화가 매우 드문, 그래서 베를린의 쌀쌀하고 음울한 날씨에 몸을 더 움츠리게 된 영화제였다.
● 수상결과
금곰상
<카예리차의 카르멘>(Carmen in Khayelitsha) 감독 마크 돈포드 메이
이하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공작>(Peacock) 감독 구창웨이
감독상 마크 로테문트(<소피 숄-마지막 날들>(Sophie Scholl-The Final Days))
최고여배우상 율리아 옌치(<소피 숄-마지막 날들>)
최고남배우상 루 테일러 푸치(<엄지손가락 빠는 아이>(Thumbsucker) 감독 마이크 밀스)
예술공헌상 차이밍량(<떠다니는 구름>(The Wayward Cloud))
음악상 알렉산드르 데스플라트(<내 심장이 놓친 박동> 감독 자크 오디아르)
아지코아 블루앤젤상(최고 유럽영화상) & 국제사면위원회상 & <베를린 모겐포스트> 독자상 <파라다이스 나우>(감독 하니 아부-아사드)
알프레드 바우어상(베를린영화제 창립자 기념상으로 새로운 연출을 보여주는 영화에 수여) 차이밍량 <떠다니는 구름>(The Wayward Cloud)
금곰상 단편부문
<우유>(감독 피터 매키 번즈)
파노라마 특별언급 이영란(<세라진> 감독 김성숙) 수상 이유-노년의 비극적인 불가시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 여인에 관한 감동적인 초상
수정곰상(아동부문) <순진한 목소리들>(감독 루이스 만도키)
특별언급 아동부문 & 평화영화상 <거북이도 난다>(감독 바흐만 고바디)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상금 2500유로) <소피 숄-마지막 날들>
피프레시(언론및 비평가)상 <떠다니는 구름>
테디상(퀴어/게이/레즈비언 영화부문) <사랑 없는 일년>(감독 아나히 베르네리)
볼프강 스타우테상(전후 활약한 독일 감독을 기념한 포럼부문상. 상금 1만유로) <홍수 이전>(감독 양유, 리이팡)
칼리가리상(포럼부문상. 상금 4천유로) & 피프레시상 <쇠가죽>(감독 류지아잉)
넷팩상(포럼부문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여자, 정혜>(감독 이윤기) 수상이유-개인적 상처와 현실에 사로잡힌 젊은 여성에 대한 미묘하고도 정확한 영화적 초상
페미나상 <빌렌브로크>(감독 안드레아스 드레젠)
<베를린 차이퉁> 독자상(상금 2500유로) <신성일의 행방불명>(감독 신재인) 수상이유-다양한 비유와 이데올로기적 상징을 활기차게 다루고 있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