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교습소는>는 <비트> <바이준> <나쁜 영화> <눈물> <청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고양이를 부탁해> 등 그간의 스무살 언저리의 불안한 청춘을 다룬 영화들에 비해 구도는 헐겁고 긴장감은 바닥을 친다. 그나마 이 영화에 미덕이 있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은 ‘평범한 아이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일 테지만, 이 영화는 <사춘기>나 <학교> 시리즈 같은 ‘평범한 아이들’이 나오는 TV드라마보다도 갈등이 피상적이다. 왜 그럴까? 이는 그 ‘평범함’이라는 것이 그저 ‘산술 평균’에서 도출된 관념의 이미지일 뿐 인물의 내면으로 살아나지 못한 탓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감독이 생각하는 ‘평범한 아이들’의 이데아가 어른의 눈높이에서 구축된 ‘순진한 존재’라는 족쇄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고3 남학생 민재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여자친구와 발레교습소에서 만난 지역주민 등이 방사형으로 배치된다. 중심인물 민재는 “공부 잘하게 생겼지만 잘 못하는” 학생으로, 춤이나 게임 같은 특기도 없고 꿈도 없다. 그는 악몽을 꾼다. 악몽의 재료는 죽은 어머니와 어리다고 무시하는 여자친구와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없는 자신을 군대 보내야겠다는 선생과 인생을 연대기로 그려놓고 다그치는 아버지이다. 물론 그는 불안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행동에선 ‘불안을 느끼는 주체’가 감지되지 않는다. 다만 ‘불만스러운 아이’의 투정이 있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가 바빠서 어머니를 혼자 죽게 했다고 생각하고, 자주 집을 비우고 집에선 잠만 자는 아버지를 불만스러워 한다. 이모의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욕지거리를 해대다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는 “엄마 보고 싶다”며 울고불고 집나와선 며칠 만에 돌아가, 자는 아버지 깨워 알바비 걸고 야구 시합한다. 이는 흡사 ‘엄마없어 외롭고 아빠가 안 놀아줘 심심하다’는 초딩 5학년, 아무리 늘려잡아도 중2의 품새다. 19살이면 ‘돈 잘 주고 집 자주 비우는’ 아버지가 최고인 줄은 알며, 파출부처럼 일해주는 이모에게 (자기 편의를 위해) 인사치레할 눈치는 있다. 영화에는 “부모에게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는 말이 반복되지만, 그 ‘상처’가 19살 청년이 아이처럼 부모를 갈구한다는 오해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재수하기 싫어 뭐하는지도 모르는 조경과에 간 그에게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현실의 19살은 적어도 ‘내 장래가 아버지만큼 보장되지는 않겠구나’는 것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자기 인생에 대한 통찰도 없이 그저 “몰라∼” 답하는 그에게선 도무지 불안이 감지되지 않는다. 이는 ‘평범한 소년’을 어른의 입장에서 과도하게 ‘천진한 상’으로 윤색한 결과이다.
수진이 ‘제주대 수의과’를 가겠다는 것은 점수에 비해 가장 취직이 잘되기 때문이고 집을 떠나고 싶어서이다. 그녀는 적성보다 현실적 사항을 고려하여 독자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녀에게 부여된 특징은 그외에 별반 없다. 그녀의 중성적이고 똑똑한 매력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자 지나치게 여성화된 친구와 지나치게 둔한 친구를 배치시켜 그녀의 매력을 대비·보완한다.
그녀를 둘러싼 동성애 논의는 생뚱맞음의 극치이다. 앞부분에 깔린 동성애에 대한 조롱을 무마하려는 듯 이상한 장면에 커밍아웃이 들어간다. 그녀가 문밖의 민재를 의식하면서 “어차피 못 보면 끝인데, 걱정하며 사는 것 이해가 안 가”란 말과 함께 동성친구의 고백 이야기를 하자, “나 게이야…. 남들이 무슨 걱정하든 너한텐 하나도 안 중요하지?” 하고 답한다. 둘의 말은 의도와 쟁점이 맞물리지 않은 채 허공에 외쳐진다. 이 영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때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민재가 중산층 출신으로 배부른 고민을 한다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 가난한 친구와 소아암 환자를 배치하고 민재로 하여금 (강제로) 그들 편에 서게 한다. 지역주민과의 연대는 시트콤 수준도 아니다. 이 모든 어설픔을 환희에 찬 발레 무대 하나로 봉합하려든다. 언 발에 오줌눈다.
<발레교습소>에서 그들은 자신의 고민을 대면치 못하고 공회전한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고민을 대면치 못한 채 변죽만 울리는 것은 그 또래의 아이들이 아니라 감독 자신이다. 막연한 청춘이기에 막연하게 그렸다고 빠져나갈 수는 없다. 막연한 청춘을 주도면밀하게 그린 <마이 제너레이션>을 부디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