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3국의 프로젝트 <쓰리>가 기대만큼 큰 반향이나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물러간 지금, 후속 프로젝트인 <쓰리, 몬스터>가 도착했다. 전작이 ‘호러’라는 큰 틀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각국 감독들에게 자율권을 넘겨준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여기에 ‘귀신 없는 호러’라는 다소 좁혀진 공통과제가 대신 제출되었다. 룰은 같고, 참여 국가가 하나 바뀌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좀 달라질 수 있을까?적어도 국내에 관한 한, 이번에는 그 모든 키를 <올드보이>의 영광을 안은 박찬욱 감독이 쥐고 있다.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억할 만한 인용구를 남겼는데 그것은 “등장인물들에게는 고통을, 투자자들에게는 기쁨을”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쓰리, 몬스터>는 라인업에 누가 들어가고 빠지는가를 세심하게 단속한 흔적이 보인다.최근에 개봉한 <몬스터>에서 보듯, 한 인간이 괴물로 변하는 것은 그 조건이 사회의 구조적 압력이든 갑작스레 찾아온 충격이든 기본적으로 내부에 그 괴물이 인간 내부에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숙한 성찰이고, 당연히 욕망과 금지의 기표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심령호러’의 안전한 여집합이 될 것이라 판단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하긴 따지고보면, <스파이더 맨> 같은 슈퍼히어로는 포지티브 몬스터, 뱀파이어는 네거티브 계열의 몬스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괴물로 비가시적인 우리 안의 (진짜) 괴물을 인양하는 것과 달리, 비가시적인 우리 안의 괴물의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작업은 벌써 듣기만 해도 추상적이다. <쓰리, 몬스터> 프로젝트에서 그것을 ‘투자자의 기쁨’으로 환원하는 것은 결국 감독의 역량에 달린 것일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완성도를 불문하고 취지에 가장 잘 부합한 것은, 박찬욱의 <컷>이다. 능력있고 부유하며 마누라 예쁘고, 인간성마저 비단결인 영화감독 류지호(이병헌)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여기서 요구된 선택은 둘 중 하나, 피아노 앞에 마리오네트마냥 매달린 아내의 손가락이 5분마다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보거나 괴한이 데려온 생면부지의 소녀를 교살하는 것. 제한된 시간, 밀폐된 공간에 개인에게 주어지는 극한 상황,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이와 모든 것이 결핍된 자의 심리적 충돌. 영화는 이 잔혹한 지적 게임을 통해 처음엔 존엄을 지키려는 이들이 점차 허물어져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스타일 과잉이라는 연출가의 손맛 그대로, 손가락이 믹서에 갈리고 피가 사방팔방으로 쏟아지는 참혹극의 와중에도 영화는 폭소를 자아내는 아이러니와 지독한 농담들을 잊지 않는다. 충청도 사투리를 순박하게 구사하는 괴한과 자신이 착하지 않음을 변명하며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아이러니 같은.
투자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B급 장르영화의 위트와 뉘앙스의 잔재미를 선보인 박찬욱과 달리, 괴력의 상상력을 가진 기인 미이케 다카시는 <박스>에서 유장하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꿈결 같은 이미지 속을 유영한다. <컷>이 현실과 똑같은 세트에서 벌어지는 극중극이라면 <박스>는 꿈속에서 꾸는 꿈이다.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쌍둥이 언니를 질투해 미필적 고의로 의붓아버지와 쌍둥이 언니를 죽게 한 교코, 성인이 된 현재까지 비닐 포대에 싸여 암장되는 악몽을 매일 꾼다. 미이케 다카시는 “서정적인 공포를 보여주겠다”는 그의 공언대로, 몽환적인 이미지들을 회전시킨다. 푸른 필터 속에 잠긴 설원과 그 위에 거짓말같이 세워진 유랑 서커스단의 천막, 애크러배틱한 동작으로 기괴하게 얽혀 있는 쌍둥이 자매들의 이미지 등. 그러나 형제에 대한 질투, 살해, 죄책감, 심판이라는 신화적 원형을 비닐 포대와 상자 속으로 조여오던 공포는 마지막에 또 다른 꿈이 깨자 해석하기엔 또 다른 악몽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현실일 수도 있는 전혀 엉뚱한 출구로 빠져나온다. 프로젝트의 취지와 떼어놓고 생각하자면 가장 인상적인 소품.그러나 이미지가 회전하면서 정작 몬스터란 취지가 원심분리되는 것 같다는 불안감은 프루트 챈의 <만두>에 와서 확연해진다. 공포에 불을 붙이기 위해 지적 게임과 정서적 압박을 각각 정교한 답안으로 제시한 한국, 일본과 달리, 홍콩은 다소 느닷없는 도시 괴담을 제시한다. 젊음을 돌려받기 위해 태아로 만든 인육 만두에 심취하는 부유한 중년 부인을 다룬 <만두>는 사실, 만두를 씹을 때 나는 ‘오도도독’ 하는 소리나 만두를 빚기 위해 태아를 빻는 자극적 이미지들을 빼놓고서는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무간도>의 유위강이 급작스레 하차하고 프루트 챈이 바통을 넘겨받으면서 생긴 간극의 허기는 사회악의 정치지역학을 살짝 잡아채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유려한 영상이 메울 뿐이다.사실 큰 문제는 러닝타임이 흘러가면서 이 옴니버스가 왜 굳이 3개국이라는 국적을 필요로 했는지가 아연해진다는 것. 기대할 만한 의의는, 우리 안의 ‘지니’가 어떤 세 가지 국적의 소원을 위해 튀어나올 것인가이겠지만, 사실 <쓰리, 몬스터>가 그것에 대해 투자자를 안심시킬 만한 답안을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의는 동아시아 네트워크라는 세계화 시대의 영화산업 전략, 느슨하게는 ‘동아시아 허브 국가 건설’이라는 국가 전략과도 연동되어 있다. 하지만 야박하게 말해 이러한 것은 사실 관객의 소관이 아니다. 톱클래스의 스탭을 짜넣은 이 프로젝트의 약점은 실은, 이 프로젝트가 영화적으로 전위적인 시도라서가 아니라 비즈니스적으로 전위적인 시도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튀는 감독 프루트 챈과 망명 배우 메일링
필모그래피에서 호러 장르와의 친화성이 강한 미이케 다카시나 박찬욱과 달리, <리틀 청>이나 <메이드 인 홍콩> 등, ‘홍콩 3부작’ 같은 리얼리즘영화를 찍은 것으로 기억되는 프루트 챈의 존재는 <쓰리, 몬스터>에서 다소 튀는 감이 있다. 유위강이 하차하는 바람에 전격 투입된 것이 하나의 이유겠지만, 홍콩 3부작 이후 판타지가 강화된 그의 최근 행보를 생각하자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중, <만두>는 창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할리우드 홍콩>을 연상케 하는데, 본토의 태아를 밀수해 만두를 만들다 홀연히 본토로 도주하는 메이의 모습은 홍콩의 뒷골목을 흔들어놓는 대륙 출신 창녀의 모습과 얼마간 겹치기도 한다. 장편 버전이 따로 있는 <만두>에서는 길게 묘사되지 않았지만 본토로 갑자기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편집과 신체절단의 잔혹한 농담은 어쩌면 이때의 흔적이기도 하다.
묘한 분위기의 인육만두조리사 메이를 연기한 베일링은 14살의 나이로 중국인민해방군에서 배우 경력을 시작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우리로 치면 연예인 부대인데, 티베트 근처에서 3년의 복무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연기를 하며 <아크라이트> 같은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천안문 사태에 연루되어 미국으로 망명한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크로우>에서의 악역을 시작으로, 주윤발이 연기한 <왕과 나>의 리메이크 <애나 앤드 킹> 등 할리우드에서 주요 경력을 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 사법제도의 인권탄압을 고발하는 <레드 코너>로 리처드 기어와 공연, 97년 전미비평가협회에서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한동안 중국 입국이 제한되기도 했는데 중국 현대사의 질곡과 줄곧 마찰을 일으켜온, 베일링의 면모는 <만두>에서 마녀라기보다 계급적 팜므파탈 분위기를 풍기는 메이와 퍽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