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까지 한국에서 프로듀서, 영화수입, 제작 등의 일을 해온 김수진(36)씨는 지금 미국에서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에 그가 설립한 제작사 이름은 에기픽처스(Eggy Pictures, 愛氣), 영화 제목은 <레드 스노>다. 종군위안부로 팔려간 두명의 한국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놓고, 할리우드의 최고 에이전시 회사로 꼽히는 윌리엄 모리스사가 “거짓말이다 싶을 만큼” 호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꽃잎>과 <나쁜 영화>의 프로듀서로, <강원도의 힘>의 기획자로, 91년 설립한 영화사 ‘영화센터’의 대표로 제작과 수입일까지 했던 이 영화인은 지난 5년 동안 어떻게 지내다가 이런 의외의 프로젝트를 들고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건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쉴새없이 일만 해와 지쳐 있었던 데다 할리우드영화 같은 때깔나는 영화가 만들어보고 싶어 미국영화협회(AFI)로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광주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합류했던 <꽃잎>의 인연으로 장선우 감독과 <나쁜 영화>까지 작업하고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까지 끝낸 상황이 그랬다. <꽃잎>을 하기 전까지 그는 시나리오만 보고 <레옹>을 사고 파리여행을 갔을 때 극장에서 본 뒤 “단지 너무 좋아서” <퐁네프의 연인들>을 사들인 감각있는 수입업자이기도 했다. ‘영화센터’에서 제작한 첫 영화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도 흥행시킨 제작자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지방업자에게 사기를 당했고, 회사를 부도낸 파트너가 종적을 감춰 혼자 빚을 해결해야 했었다. 지칠 만도 했다.
프로듀서 과정을 전공하기 위해 AFI를 들어간 뒤, 그는 전혀 다른 경험을 새로 쌓기 시작했다. 삶에 있어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을 소재로 만든 졸업작품 <방문>(The Visit)으로 미국감독협회가 주는 학생작품상을 받았고, 1만 대 1의 경쟁을 뚫어 <매트릭스>의 제작자인 조엘 실버의 실버 프로덕션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 졸업 뒤엔 워너브러더스에서 영화 투자와 합작, 구매 등을 결정하는 부서에 1년 반을 근무했다. 그리고 2년 전 자신의 두 번째 제작사를 미국에 세웠다. 그동안 배운 것들을 싸안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배운 걸 써먹기에 두 나라의 시스템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은 철저하게 에이전시를 통해 움직인다. 에이전시들은 자기네가 데리고 있는 감독과 배우를 묶고 협찬사로 붙여 패키지를 만든 다음 제작사에 판다. <반지의 제왕>도 ICM이 패키지를 만들어 뉴라인에 판 상품 아닌가.” 현재 제작 준비 중인 <레드 스노>는 1년 전에 산 시나리오다. 좋은 징조인지 한달 뒤 이십세기 폭스사가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MPAA와 RKO가 공동주최하는 시나리오상 할리 메릴상 대상을 탔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모리스사는 종군위안부라는 소재가 “유니버설하다, 전세계에 먹힐 것”이란 평가를 내렸다고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코시즈 등의 감독들과 수많은 유명 스타들, 나이키, 코카콜라 등의 브랜드를 클라이언트로 데리고 있는 에이전시가 평생 만나보기도 힘든 감독들의 리스트를 그에게 건네준 것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돈이 되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확신이 서면 철저하게 돕는다. 패키지가 성사되지 않더라도 뒤끝은 없다.”
이번에 돌아가면 그는 아시아 및 한국 내 배급권을 국내 영화사가 확보하도록 계약조건을 조정하는 미팅을 갖는다. 아직까지 믿기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가 좋은 선례가 됐으면 하는 당연한 바람이 그의 표정엔 가득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된다.” LA의 따가운 태양에 오랫동안 그을렸나. 유난히 남들보다 까만 살갗 때문에 그에게서는 신입생 같은 힘차고 씩씩한 인상이 한껏 풍겨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