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의 영화감독들이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여러 전선(戰線)으로
달려가서 이런저런 패전의 경험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예컨대 <들불>(1959)의 이치가와 곤이 달려간 전장이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병사들을 결국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야수들로 만들어내는 지옥이었다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의 오시마 나기사가
뛰어든 태평양전쟁은 서로 낯설기만 한 하나의 문화와 또다른 문화가 미묘하게 만나고 충돌하는 장이었다. 구마이 게이는 <바다와 독약>(1986)에서
산 사람이 일본군에 의해 생체실험에 이용되는 끔찍한 현장을 지켜봤고 또 <검은 비>(1989)에서 이마무라 쇼헤이는 원폭이 터진
이후 서서히 일본의 한 마을을 잠식하는 죽음의 그림자에 카메라를 갖다대기도 했다. <검은 비> 이후 9년 만에 태평양전쟁의 시대로
돌아온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들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말이지 아주 색다른 전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전쟁의 환부를 진단하는 뜀박질
간장선생>이 시선을 두는 곳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당시 일본의 어느 어촌 마을이다. 이곳은 간염의확산이 이미 위험 수위에 오른 곳이다. 이건 주인공인 의사 아카기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는 그렇게 굳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을
곳곳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간염박멸이라는 성전(聖戰)을 홀로 치르고 있다. 그런데 아카기의 외롭고 둔중한 뜀박질에 동참하다보면 순간 우리는
앞에서 거론한 영화들이 그렸던 것과 같은 모습의 전장들이 어느새 슬쩍슬쩍 눈앞을 지나쳐갔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카기의 ‘특별한’ 진단
탓에 생소하게만 보였던 <간장선생>의 시공간도 알고 보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쟁의 다양한 양상들이 여기저기 잠복해 있는 그것에
다름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간장선생>의 기저에 놓인 의미관계에 대해 극히 진부한 설명을 내놓는 데 아주 안이해지기가 쉽다. 우선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간염 진단을 내리기 때문에 ‘간장선생’이라 불리는 아카기의 입에서, 그리고 그가 주인공인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는
당연하게도 간염이라는 것인데,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세상을
파괴로 이끄는, 전쟁(과 군국주의)이라는 치명적인 전염성 병균에 대한 상징으로 보면 얼추 들어맞을 테니까 말이다. 요컨대 중세를 다루는 이야기들
속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흑사병의 현대적 대체물 같은 것이 곧 간염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장선생>은 일차적으로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알레고리로 읽히게 된다. 정석에 충실한 이런 ‘규격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마무라의 영화는 확실히 그것의
독선으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기이한 매력이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마무라 영화들은 대체로 혼돈 속을 헤집는 사람들에 대한 인류학적인
관찰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에서부터 힘을 얻었지 그들에 대한 어떤 설명의 도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간장선생>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간장선생>은 이상하게도 아카기가 그토록 그 박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간염이 어떤 식으로 일본사회를 뒤덮고 있는지 그 증세를 실감나게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카기의 환자들이 간염에 걸린 것은 단지 ‘선생’이 그렇게 진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일 정도다. 간염을 일본사회에
미만한 군국주의 세포의 비유로 본다고 해도 그 증세는 중증에 해당할 정도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아카기 일행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 위해를 가하기
전으로 한정해보자면 아카기와 반대편에 있는 제국의 군인들은 아카기보다 어리석거나 꽉 막혔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아카기와 의견을 달리할 뿐이다.
증상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데 아카기는 매번 간염이라는 진단을 하고 잘 먹고 푹 쉬라는 똑같은 처방을 내린다. 그렇게 무언가 ‘불완전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그는 웃음을 불러오는 존재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중요한 사항을 빠뜨린 것이 되고 만다. 언제나 똑같은 진단과 처방을
내리더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아카기의 육체적 움직임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행위를 반복할 때, 그래서 그것이
일종의 소명임을 몸으로 입증할 때, 그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들썩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오히려 그야말로 간염 바이러스처럼
전염의 힘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온 네덜란드인 피트가 자신을 마구 구타하는 일본군한테 “네 놈은 머리끝까지
간염에 걸렸구나”라고 소리칠 때 감지되는 것은, 간염의 실제 확산이라기보다는 간염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인식의 확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아카기가 달리는 것을 멈출 때, 아니면 적어도 달리는 횟수를 줄일 때, 그는 점점 병든 존재가 된다.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그는 간염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데 거의 편집증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다. 이런 아카기의 행동은 처음엔 에너지의 적극적 선용(善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츰 비상식적인 무모함으로 변질되어버린다. 간염 바이러스를 연구한답시고 현미경만 들여다보던 그는 환자 왕진하는 일을 미루고 결국 그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치료’는 환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의사 아카기에게도 필요한 것이 된다.
어떤 면에서 <간장선생>은 아카기 자신의 치료기이기도 한 것이다.
성적 에너지, 그 근원적 생명력
<간장선생>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치료라고 했을 때 아카기만큼이나 중요한 또다른 인물이 바로소노코이다. 아카기의 조수로 일하는 그녀는 아카기만큼이나 또는 어떨 때에는 그보다도 더 치료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물로 보인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피트를 치료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녀이고, 또 아카기가 현미경에 집착하고 있을 때 환자를 보러가야 한다고 자꾸 재촉하는
것도 그녀이다. 하지만 일종의 ‘치료사’로서 소노코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녀가 가진 근원적 생명력, 즉 성적 능력을 발휘할 때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한 중년 여인이 창녀였던 소노코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총알이 숫총각을 좋아한다고 하니 곧 전쟁터로 떠나야 할 숫총각인 자기
아들의 동정을 떼달라고. 그렇게 해서 아들의 생명을 꼭 지켜달라고. 소노코는 여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건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 여인의
아들에게 소노코가 가장 잘해줄 수 있는 심심한 배려 같은 것이었다.
전쟁중과 그뒤에 어쩔 수 없이 매춘에 빠져들게 된 여성들이 그동안 영화 속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왔던가를 한번 살펴본다면 이 소노코라는 여성이
얼마나 특별한 캐릭터인가가 잘 드러날 것이다. 예컨대 여간해서는 고요한 일상성의 테두리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도
매춘과 관련해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된 적이 있다. <바람 속의 암탉>(1948)에서 유부녀인 도키코는 전쟁이 끝나고도 남편의
귀환 소식을 듣지 못하자 병든 아이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몸을 팔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이 사실을 알고는 분을 못 참고
아내를 계단 아래로 던져버린다. 오즈의 이 영화에서처럼 대부분 여성들의 매춘은, 아무리 전쟁통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일지라도 심한 학대를 받아야
하고 또 그러고나서야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런 일반적 공식을 과감하게 뒤집는다. <간장선생>에서
소노코의 아버지는 딸더러 ‘더러운 매춘부’라며 역정을 내다가 그만 죽고 만다. 이마무라가 보기에 오히려 그런 식의 비난은 근원적인 생명력을
가진 여성에게 해서는 안 될 금지된 말인 것이다.
해피엔딩은 아직 이르다
언뜻 보면 모자란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소노코는 분별력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 마을사람들이 아카기를 두고 ‘돌팔이’라고 놀려댈 때 그녀는
아카기의 진심을 알아낸다. 아카기로 하여금 할 일을 일깨워주고 또 그의 속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성욕을 슬며시 끄집어내준다. 그렇기에 <간장선생>은
의술과 두 다리로 병든 세상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사 아카기에 대한 영화이면서 또한 왕성한 생명력으로 그를 치료하고 또 세상을 어루만져줄 여성
소노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나이 지긋한 남자와 그보다 훨씬 어린 여성 사이의 관계라는 구도는 사실 이마무라의 영화들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일본곤충기>(1963)에서는 콜걸과 그녀의 나이 많은 정부 사이의 뒤틀린 관계가 그려져 있고, <인류학입문>(1966)은
8mm 포르노영화감독과 그가 관계를 맺던 과부의 어린 딸 사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복수는 나의 것>(1979)에는 잔혹한
연쇄살인자의 아버지와 그 살인자의 아내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다뤄진다. 그런데 이 영화들에서 남녀관계란 대개가 가혹한 운명이나 또는 저열한
착취관계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반면 <간장선생>은 이마무라의 영화들 가운데 아주 드물게도 희미하게나마 남녀 주인공의 화합으로 끝을
맺는 듯하다. 영화가 끝날 무렵 아카기와 소노코가 배 위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마무라의 냉정한 시선도 노년에 와서
안착점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한숨 놓으려는 찰나 우리는 바다 저 멀리서 하늘 높이 치솟는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아니
아카기의 표현대로라면 “비대해진 간”을 보아야 한다. 남녀의 결합 앞에는 엄청난 파괴, 그리고 더 거대해진 질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괴하고
섬뜩하며 부조리한 이마무라의 상상력은 벌써 끝난 게 아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