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딸의 이름은 김나영(전도연)이다. 빚보증 잘 서는 무능한 아버지 김진국(김봉근)은 딸의 대학등록금까지 날렸고, 대중탕에서 때를 밀며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 조연순(고두심)은 궁상맞고 이악스럽다. 젊고 자존심 센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곤궁하고 어머니 때문에 초라하다. 무책임한 아버지를 원망하다가도 아버지를 구박하는 어머니가 얄밉고, 부모에게 화를 냈다가도 화낸 자기가 싫어지는 나영은 흔들릴 뿐 갈 데가 없다.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할 곳이기에 남자친구의 오토바이 뒷자리에서나 눈물을 씻는 나영의 모습에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 혜주, 지영의 몇년 뒤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직장에서 떠나는 뉴질랜드 연수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가출하고, 아버지의 지병이 깊어졌음을 발견한 나영은 그가 있을 법한 섬 마을 하리를 찾는다. 그리고 자전거를 탄 하리의 우체부가 나영을 돌아보는 순간 놀랍게도 시간이 뒤틀린다. 나영은 스무살의 해녀 연순(전도연)의 손님이 되어, 잘생긴 우체부 진국(박해일)을 향한 그녀의 첫사랑을 목격한다.
몇번의 개입은 하지만 <인어공주>의 나영은 <백 투 더 퓨처>의 마이클 J. 폭스만큼 부모를 연결시키기 위해 활약하지 않는다. 과거의 인물들이 나영을 <식스 센스>의 브루스 윌리스마냥 본 듯 만 듯 대하는 모습은, 이것이 나영이 뉴질랜드행 비행기에서 꾸는 꿈이나 아버지가 머문 마을 언덕에서 상상한 과거이리라 짐작하게 한다. 현재-과거-현재의 구성을 취한 <인어공주>의 2장이며 몸통인 연순과 진국의 러브스토리는- 둘의 미래를 예고한 1장의 현실이 멀리서 그늘을 드리울 뿐 -햇빛 찬란한 동화다. 1장의 착잡한 침묵 대신 웃음과 탄식이 빈틈없이 이어지고,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뛴 계절에 화면은 색채로 약동한다. 2장이 주는 재미의 큰 부분은, 고두심의 연기 매너까지 습득한 노력이 엿보이는 전도연의 다부진 1인2역을 포함한 연기의 복선들이다. 모두가 타박하는 엄마의 침 뱉는 버릇은 과거로 돌아가면 해녀의 싱그러운 호흡법이 된다. “죽고 잡은 년은 나”라고 악쓰던 엄마가 이곳에서는 삶에 대한 환희를 가누지 못해 나영을 꽉 껴안는다. 보증 선 아버지를 쥐잡듯 다그치던 엄마가 이곳에서는 “사람이 우선 착허고 봐야지”라고 힘주어 말한다. 불행의 상류로 찾아갔더니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인어공주>가 흥미롭다면, 모녀 관계를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에 다시 포용하고 시민권을 수여해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판타지, 그리고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이 참신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또는 투쟁의 구조를 지닌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아버지는 따라잡아야 할 영웅 아니면 무찔러야 할 괴물이었다. 그러나 <인어공주>의 딸은 어머니를 닮거나 버림으로써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극복한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했기에 어머니로 인해 더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또한 ‘아들’을 주체로 삼은 영화가 어머니를 거의 배제한 반면 딸의 영화 <인어공주>는 어머니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재발견하는 차이도 눈길을 끈다. <인어공주>는 결말에 이르러 엄마의 스무살 시절을 다시 방문한다. 하지만 영화는 오직 희망만 가득한 과거의 정지된 순간에 잠들지 않고, 살 냄새 자욱한 현실의 목욕탕으로 구태여 돌아온다. 목욕탕 속 숨겨진 바다 속으로 잠수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순간 고두심의 ‘1인2역’처럼 보인다. 거칠 것 없이 물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건강한 여인의 팔다리는 어머니 연순의 것인 동시에 딸 나영의 것이기 때문이다.
:: 1인2역의 영화들
대조할수록 빛나는 배우의 재능
1인2역은 <인어공주>가 던진 승부수 가운데 하나다. 박흥식 감독은 이 아이디어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김태용 감독이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인어공주>가 1인2역을 처음 선보인 한국영화는 아니다. 최근 한국영화 가운데 1인2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쉬리>일 것이다. <쉬리>는 특수요원 이방희와 평범한 여성 이명현의 두 얼굴을 북한의 본모습이라고 암시했다. 오승욱 감독의 <킬리만자로>도 1인2역이 인상적인 영화다. 깡패와 형사로 상반된 삶을 살았던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 여기서 1인2역을 소화한 박신양은 <범죄의 재구성>에서 비슷한 연기를 다시 시도했다. 복수를 위해 형의 얼굴로 거듭난 인물로 등장한 박신양은 대조적인 성격의 두 인물을 그려냈다.
흔히 1인2역 혹은 1인다역은 배우의 재능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사용되곤 했다. <오스틴 파워> 같은 영화는 대표적이다. 마이크 마이어스는 주인공 오스틴 파워와 악당 닥터 이블과 팻 배스터드를 동시에 연기했다. 이런 1인다역의 원조로 손꼽히는 인물은 피터 셀러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그는 미국 대통령, 맨드레이크 대위, 나치 과학자 스트레인지러브 등 1인3역을 소화했고 이외에도 몇편의 영화에서 1인다역을 보여줬다. 원작 <너티 프로페서>의 제리 루이스, 리메이크판 <너티 프로페서>의 에디 머피도 피터 셀러스의 계보에 놓인 배우로 볼 수 있다. 화장실 유머의 대가 패럴리 형제와 황당한 상상력의 소유자 찰리 카우프만, 스파이크 존즈 콤비도 1인2역을 선호하는 창작자들.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의 짐 캐리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기네스 팰트로, <어댑테이션>의 니콜라스 케이지 등은 그들의 분신으로 기억에 각인된 바 있다. 물론 이런 장치가 코미디의 전유물은 아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데드 링거>는 쌍둥이 의사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린 작품이며,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불가해한 삶의 형상을 눈부신 형식미로 표현한 영화다.
남동철 namdong@hani.co.kr