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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여? <령>

‘모성’ 자체의 공포를 말하려했던 공포영화 <>

심영섭은 <씨네21> 459호에서 <>은 아마도 ‘모성애의 비극’을 다루려 한 것 같지만, ‘소녀의 희구’와 적대감의 연원을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이는 <>의 핵심을 놓쳤다고 판단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 모성‘애’의 비극이 아니라, 모성 ‘자체’의 공포를 그리고 있으며, ‘소녀의 희구’와 적대감은 권력관계로 설명된다.

<>을 형식적으로 분해하면 ‘할리우드식 반전’+‘일본식 분위기’이지만, 내용적으로 분해하면 ‘물귀신’+‘아직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이다. ‘물귀신’은 <검은 물 밑에서>가 아니라도 유명한 귀신 캐릭터이고, ‘아직도…?’는 한동안 히트쳤던 구전괴담이다. <>의 토대는 여전히 ‘여고생 괴담’이지만 ‘공포의 정치학’을 완전히 달리한다. <여고괴담>이 ‘약자의 원한’을 말한 반면, <>은 ‘강자의 의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의 정치학, 약자의 원한인가 강자의 의지인가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요소는 크게 셋으로 추려진다. 첫째, ‘약자의 원한’, 둘째, ‘강자의 의지’, 셋째, ‘방관자의 죄의식’이다. 가령 <여고괴담>은 ‘약자의 원한’(主)+‘방관자의 죄의식’이고, <폰>은 ‘약자의 원한’(主)+‘강자의 의지’이다. <장화, 홍련>은 ‘방관자의 죄의식’(主)+‘약자의 원한’이다. <>은 반전을 통해 ‘약자의 원한’에서 ‘강자의 의지’로 180도 바뀐다. 이 전환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원한을 품은 ‘약자’가 귀신이 되어 응징한다는 해원상생의 이야기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숨통이자 안전판이다. 이는 환상의 차원에서 현실질서를 교란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균열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보완한다. 현실세계는 ‘강자의 의지’가 관철되는 장이다. ‘강자의 의지’는 이유가 없으며 당연히 죄의식도 없다. 우리는 ‘강자’에게 희생될까 두려워 그 존재와 힘을 잊고 산다. 그러나 분명 ‘강자’는 있다.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이나,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는 ‘강자’의 표상이다. 상대역(수사관)들은 그들의 강함에 매혹된다. ‘사랑’을 다루면서 ‘강자’와 범인(凡人)의 권력관계를 그린 <워터 드랍스 온 버닝락>같은 영화도 있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는 ‘강자의 의지’를 말하는 ‘천기누설’을 금한다. 하여 대부분의 할리우드 호러는 기껏 ‘강자의 의지’를 보여주다가도 ‘사실은 그들도 상처받았었다’며 꼬리를 내리고, ‘상처’의 알리바이를 위해 정신분석학을 동원한다. ‘약자의 원한’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술책은 ‘광인’(강자)을 ‘병자’(약자)로 가둔 근대정신의학의 기획과 상통한다.

우리 영화 중 ‘강자’는 <공공의 적>의 이성재가 꼽히지만, 감독의 포퓰리즘적 정치철학 탓에 어이없게도 강철중 같은 범인(凡人)에게 굴복되고 만다. <살인의 추억>에도 ‘강자’의 그림자가 비치지만, ‘방관자의 죄의식’이 주테마이다. ‘강자의 의지’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이다. ‘강자의 의지’를 표상하는 강 사장이 ‘약자의 원한’으로 똘똘 뭉친 병구를 끝내 이긴다. 강자-약자 관계를 다면적으로 다루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도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는 일촉즉발의 순간 신하균을 쏜다. 대질심문에서 “공화국 만세!”를 외치던 그는 남한 병사들이 혼란을 감당 못하고 자살하는 것과 달리 살아 훈장을 탄다. <복수는 나의 것> 역시 원한에 찬 약자, 신하균이 영미의 ‘강자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유괴하고 살인하지만, 진정한 강자인 송강호 손에 죽는다. 그는 “착하게 살아왔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책하지 않고, 영미를 죽인 자리에서 자장면을 먹을 만큼 강한 면모를 보인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는 ‘사회적 강자’지만 ‘내면적 약자’였다. 그는 섬약하고 소심한 소년(Boy)으로, 뻔뻔한 성인남자(Man)가 되지 못했다. 반면 최민식은 사회적 약자이지만 내면적 강자이다. 뻔뻔함과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그는 혀와 죄의식마저 반납하고, 결국 살아남는다.

친구, 애정관계라기보다 권력관계

<>은 왕따 피해자 귀신이 친구들을 죽여나가는, 전형적인 ‘약자의 원한’ 이야기인 양 흘러간다. 가해자이지만 기억이 없는 김하늘은 기억을 알아갈수록 죄의식과 자괴감에 빠진다. 비극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공포의 핵심이며, 끔찍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죄의식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공포의 진수라는 듯이.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죄의식은 가해자의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럽게도 피해자의 과대망상이었던 것이다.

지원과 수인의 관계는 애정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이다. 수인이 과거의 약자적 동질성을 빌미로 지원을 따라다녔다기보다는 지원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수인을 일부러 자신의 사정권 안에 두면서, ‘친구 승인’의 떡고물을 줬다 뺐었다 하며 교묘하게 지배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원은 사회적 강자이자 내면적 강자이다. 그녀에겐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녀는 부자이자 공부도 잘하고 친구관계에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이른바 ‘짱’이다(남고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짱-똘마니’ 권력관계가 왜 여고에서는 없다 생각하는가?). 지원은 수인에게 은서의 미대 입학시험을 대신 치게 할 만큼 권력이 있었으며, 친구들이 “다 네가 시켜서 한 짓”이라 술회할 만큼 그들의 행동을 장악했었다. 수인은 지원의 덕택으로 (왕따를 당하면서도!) 그들과 친구인 척 어울리며 모종의 권리를 누렸다(“지가 좋아서 친구한 줄 알아, 우릴 이용한 거야, 친구인 척하면 얻는 게 많으니까”). 수인에게 지원은 “너 아니었으면 나 같은 건…”이라 감읍하는 왕이자, 오붓했던 어린 시절을 은밀하게 추억하게 하는 연인이고, “네가 되고 싶다”며 선망되는 ‘위인’이다. 지원은 애들에게 수인의 효용(?)을 숙지시키며 여행에 동참시킨다. 수인은 지원에게 감지덕지하며, 다른 애들의 따돌림에 상처받는다. 지원이 그녀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수영할 줄 알지?” 하며 떠미는 지원이라면 당연히 저도 수영할 줄 알리라 생각해서 떠밀었지만, 막상 지원은 수영을 못했다. 먼저 빠진 수인이 지원을 떠받쳤지만 수인의 발이 끼고 지원은 그녀를 뿌리친다. 그러나 숨이 넘어가는 찰나, 수인의 ‘령’이 그토록 원하던 지원의 자리로 들어가고 지원의 ‘령’은 뜨고 만다.

수인은 “평생을 제 의지대로 살아오지 못했던” 약자지만, 이 기회에 “행복해지고 싶어서”, “기억하지마”라며 자기 최면을 걸며, 갱생의 의지로 급기야 유학을 가려 한다. 그러나 뺏긴 몸을 되찾고자 ‘가깝고도 지배하기 쉬운’ 엄마의 자리에서 절치부심하던 지원의 ‘령’은, 몸이 ‘물 건너가기’ 전에 과거를 일깨우고자 밤마다 괴롭히고, ‘날 빠뜨린 년’들을 죄다 익사시킨다. 그녀는 수인을 왕따시킨 것이나 애들을 죽이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오직 내 몸을 찾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며, 수인의 자해로 몸 탈환에 실패한 뒤에도 수인 엄마의 몸을 빌려 재기를 다짐한다. 영화는 ‘약자의 원한’보다 훨씬 무서운 ‘강자의 의지’를 보여주며, 그들이 ‘사회적 관계의 총화로서의 몸’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쟁을 그리고 있다.

모성‘애’의 비극이 아니라 모성 ‘자체’의 공포

심영섭이 언급한 물귀신 영화 <검은 물 밑에서>는 본질적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된 엄마의 사회적 불안감과 아이를 뺏길지 모른다는 분리불안, 그리고 엄마의 가출로 박탈감에 사무치는 아이귀신의 ‘모성 희구’를 다루었다. <주온>은 폭력으로 파탄난 가정의 아이가 귀신이 된 이야기로, 가정해체와 애정결핍을 공포의 재료로 삼으며, <착신아리>는 (천식발작으로 대변되듯) 아이의 과도한 모성집착을 공포로 잡는다. 이들은 모두 ‘모성에 배고파하는 것’을 공포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에서는 모성 ‘결여’가 아니라 모성 ‘자체’가 바로 공포이다. <장화, 홍련>은 의붓어머니를, <올가미>는 시어머니를 공포의 대상으로 놓고 있지만, <>은 친어머니를 공포의 대상으로 놓고 있으며, 〈4인용 식탁>에서는 모성의 책임을 방기하는, 즉 강요된 모성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아이를 내버리는, ‘모성(수행)의 부정’이 공포였다면, <>은 모성(수행) 자체에 이미 공포가 깃들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의 초반부터 오락가락하는 엄마의 이미지는 매우 공포스럽다. 이른바 ‘정신분열병인성 모성’(schizophrenogenic mother)으로 지배적이고, 순교자처럼 굴면서 자식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자식과의 관계를 영속시키려드는 어머니라니!(“나를 엄마로 생각하긴 하는 거니?”, “네가 아프면 내가 아파”, “하루종일 너만 기다리고 있는 나를 두고…”). 심지어 목걸이로 암시하듯 딸의 관계까지 탐낸다. 물론 이런 혐오스러운 짓들은 엄마의 몸을 쓴 지원의 행동이지만, 그에 앞서 지원의 ‘령’ 역시 제 엄마의 몸을 뺏어 차고앉은 게 아니던가? 엄마와 딸이 원수관계로 암시되어 있으며, (일본영화 <비밀>의 평화스러운 ‘모녀간 빙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화인 몸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모성‘애’의 비극이 아니라, ‘애’(愛)인지 ‘증’(憎)인지 이전에 모성 ‘자체’의 권력적 성격에 배태된 공포이다. <>은 잘 만든 공포영화가 아니지만, 굉음이나 내는 서프라이즈영화나 ‘반전을 위한 반전’을 남발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반전을 통해 보여주는 ‘강자의 의지’나 ‘모성 자체의 공포’는 신선할 뿐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를 ‘부-욱’ 긋는 소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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